조선 상고사

제4장 계립령(鷄立嶺) 이남의 두 신국(新國)

운우(雲雨) 2014. 8. 15. 19:36

 

1, 계립령(鷄立嶺) 이남의 별천지(別天地)

 

계립령(鷄立嶺)은 지금의 조령(鳥嶺: 일명 새재)이니, 지금의 문경읍(聞慶邑)북산(北山)을 계립령이라고 한다. 그러나 고대에는 조령(鳥嶺)의 이름은 <저릅재>였다. <저릅>은 <삼>의 고어(古語)이니, <저릅>을 이두자의 음(音)으로 <계립(鷄立)>이라고 쓰고 뜻(義)으로 <麻木(마목)>이라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령(鳥嶺)이 곧 계립(鷄立)이다.

계립령 이남은 지금의 경상북도 전체를 일컫는 것이니, 계립령 일대로 지금의 충청북도를 막고, 태백산(太白山: 봉화(奉火)의 태백산(太白山- 원주)으로 지금의 강원도를 막으며, 지리산(智異山)으로 지금의 충청남도와 전라남도를 막고, 동과 남으로는 바다가 둘러싸여서 따로 한 판(一局)을 이루고 있었으므로, 조선 열국 당시에 네 부여(고구려를 혹은 졸본부여(卒本扶餘)라고 불렀다.-원주)가 분립하고 있었다.

고구려가 동부여를 정복한다. 또 낙랑을 정복한다. 위씨(衛氏)가 한(漢)에게 망하여 그 땅이 사군(四郡)으로 되었다. 백제가 마한을 멸하였다. ......하는 소란이 있었지만, 조령 이남은 그런 바깥세상의 소식과는 동떨어져서 진한(辰韓). 변한(弁辰)의 자치부(自治部) 수십 개 나라(國)들이 그 비옥한 토지를 이용하여 벼. 보리. 기장. 조 등 농업과 양잠과 직조에 힘써서 곡류(穀類)와 포백류(布帛類)를 생산하고 철(鐵)을 캐서 북방 여러 나라에 공급하였고, 변진(弁振)은 음악을 좋아하여 변한슬(弁韓瑟: 불한고-원주)이란 것을 창작하여 문화가 매우 발달하였으나, 일찍이 북방의 유민(遺民)으로서 마한(馬韓)의 봉지(封地)를 받았기 때문에 마한의 통제를 받고, 마한이 망한 뒤에는 백제의 통제를 받았다.

그러나 그 통제는, 소극적으로는 (一) <신수두>의 건설과, (二) <신한> 칭호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적극적으로는 (一) 매년 찾아가서 인사할 것과, (二) 토산물을 조공으로 바치기를 거르지 않고 수행하는 것 뿐이었는데, 미래에 진한(辰韓) 자치부는 신라국(신라국)이 되고 변진(弁辰) 자치부는 6가라(加羅) 연맹국이 되어, 차례로 백제에 반항하기에 이르렀다.

 

2, 가라 6국(國)의 건설

 

지금의 경상남도 등지에 변진(弁辰)의 12자치부(自治部)가 설립되었다는 것은 제3편 제4장 제4절에서 이미 서술하였다.

위의 각 자치부를 대개 <가라>라 칭하는데, <가라>는 큰 못 또는 큰 늪(大沼)이란 뜻(義)이다. 각부가 각각 그 제방을 쌓아 냇물을 막아 큰 못을 만들고 그 부근에 자치부를 세워 그 부락명을 <가라>라 칭하였다.

<가라>를 이두문자로 가라(加羅). 가락(加洛). 가야(加耶). 구야(狗倻). 가야(伽倻) 등으로 썼는데, 야(耶). 야(倻). 야(倻) 등은 옛 음(古音)으로는 다 <라>로 읽었다.

그리고 <가라>를 혹은 <官國(관국)>이라고도 썼는데, <官(관)>은 그 음(音)의 초성(ㄱ)과 중성(ㅏ)을 떼어서 <가>로 읽고, <國(국=라)은 그 뜻(義)의 초성(ㄹ)과 중성(ㅏ)을 떼어서 <라>로 읽은 것이다. (*옛날에는 나라(國)를 <라>라고 하였다-옮긴이)

기원 42년경에 각 <가라>의 자치부원(自治部員)- 我刀干(아도간). 汝刀干(여도간). 彼刀干(피도간). 오도간(五刀干). 留水干(유수간). 留天干(유천간). 神天干(신천간). 神鬼干(신귀간). 五天干(오천간) 등리 지금의 김해읍(金海邑) 구지봉(龜旨峰) 위에 모여서 대계(大契: 계는 당시 지치회의 이름-원주)를 열고, 김수로(金首露) 여섯 형제를 추천해 여섯 <가라>의 군장(君長)으로 삼았다.

김수로는 <제일(第一) 가라>, 곧 김해의 주인이 되어 <신가라>라 칭하였다. <신>은 <大(대: 크다)>의 뜻이고 <首(수: 머리)>의 뜻이므로, <신가라>는 이전 사서(前史)에 보이는 <금관국(金官國)>이라 쓴 것이 적절한 한문 번역어일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가락(駕洛)> 혹은 <구야(狗倻)>라고 썼는데, 이들 둘은 다 <가라>의 이두문자이므로, 이로써 여섯 <가라>를 총칭(總稱)하는 것은 무방하지만, 다만 전적으로 <신가라>만을 전칭(傳稱)하는 것으로 쓰는 것은 옳지 않다.

제2는 <밈라가라>이다. 지금의 고령(高靈)앞을 흐르는 내를 막아 <가라)를 만들고 이두문자로 <미마나(彌摩那)>혹은 <임나(任那)>로 쓴 것으로서, 여섯 <가라> 중에 그 후예들이 가장 강대하였기 때문에 이전 사서에서 <대가라(大加羅)> 혹은 <대가야(大加耶)>라고 기록한 것이다.

제3은 <안라가야>이다. 지금의 함안(咸安)앞을 흐르는 내를 막아 <가라>를 만들고 이두문자로 <안라(安羅)>, <아니라(阿尼羅)> 혹은 <아니량(阿尼良)>으로 쓴 것으로서, <아니량(阿尼良)>이 후세에 와전(訛傳)되어 <아사라(阿巳羅)>가 되고, 아사라(阿巳羅)가 또 완전 되어 <아라(阿羅)>가 되었다.

제4는 <고링가라>로서, 지금의 함창(咸昌)이다. 또한 그 앞을 흐르는 내를 막아 <가라>를 만들고 이두문자로 적은 것인데, <고링가라>가 와전되어 <공갈>이 되었는데, 지금의 <공갈못>이 그 유허(遺墟)이다. 여섯 <가라> 중에 오직 이것 하나가 전해 오면서 그 물속에 있는 연꽃과 연 잎이 오히려 수 천년 전의 풍광(風光)을 말해주는 듯하였는데, 이조(李朝) 광무(光武) 연간에 총신(寵臣) 이채연(李采淵)이 논을 만들려고 그 제방을 터버려 아주 폐허가 되게 하였다.

제5는 <별뫼가라>이다. <별뫼가라>는 <별뫼>라는 산중에 쌓은 가라로서, 지금의 성주(星州)이며, 이두문자로 <성산가라(성산가라)> 혹은 <碧珍加羅(벽진가라)>라고 쓴 것이다.

제6은 <구지가라>이니, 지금의 고성(固成) 중도(中島)가 그곳으로, 또한 내를 막아 <가라>를 만들고 이두자로 <고자가라(古資加羅)라 쓴 것이다. 여섯 <가라> 중에 제일 작은 나라이므로 또한 小加耶(소가야)라 칭하였다.

여서 <가라>가 처음에는 형제들의 연맹국(聯盟國)이었으나, 그 뒤에 연대가 내려갈수록 서로 사이의 촌수가 멀어져서 각자의 독립국이 되어 각자 행동을 취하였는데, <삼국사기>에 이미 6가라본기(六加羅本記)를 빼버리고 오직 신라본기(新羅本記)와 열전(列傳)에 신라와 관계된 가라의 일들만 기록해 놓은 중에, <신가라>를 금관국(金官國)이라 쓴 것 이외에는, 기타 다섯<가라>는 거의 구별 없이 모두 <加耶(가야)>라고 써서 그 가야가 어떤 <가라>를 가리킨 것인지 모르게 된 것이 많다. 그러므로 이제 본서에서는 가능한 한 이를 구별하여 쓰고, 여섯 <가라>의 연대(年代)도 삭감을 당한 듯하므로, 신라의 앞에 적는 것이다.

3, 신라(新羅)의 건국

 

지금까지의 학자들은 모두 다 신라사(新羅史)가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의 역사보다 비교적 완전하다고 하였으나, 이는 아주 모르는 말이다. 고구려사와 백제사는 삭감(削減)이 많지만, 신라사는 위찬(僞撰 : 거짓 편찬)이 많아서 사료(史料)로 삼기에 적합한 것이 매우 적으니, 이제 신라 건국사(建國史)를 이야기 하면서 이에 대하여 간략히 설명하도록 한다.

신라의 제도(制度)는 6부3성(六部三姓)으로 조직되었는데, 신라본기에 의하면, 6부는 처음에 알천양산(閼川楊山). 돌산고허(突山高墟). 무산대수(茂山大樹). 자산진지(자山珍支). 금산가리(金山加利). 명활산고야(明活山高耶)의 여섯 촌(村)이었다.

신라가 건국된 후 제3세인 유리왕(유理王) 9년 (기원 32년)에 6촌의 이름을 고치고 성(姓)을 주었는데, 알천양산(閼川楊山)은 양부(梁部)라 하여 이(李)씨 성(姓)을, 돌산고허(突山高墟)는 사량부(沙梁部)라 하여 최(崔)씨 성을, 무산대수(茂山大樹)는 점량부(漸梁部)라 하여 손(孫)씨 성을, 자산진지(자山珍支)는 본피부(本彼部)라 하여 정(鄭)씨 성을, 금산가리(金山加利)는 한지부(漢紙部)라 하여 배(裵)씨 성을, 명활산고야(明活山高耶)는 습비부(習比部)라 하여 설(薛)씨 성을 주었다고 하며, 삼성(三姓)은 박(朴). 석(昔). 김(金) 삼가(三家)이다.

처음에 고허(高墟) 촌장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 아래의 라정(蘿井) 곁에 말이 꿇어앉아 우는 것을 바라보고 달려가 본즉, 말은 간곳이 없고 큰 알리 있으므로 이를 쪼개었더니 갓난아이가 나왔다. 그를 거두어 길러 성(姓)을 박(朴)이라 하였는데, 그 나온 큰 알이 <박>만 하므로 <박>의 음(音)을 취하여 성으로 삼았으며,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하였다고 한다. 혁거세(赫居世)는 그 읽는 법과 의미가 다 전해지지 못하였다.

혁거세가 나이 열셋(13)에 이미 영명(英明)하고 숙성(夙成)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받들어 <居西干(거서간)>을 삼으니, 거서간(居西干)은 당시의 말에 귀인(貴人)의 칭호(稱號)라고 하였다. 이 때는 신라 건국 원년(기원전 57년)으로, 이 이가 박씨(朴氏)의 시조이다.(* 거서간(居西干)은 몽고 고대어에서 대여섯 명의 소수 사람들이 둘러 앉아서 대표를 뽑을 때, 그 뽑힌 대표자를 가리킨다고 한다.-옮긴이)

신라의 동쪽에 왜국(倭國)이 있고, 왜국의 동북 1천리에 다파나국(多婆那國)이 있는데, 다파나국왕이 여국왕의 딸을 취하여 아이를 밴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으므로, 왕이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내어 버리라 하였다. 그 여자가 차마 그럴 수 없어서 천으로 싸서 금궤에 넣어 바다에 띄웠더니, 그 금궤가 금관국(金官國)의 해변에 이르렀으나, 금관국 사람들은 그것을 괴이하게 여기고 건져 올리지 않았다. 그 금궤가 계속 바다에 떠서 흘러가 진한(辰韓)의 아진포(阿珍浦) 입구에 이르니, 이때는 박혁거세 39년(기원전 19년)이었다.

이때 바닷가에 살던 한 노파가 그것을 건져 올려 보니 한 갓난아이가 그 속에 있었다. 그를 거두어 길러, 그가 금궤 속에서 탈출하였으므로 이름을 <탈해(脫解)>라 하고, 금궤가 떠오던 당시에 까치가 따라오며 울었으므로, 한자 <작(鵲)>자의 변(邊)을 떼어 성(姓)을 삼아 <석(昔)>이라 하니, 이 이가 석씨(昔氏)의 시조라고 하였다.

석탈해(昔脫解) 9년(기원 65년)에, 금성(金城: 신라의 서울, 즉 경주-원주) 서쪽의 시림(始林)에 닭이 우는 소리가 나서 대보(大輔) 호공(狐公)을 보내어 가보게 하였더니, 금색의 작은 궤가 나무 가지에 걸려 있고, 그 밑에서 흰 닭이 울고 있었다. 그 금궤를 열어보니 또한 작은 아기가 들어 있으므로, 그를 거두어 길러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姓)을 <김(金)>이라 하였는데, 이 이가 김씨(金氏)의 시조라고 하였다.

<궤(櫃)에서 나왔다.> <알에서 깠다.>고 하는 등의 신화는 고대인이 그 시조(始祖)의 출생을 신비화한 신화(神話)이지만, 다만 6부 3성의 사적(事跡)이 고대사(古代史)의 원본(原本)이 아니고 후세인이 덧붙이고 깎아낸 부분이 많음이 애석하니, 이제 이것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를테면, 첫째, 조선 고사의 모든 인명. 지명이 처음에는 우리 말로 짓고 이두자로 썼으나, 후에 한문화(漢文化)가 성행하면서 한자로 개작(改作)하였는데, 전자는 <메주골>을 <彌鄒忽(미추홀)> 혹은 <매초홀(買肖忽)>이라 쓴 것과 같은 것들이고, 후자는 그것을 <인천(仁川)>이라고 개명(改名)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제 알천양산(閼天楊山). 돌산고허(突山高墟)......등 한자로 쓴 6촌(村)의 본래 이름이고, 양부(梁部). 沙梁部(사량부)......등 이두자로 지은 6부(部) 명칭이 6촌(村)의 나중의 이름이라고 한다면, 이 말이 어찌 선후(先後)의 순서를 거꾸로 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의문이 있다.

둘째, 신라가 불경(佛經)을 수입하기 이전에는 모든 명사(名詞)를 다만 이두문자의 음(音)과 뜻(義)을 맞추어 적었을 뿐인데, 불학(佛學)이 성행한 뒤에 다소의 괴이한 승려들이 비슷하기만 하면 불경의 숙어(熟語)를 맞추어 다른 이두문자로 개작(改作)하였다.

예를 들면 <소지(炤智)>왕을 혹 <비처(毗處)>왕이라고도 칭하는데, 소지(炤智)나 비처(毗處)는 둘 다 <비치>로 읽는다. 그러나 비처(毗處)는 원래부터 쓰던 이두자이지만 소지(炤智)는 불경에 맞추어 개작한 이두자이다.

<유리(유理)>왕을 혹 < 세리지(世利智)>왕이라고도 칭하는데, 유리(유利)나 세리(世利)는 다 <누리>로 읽는다. 그러나 <유리(유리)>는 원래부터 쓰던 이두문자이지만 <세리(세리)>는 불경에 맞추어 개작한 이두문자이다.

<탈해(脫解)>왕도 그 주(註)에서 일명 토해(吐解)라고 하였는데, 탈해(脫解)나 토해(吐解)는 다 <타해> 혹은 <토해>로 읽어야 할 것이다. 그 말의 뜻은 무엇인지 모르나, 당시의 속어(俗語)로 지은 명사임은 명백하다.

<토해(吐解)>는 원래부터 쓰던 이두문자이고 <탈해(脫解)>는 개작한 이두문자이다. 불경에 <탈해(脫解)>란 말이 있으므로 <토해(吐解)>의 뜻(義)을 취하여 <탈해(脫解)>로 개작한 것이지만, 원래 토해(吐解)>는 당시 속어의 음(音)을 취한 것일 뿐이고 탈출(脫出)한다거나 혹은 풀려난다(解出)는 뜻은 없었다. 그런데 금궤에서 탈출하였기 때문에 이름을 탈해(脫解)라고 하였다는 것은 당시 괴승(怪僧)들이 멋대로 갖다 붙인 해석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셋째, 세 성(姓)의 시조(始祖)가 다 큰 알에서 나왔다면, 그 큰 알들은 다 <박>만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세 성(姓)의 시조들은 동일한 <박>씨가 되지 않고 박씨 시조 이외의 다른 두 시조는 <석>. <김>씨가 되었는가?

석(昔). 김(金) 두 성이 다 금궤에서 나왔다면, 왜 동일한 김씨가 되지 않고 하나는 석씨가 되고 또 하나는 김씨가 되었는가?

석탈해의 금궤를 따라오면서 까치가 울었기 때문에 한자 鵲(작: 까치) 자의 변을 떼어내어 <석>씨가 되었다고 한다면, 김알지(金閼智)가 태어날 때에는 닭이 울었으므로 한자 <鷄(계:닭)>의 변을 떼어내어 <해(奚)>씨가 되어야 할 텐데, 왜 양자에 대하여 각기 다른 예를 적용하여 전자는 김씨가 되지 않고 석씨가 되었고, 후자는 해(奚)씨가 되지 않고 김씨가 되었는가. 신화(神話)라 하더라도 이처럼 난잡하여 조리가 없을 뿐 아니라, 게다가 한자(漢字)의 파자(破字)놀음의 수작거리가 섞여서 이두문 시대의 실례와는 많이 다르다.

넷째, 처음 건국할 당시의 신라는 경주(慶州) 한 구석에 터전을 잡고 열국 중에서 가장 작은 나라였다. 그런데도 “변한(卞韓)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 “동옥저(東沃沮)가 좋은 말(良馬)2백 필을 가져와 바쳤다.”고 하는 것은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거의 가당치 않은 말일 뿐만 아니라, “북명인(北溟人)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도장을 주워서 바쳤다.”고 한 것은 더욱 황당한 말인 듯하다.

그 이유는 북명(北溟)은 북 <가시라>.곧 북동부여의 별명(지금의 혼춘(琿春)-원주)이고, 고구려 대주류왕(大朱留王)의 호위장사인 괴유의 장지인데, 이제 혼춘의 농부가 밭에서 왕의 도장을 주워 수천 리를 걸어와서 경주 한 구석의 작은 나라인 신라왕에게 바쳤다고 하는 것이 어찌 실화(實話)일 수 있겠느냐. 이는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동부여, 곧 북명(北溟)의 고적(古跡)을 지금의 강릉으로 옮긴 뒤에 조작해낸 근거 없는 황당한 이야기이니, 다른 것들도 거의 믿을만한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신라가 열국 중에서 학문이나 예술 등이 가장 늦게 발달하여 역사의 편찬이 겨우 그 건국 6백년 후에 시작하여 억지로 북방 여러 나라들의 신화를 모방하여 선대사(先代史)를 꾸몄는데, 그나마도 궁예(弓裔). 견훤(甄萱) 등의 병화(兵火)에 불타버리고, 고구려조 문사(文士)들이 이곳저곳에 남겨놓은 검불들을 주워 모아 만든 것이므로, 신라본기에 있는 기록의 진위(眞僞)를 가려내는 일은 고구려. 백제 두 나라의 역사와 매한가지임에도 불구하고, 사가(史家)들은 흔히 신라사는 비교적 완전히 갖추어진 것인 줄 알고 그대로 믿어왔던 것이다.

나의 연구애 의하면, 신라는 진한(辰韓) 6부(部) 전체를 부르는 명칭이 아니라 6부 중의 하나인 사량부(沙梁部)이다.그리고 신(新羅)나 사량(砂梁)은 둘 다 <새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새라>는 냇물(川)의 이름인데, <새라>는 냇가 위에 있으므로 <새라>라 칭한 것이다.사량(沙梁)은 사웨(沙喙)(진흥왕 비문(碑文)에 보임-원주)라고도 썼는데, 사훼(沙喙)는 <새불(=새의 부리)>로 읽어야 할 것이며, 이 또한 <새라(= 냇가)> 위에 있는 <불(=벌)>, 곧 들(原野)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신라본기에 신라의 처음 이름을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는데, 서라벌(徐羅伐)은 <새라불>로 읽어야 할 것이며, 이는 <새라의 불(=벌, 들판)이란 뜻이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고허촌장(高墟村長)인 소벌공(蘇伐公)의 양아들(養兒)인데, <고허촌>은 곧 사량부(沙梁部)이므로, 소벌공의 <소벌(蘇伐)> 또한 사훼(沙喙)와 같이 <새불)로 읽어야 할 것인바, 이것은 본래 지명이다. 그리고 <공>은 존칭으로서, <새불> 자치회의 회장이므로 <새불> 공(公)이라고 칭한 것이다. 말하자면 소벌공(蘇伐公)은 곧 고허촌장이란 뜻이므로, 소벌공을 마치 인명처럼 쓴 것은 사가(史家)들의 잘못이다.

<새라> 부장(部長)의 양자(養子)인 박혁거세가 6부 전체의 왕이 되었으므로 국호를 <새라>라 하고, 이를 이두문자로 <사로(斯盧)>. <신라(新羅)> <서라(徐羅)> 등으로 쓴 것이며, 박(朴)씨뿐 아니라 석(昔). 김(金) 양씨도 다 사량부의 귀한 성씨이니, 세 성(三姓)을 특히 높여 떠받든 받든 것은 또한 삼신설(三神說)을 따르면서 그것을 모방한 것이다.

신라본기에 석탈해왕 9년(기원 65년)에 비로소 김씨의 시조인 어린 아기 김알지(金閼智)를 주웠다고 하였으나, 파사왕(婆莎王)원년(기원 80년)에 왕후 사성부인(史省夫人)김씨는 허루(許婁) 갈문왕(葛文王: 죽은 후 왕으로 추존한 왕을 신라에서는 <갈문왕(葛文王)>이라 하였다.-원주)의 딸이라 하였은즉, 그 나이를 따져보면 허루(許婁)는 거의 김알지의 아버지뻘 되는 김씨일 것이니, 이로 미루어보면, 朴. 昔. 金 세 성이 당초부터 사량부 내에서 서로 통혼(通婚)하는 거족(巨族)이다가, 같이 모여 의논한 결과 6부 전체를 세 성이 서로 돌아가며 왕을 하는 나라로 만들었는데, 이에 진한(辰韓) 자치의 형국이 변하여 세습 제왕(帝王)의 나라로 되기에 이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