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상고사

제1장 열국(列國) 총론(總論)

운우(雲雨) 2014. 7. 5. 22:06

1, 열국 연대(年代)의 정오(正誤)

 

삼조선(三朝鮮)이 붕괴하고 <신두수님>. <신한>. <말한>. <불구래> 등의 왕호(王號)를 참칭(僭稱)하는 자가 각지에서 군기(群起)하여 열국 분립의 국면을 만들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거니와, 열국사(列國史)를 말하려면 이전 사서(史書)에서 열국의 연대를 삭감하였으므로 이제 그 연대로부터 말해야 할 것이다.

무슨 이유로 열국의 연대가 삭감되었다고 주장하는가?

먼저 고구려의 연대가 삭감된 것부터 말해보도록 한다. 일반 사가(史家)들은, 고구려가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인 기원전 37년에 건국하여 신라 문무왕(文武王) 8년인 기원 668년에 망하였으므로 향국(享國) 연수가 합계 705년이라고 적어 왔다. 그러나 고구려가 망할 때에 “不及九百年(불급구백년)”(->9백년에 미치지 못한다.)이라고 한 비기(秘記)가 유행하였는데, 비기가 비록 요서(妖書)라 할지라도 그 시대에 그 비기가 인심을 동요시킨 도화선이 되었으므로, 이때(文武王 8년)에 고구려 연조(年祚)가 8백 몇 십 년 이상 되었다는 것은 명백하니, 본기(本記)에서 말한바 705년이 의문시되는 것이 그 하나이며,

고구려본기로 보면, 광개토왕(廣開土王)은 시조 추모왕(鄒牟王)의 13세손(世孫)이 될 뿐이지만, 광개토왕의 비문(碑文)에 나오는 “傳之十七世孫. 廣開土境平安好太王.(전지십칠세손. 광개토경평안호태왕)”(->17세손 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게 전하였다.)이라는 구절에 의하면, 광개토왕이 시조 추모왕의 13세손이 아니라 17세손이니, 이같이 세대를 빠뜨린 본기(本記)이므로, 그 705년이라 운운하는 연조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 그 둘이며,

본기로 살펴보면 고구려의 건국이 위(衛) 우거(右渠)가 멸망한 지 72년만으로 되어 있지만, <북사(北史)> 고려전(고구려전)에는 <막래(莫來)>가 서서 부여를 쳐서 대파하여 이를 통속(統屬)하였는데, 한 무제(漢武帝)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사군(四郡)을 세울 때에 고구려를 현(縣)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막래(莫來)>는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는 <모본(慕本)>의 오자(誤字)일 것이라고 하였으나, 막래(莫來)는 <무뢰>로 읽어야 할 것이니, 우박이란 뜻이고 <신(神)>이란 뜻이다. 따라서 대주류왕(大朱留王)의 이름 <무휼(無恤)>과 음(音)이 같을 뿐 아니라 본기(本記)에도 동부여를 정복한 자가 곧 대주류왕(大朱留王)이므로, 막래(莫來)는 모본왕(慕本王)이 아니라 대주류왕일 것이며, 막래(莫來) 곧 대주류왕이 동부여를 정복한 뒤에 한 무제가 사군(四郡)을 세웠으므로, 고구려 건국이 사군(四郡)을 설치하기 약 1백 몇 십 년 전이 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그 셋이다.

고구려 당대의 비기(秘記)와, 그 자손 제왕이 건립한 비문(碑文)의 내용이 먼저 증명하고 있고, 비록 외국인이 전해 듣고 쓴 기록이지만 <북사(北史)>가 또한 부증(副證)하고 있으니, 고구려 연대가 1백 수십 년 삭감되었음은 더욱 확실하다.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 선생은, 문무왕(文武王)이 고구려의 왕족인 안승(安勝)을 봉하면서 한 말 중에 나오는 “年將八百年(연장팔백년)”이란 말을 인용하여, 고구려의 연조가 삭감되었음을 인식하였으나, 사실 “年將八百年(연장팔백년)”의 <팔>은 <구>로 써야 옳을 것이니, 대개 먼저 고구려의 연대를 삭감한 뒤에 <구백>을 <팔백>으로 고쳐서 고구려의 향국(享國)이 705년이란 위증(僞證)을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연대는 왜 삭감되었을까?

고대에는 건국(建國)의 선후(先後)로 그국가의 지위를 다투는 기풍(氣風: 추모(鄒牟)와 송야(松讓)의 수도 세운 선후를 다툰 것과 같은 종류-원주)이 있었으므로, 신라가 그 건국이 고구려와 백제보다 뒤진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두 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기록상의 세대(世代)와 연조(年祚)를 삭감하여 모두 신라 건국 이후에 세워진 나라로 만든 것이다.

동부여. 북부여 등의 나라들은 신라와 직접 은원(恩怨)관계가 없는 선대(先代)의 나라이지만, 이미 고구려의 연대를 1백 몇 십 년이나 삭감하였으므로 사실 관계상 불가피하게 고구려. 백제의 부조(父祖)뻘인 동부여의 연대와 고구려. 백제의 형제 뻘인 가라(加蘿). 옥저(沃沮) 등 나라들의 연대까지도 삭감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이전의 사서(史書)에서 보인 고구려 건국 원년(元年)으로부터 1백 몇 십 년을 소급하여 기원전 190년경의 전후 수십 년 동안을 동. 북 부여. 고구려가 분립한 시기로 잡고, 그 이하 모든 열국(列國)들도 같은 시기로 잡아서 열국사(列國史)를 서술하고자 한다.

2, 열국의 강역(疆域)

열국의 연대만 삭감되었을 뿐 아니라 그 강역(疆域)도 거의 삭감되어, 북방의 나라가 수천 리 옮겨져서 남방으로 온 것이 하나둘이 아니다.

그렇다면 강역(疆域)은 또 왜 삭감되었는가?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북방의 주군(州郡)을 잃고 그 북방의 옛 지명과 고적(古蹟)을 남방으로 옮긴 것이 그 첫째 원인이고, 또 고구려가 쇠약하여 압록강 이북을 고토(古土)로 깨닫지 못하여 전대(前代)의 지리를 기록할 때에 북방의 나라를 또한 남방으로 옮긴 것이 많았음이 둘째 원인이다.

이리하여 조선의 지리(地理) 전고(典故)가 말할 수 없이 뒤바뀌었는바, 비록 근세에 와서 한구암(韓久庵). 안정복(安穽福)등 여러 선유(先儒)들의 수정을 거쳐서 다소 회복이 되었으나, 열국시대의 지리는 그 퇴축(退縮)됨이 여전하다. 이제 그 대략을 말해 보도록 한다.

(갑)은 <부여(扶餘)>이다. <신朝鮮>이 최초에 세 개의 부여국으로 나누어졌는데, 그 (一)은 <북부여(北扶餘)>로서, 북부여는 아사달(阿斯達)에 도읍하였다. <삼국지(三國誌)>에 “玄兎之北千里(현토지북천리)”(->현토군의 북쪽으로 1천리)라고 하였으므로 지금의 하얼빈임이 분명한데도, 선유(先儒)들은 지금의 개원이라고 하였다.

(二)는 <동부여(東扶餘)>로서, 동부여는 갈사나(葛思那)에 도읍하였다.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동부여를 칠 때에 <북벌(北伐)>한다고 하였으므로, 고구려의 동북, 즉 지금의 혼춘(琿春) 등지가 동부여임에도 불구하고, 선유(先儒)들은 지금의 강릉(江陵)이라고 하였다.

(三)은 <남부여(南扶餘)>로서, 대무신왕이 동부여(東扶餘)를 공격하여 파한 뒤에 동부여가 양분되어, 그 하나는 고(故) 갈사나(葛思那)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으니 곧 <동북부여(東北扶餘)>이고, 또 하나는 남방으로 와서 신(新) 갈사나(葛思那)를 건설하였으니, 곧 <남동부여(南東扶餘)>이다. 전자는 얼마 후에 고구려에 투항하여 국호가 없어졌고, 후자는 문자왕(文咨王) 3년(기원494년)에 비로소 고구려에 병합되었는데, 남동부여(南東扶餘)는 곧 함흥(咸興)이다. 그런데도 선유들은 남동부여의 강역을 몰랐을 뿐 아니라 남동부여(南東扶餘)란 명칭도 몰랐다.

(乙)은 <사군(四郡)>이다. 위만(衛滿)이 동으로 건너온 패수(浿水)는 위략(魏略)>의 만반한(滿潘汗)- <한서(漢書)> 지리지의 요동군의 문(汶). 번한(番汗)- 지금의 해평(海平). 개평(蓋平) 등지이므로, 지금의 헌우락(軒芋樂)이 그곳이다.

한 무제(武帝)가 점령한 조선이 패수(浿水)부근 위만(魏滿)의 옛 땅이므로, 그가 세운 사군(四郡)은 삼조선(三朝鮮)의 국명과 지명을 가져다가 요둥군 내에 가설(假設)한 것이다. 그런데도 선유들은 언제나 사군의 위치를 지금의 평안. 강원. 함경 등 각 도와 고구려의 도성(都城)인 지금의 환인(桓仁)등지에서 찾았다.

(丙)은 낙랑국(樂浪國)이다. 낙랑국(樂浪國)은 한(漢)의 낙랑군(落浪郡)과는 서로 다른 것으로서 지금의 평양(平壤)에 세워진 나라 이름인데도, 선유(先儒)들은 이를 혼동하였다.

이외에도 고구려. 백제의 초대(初代)의 국도(國都)와 신라. 가라(加羅)의 위치는 선유들이 수정한 것이 대략 틀림없으나, 주(州) 군(郡) 혹은 전쟁 지점의 위치는 거의 신라 경덕왕 이후 옮겨서 설치한 지명으로 인하여 그대로 따라서 착오를 일으키게 되었으므로, 가능한 한 이를 교정하여 열국사(列國史)를 서술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