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상고사

제2장 열국의 분립

운우(雲雨) 2014. 7. 14. 22:08

 

1, 동부여(東扶餘)의 분립

 

一, 해부루(解扶婁)의 동천(東遷)과 해모수(解慕漱)의 등장

 

북부여(北扶餘)와 양 동부여(東扶餘: <東北부여>와 <南東부여> - 옮긴이)와 고구려 네 나라는 <신朝鮮>의 판도 내에서 세워진 나라들이다. 그러나 <신朝鮮>이 멸망하여 부여왕조(扶餘王朝)가 되고, 부여가 다시 분열하여 위의 삼국(三國)이 되었는지, 아니면 부여는 곧 <신朝鮮>의 별명이고 따로 부여란 왕조가 없이 <신朝鮮>으로부터 위의 삼국이 되었는지, 이에 대해서는 고찰할 근거가 없다.

그러나 <신朝鮮>이 흉노 모돈(冒頓)에게 패한 때가 기원전 200년경이고, 동. 부 부여의 분립도 또한 기원전 2백년경이니, 후설(後說)이 혹시 사실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

전사(前史)에서는 동.북 부여가 분립한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부여왕 해부루(解夫蔞)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서 이름난 산천(山川)을 찾아다니며 아들 낳기를 기도하였다. 곤연(鯤淵: 경박호(鏡泊湖) - 원주)에 이르렀을 때 왕이 탄 말이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리기에, 이를 괴이하게 여겨서 그 돌을 뒤집어 보니, 누런 황금색 개구리(金蛙)모양의 아이가 있었다. 이를 보고 왕이 말했다. “이는 하늘이 주신 나의 아들이다.”

그리고는 그를 데려와서 기르면서 이름을 금와(金蛙)라 부르고 태자(太子)로 삼았다.

그 뒤 얼마 후에 대신(相)아란불(阿蘭弗)이 왕에게 고하기를, “최근에 천신(天神)이 저에게 내려와서 이르기를, ‘이 땅에는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나라를 세우도록 하고자 하니, 너희들은 피하여 동해가의 가섭원(迦葉原)으로 가거라, 그곳은 토질(土質)이 오곡(五穀)농사에 적합하니라.’고 하였나이다.”고 하면서 천도(遷都)하기를 청하였다.

부여왕이 그 청을 좇아 가섭원으로 천도하여 국호(國號)를 <동부여(東扶餘)>라 하고, 고도(故都)에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遂)가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수행원 1백여 명은 흰 고니(白鳥)를 타고 웅심산(熊心山: 일명 아사산(阿斯山)이고, 또 일명은 녹산(鹿山)이니, 지금의 하얼빈의 완달산(完達山)이다.- 원주)에 내려 왔는데, 이때 머리 위에는 오색구름이 뜨고 구름 속에서는 음악소리가 들려 왔다. 해모수가 10여일 만에 산 밑으로 내려와서 새 깃(鳥羽)을 꽂은 관을 쓰고 용의 광채(龍光)가 나는 칼을 차고 아침에는 정사(政事)를 보고 저녁에는 하늘로 올라가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천제(天帝)의 아들이라 불렀다.

혹자는 이 기록이 너무 신화적(神話的)이어서 신뢰할 수 없다고 하나, 어느 나라든지 고대의 신화시대가 있어서, 후세 사가들이 그 신화 속에서 사실을 채취할 뿐이니, 이를테면 “말이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천신(天)이 아란불(阿蘭弗)에게 내려왔다.” “해모수(解慕遂)가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한 말들은 다 신화이지만, 해부루(解扶婁)가 다른 사람의 사생아(私生兒)인 금와(金蛙)를 주워서 길러 태자를 삼은 것은 사실이고, 해부루가 아란불의 신화에 의탁하여 천도(遷都)를 단행한 것도 사실이며,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이라고 칭하며 고도(故都)를 습격하여 차지한 것도 사실이니, 총괄하면, 동. 북 부여가 분립한 역사상 빼지 못할 큰 사실이다.

다만 우리가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 북부여인이나 동부여인이 부여의 계통을 서술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고 한갓 고구려인이 그 시조 추모왕(鄒牟王)의 출신(所自出)을 설명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므로, 겨우 해부루(解扶蔞). 해모수(해모수), 즉 동. 북부여를 분립한 양 대왕의 약사(약사)를 말할 뿐이고, 그 이전의 부여 해부루의 출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은 것이 그 하나이며,

그리고 이마져도 고구려인이 기록한 본래의 글이 아니고 신라 말엽의 한학자인 불교승(佛敎僧)이 고쳐 쓴 것이므로, <신가>를 고구려 이두문대로 <相加(상가)>라 쓰지 않고 한문의 뜻대로 <相(상)>이라 썼으며, <가시라>를 고구려 이두문대로 <曷思那(갈사나)>라 쓰지 않고 불경의 명사에 맞추어 <迦葉原(가섭원)>이라 써서 본래의 문자가 아니게 만든 것이 그 둘이다.

당시의 제왕(帝王)은 제왕인 동시에 제사장(祭司長)이었으며, 당시의 장상(將相)은 장상인 동시에 무사(巫師)였고 복사(卜師)였다. 그러므로 대개 해부루는 제사장 곧 대단군(大壇君)의 지위를 세습한 자이고, 아란불(阿蘭弗)은 강신술(降神術)을 가진 무사(巫師)와 미래를 예언하는 복사(卜師)의 직책을 겸한 상가(相加)였을 것이다.

대단군(大壇君)과 상가(相加)는 비록 지고(至高)한 지위를 가졌지만, <신朝鮮>의 관습에는 내우외환(內優外患)과 같은 것은 물론이고 천재지변(天災地變)과 같은 것도 대단군에게 그 책임을 물었으며 (<삼국지(三國志>)에서, “홍수나 한발 등 기후가 순조롭지 못하고 흉년이 드는 것도 문득 그 왕에게 책임을 물어 혹은 마땅히 왕을 바꾸어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죽여야 한다고 하기도 하였다.”

천시(天時)나 인사(人事)에 불행한 일이 있으면 대단군을 대단군으로 인정하지 않아서 폐출하여 쫓아내기에 이르는바, 이때는 흉노 모돈(冒頓)과의 전쟁에서 패한 지가 멀지 않은즉, 아마 그 패전의 치욕으로 인하여 인민들의 신앙이 약해지고 박해져서 대단군의 자리를 보전할 수 없게 되자 아란불과 공모하여 갈사나(葛思那). 즉 지금의 혼춘(琿春) 등지로 달아나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것이다.

해모수(解慕遂)는 해부루(解扶蔞)와 동족(同族)으로서 고주몽(高朱夢)의 부친인데, <삼국유사> 왕력편(王曆編)에서 주몽(朱夢)을 단군(壇君)의 아들이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해모수도 대단군(大壇君)의 칭호를 가졌음이 분명하다. 대단군은 곧 하늘(天)의 대표라 하였으므로, 대개 해모수는 해부루가 동쪽으로 옮겨간 것을 기회로 하늘에서 하강한 대단군(大壇君)이라 자칭하면서 왕위를 도모하였던 것이다.

부여는 <불>. 곧 도성(都城) 혹은 도회(都會)를 칭한 것인데, 해부루가 <동부여(東扶餘)라고 칭하자 해모수는 <북부여(北扶餘)>라고 칭했을 것이니, 북부여란 명칭이 사서(史書)에 빠지고 없으므로 최근 선유(先儒)들이 양자를 구별하기 위하여 비로소 해모수가 왕이 된 부여를 <북부여>라고 칭하게 된 것이다.

 

二, 남북갈사(南北葛思). 남북 옥저(南北沃沮) 양 동부여의 분립

 

해부루가 갈사나(葛思那: 지금의 혼춘(琿春)- 원주)로 천도하여 동부여가 되었음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그렇다면 갈사나(葛思那)란 무엇인가?

우리 고어(古語)에 삼림(森林)을 <갓> 혹은 <가시>라 하였으니, 고대에는 지금의 함경도와 길림(吉林) 동북부와 연해주(沿海州) 남단에 수목(樹木)이 울창하게 우거져서 수천 리 끝없는 숲의 바다를 이루었기 때문에 <가시라>라 칭하였으니, <가시라>는 삼림국(森林國)이란 뜻이다.

<가시라>를 이두자로 갈사국(葛思國). 가슬라(加瑟羅). 가서라(迦西羅). 하서량(河西良) 등으로 썼는데, 이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지리지에 보인 것이며, 또 혹은 <가섭원기(迦葉原記)>라 하였는데, 이는 대각국사(大覺國師)가 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인 것이다.

중국사에서는 <가시라>를 옥저(沃沮)라고 썼는데, <만주원류고(滿州原流考)>에 의하면, 옥저(沃沮)는 <와지>의 음역(음譯)이고, <와지>는 만주어로 삼림(森林)이란 뜻이다.

예(濊). 곧 읍루(揖屢)는 만주족의 선조(先祖)인데, 읍루는 당시 조선 열국 중에서 “言語獨異(언어독이)”(->언어가 홀로 같지 않다.)라고 <삼국지>나 <북사(北史)>에 특기해 놓았다. 예족(濊族)은 우리의 <가시라>를 <와지>라고 불렀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예족의 말을 번역하여 <옥저(沃沮)>라고 했던 것이다.

두만강 이북을 <北葛思(북갈사)>라 부르고 이남을 <南葛思(남갈사)>라고 불렀는데, <北葛思(북갈사)>는 곧 <北沃沮(북옥저)>이고 <南葛思(남갈사)>는 곧 <南沃沮(남옥저)>이며, 지금의 함경도는 남옥저에 상당한다.

고사(古史)에서 남. 북 옥저를 다 토지가 비옥한 곳이라고 하였으나 지금의 함경도는 땅이 척박하니, 혹시 옛날과 지금 사이에 토지의 성질이 변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양 <가시라>의 인민들은 순박하고 근검하여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였고, 여자들이 더 아름다웠으므로, 부여나 고구려의 호민(豪民)들은 이들을 착취하여 어염(魚鹽)과 농산물을 천 리 멀리까지 져다가 바치게 하고 미녀(美女)들을 뽑아다가 비첩(婢妾)으로 삼았다고 한다.

해부루(解扶蔞)가 북 <가시라>(지금의 훈춘(壎春)-원주)로 옮겨와서 동부여(東扶餘)가 되었는데, 아들 금와(金蛙), 손자 대소(帶素)로 이어졌다. 대소가 고구려 대주류왕(大朱留王)과 싸우다가 패하여 죽자, 그의 동생 모갑(某甲)과 사촌 동생 모을(某乙)이 서로 나라를 차지하려고 다투어, 결국 모을(某乙)은 구도(舊都)에 터전을 잡고 북갈사(北葛思) 혹 북동부여(北東扶餘)라 칭하고, 모갑(某甲)은 남갈사(南葛思) 혹은 남동부여(南東扶餘)라 친하며 분립하였다. 그 상세한 것은 제 3장에서 서술한 것이지만, 지금까지의 학자들은, (一) 동부여(東扶餘)가 분열하여 북동. 남동의 양 부여로 된 것을 모르고 한 개의 동부여(東扶餘)만 기록하였으며, (二) 옥저(沃沮)가 곧 갈사(葛思)임을 모르고 옥저 이외에서 갈사(葛思)를 찾았으며, (三) 북동. 남동의 양 부여가 곧 남북의 양 갈사(葛思: 양 가슬나(加瑟那-원주)이고, 남북의 양 갈사(葛思)가 곧 남북의 양 옥저(沃沮)임을 모르고, 부여. 갈사. 옥저 세 개 서로 다른 지방으로 나누었으며, (四) 강릉(江陵)을 <가시라>곧 가슬나(加瑟那)라 한 것은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북방의 토지를 잃은 뒤에 옮겨서 설치한 고적(古蹟)인 줄 모르고, 드디어 가슬라(加瑟那)- 곧 동부여의 고도(古都)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지리(地理)가 뒤헝클어지고 사실(事實)이 혼란해져서 <갈이>(목공소에서 나무를 갈아서 다양한 형태의 나무그룻을 만드는 기구, 갈이틀, 표준.-옮긴이)로 삼을 수 없게 되었으나, 이제 갈사(葛思). 가슬(加瑟). 가섭(迦葉)의 이두문 읽는 법을 알아서 이들이 동일한 <가시라>임을 알게 되었으며, 대소(帶素)의 동생 모갑(某甲)과 그의 사촌동생 모을(某乙)분거(分居)한 양 <가시라>의 위치를 찾아서, 양 <가시라>가 곧 남. 북 옥저(沃沮)임을 알게 되었으며, 추모왕(鄒牟王)이 동부여에서 고구려로 올 때에 “南奔(남분)”->남쪽으로 달아났다.)이라는 말을 쓴 것과, 주류왕(朱留王)이 고구려에서 동부여를 칠 때에 “北伐(북벌)”(북쪽으로 쳐들어갔다.)이라는 말을 쓴 것에 근거하여, 북 <가시라>의 위치를 알게 되어서 위와 같이 정리한 것이다.

 

三, 북부여의 문화

 

북부여(北扶餘)의 역사는, 오직 해모수(解慕漱)가 도읍을 세운 사실 이외에는, 겨우 북부여의 별명인 <황룡국(黃龍國)>이 고구려 유류왕(儒留王) 본기(本記)에 한 번 보이고 나서는, 다시 북부여에 대하여 으리 조선인의 붓으로 전한 말이 없다. 전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모두 중국사에서 초록한 것들이다.

북부여의 서울은 <으스라>, 곧 부소량(扶疎樑)이니, 대단군 왕검의 삼경(三京), 즉 세 왕검성(三王儉城) 중의 하나이다. 지금의 러시아령 우수리(鳥蘇里)는 곧 <으스라>의 명칭이 전해진 것인데, 그 본지(本地)는 지금의 하얼빈이다.

이곳은 수천 리의 망망한 평원으로서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이 잘 되었고, 종횡으로 굽이굽이 흐르는 송화강(松花江: 옛 이름은 <아리라>-원주)이 있어서 교통의 편리함을 제공해 주었다. 인민들은 부지런하고 검소하고 강건하고 용맹하며, 큰 구슬과 적옥을 채굴하고, 채색비단과 수놓은 비단을 직조하고, 여우. 너구리. 검은 원숭이. 수달의 모피를 외국에 수출하였다. 성곽과 궁실(宮室)을 건축하고 창고를 만들어 물건들을 가득가득 저장함으로써 고도(故都)의 문명을 자랑하였다. 또한 왕검의 태자 부루(夫蔞)가 하우(夏禹)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하는 금간옥첩(金簡玉牒)의 문자도 왕궁에 저장되어 있었으며, <신지(神誌)>라 불리는 이두문의 역사류(史類)나 <풍월(風月)이라 하는 이두문의 시가집(詩歌集)도 대개 이 나라에서 수집된 것이다.

해모수(解慕漱) 이후에 예(濊)와 선비(鮮卑)를 정복하여 일시 강국이 되었으나, 그 뒤에 예와 선비가 배반하여 고구려로 돌아감으로써 나라의 세력이 드디어 쇠약해져서 조선 열국의 패권을 잃어버리기에 이르렀다.

 

2, 고구려의 발흥(발흥)

 

一, 추모왕(추모왕)의 고구려 건국

 

고구려 시조 추모(鄒牟: 또는 주몽(朱蒙)이라 하기도 한다.-원주)는 태어나면서 타고난 용기와 힘, 활솜씨를 가지고 과부(寡婦) 소서노(召西努)의 재산에 의거하여 웅걸(雄傑)들을 불러들이고, 교묘히 왕검 이래의 신화(神話)를 이용하여 천란(天卵)에서 태어났다고 자칭하여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뿐만 아니라 안으로는 열국의 신앙(信仰)을 받아서 정신적으로 조선을 통일하고, 밖으로는 그 기행(奇行)과 이적(異跡)의 이야기를 중국 각지에 전파하여 그곳 제왕(帝王)과 인민들이 그를 교주(敎主)로 숭배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신라 문무왕(文武王)은 “入功南海, 積德北山(입공남해, 적덕북산)”(->남해지방에서 공을 세우고, 북쪽 산악 지방에서 덕을 쌓았다)라는 찬사를 올렸으며, 중국의 2천년 이래의 유일한 공자 반대자였던 동한(東漢)의 학자 왕충(王充)은 그의 사적(事跡)을 자기 책에 기재하기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로써 보면, 기원전 58년이 그가 출생한 해이고, 기원전 37년이 그가 즉위한 해이지만, 이것은 삭감된 연대이기 때문에 근거로 삼기에 부족하다. 추모(鄒牟)는 해모수(解慕漱)의 아들이므로, 기원전 200년경 동북부여가 분립하던 때가 그가 출생한 때일 것이며, 그때는 위만(衛滿)과 동시대일 것이다.

<처음에<아리라>(송화강-원주) 부근의 어느 장자(長者)가 유화(柳花). 훤화(萱花). 위화(葦花) 세 딸을 두었는데, 셋 다 절세의 미인들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유화가 더욱 아름다웠다.

북부여왕 해모수가 놀러나갔다가 유화를 보고는 그만 사랑에 빠져 야합(野合)하여 아이를 배었다. 아이를 배었지만, 이때 왕실은 호족(豪族)과만 결혼하고 서민과는 결혼할 수 없었으므로, 해모수는 그 뒤에 유화를 돌아보지 않았다.

당시 서민은 서민과만 결혼하였는데 남자가 반드시 여자의 부모에게 찾아가서 폐백(幣帛)을 바치고 사위가 되게 해달라고 두 번 세 번 애걸하여 그 부모의 승낙을 얻어야만 결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혼한 뒤에도 남자는 여자의 부모를 위하여 그 집에 들어가 머슴이 되어서 3년간 고역(苦役)을 다 하고 나서야 딴 살림을 차려 자유의 가정이 되었다.

사정이 이러하였으므로, 유화의 범행(犯行)이 발각되자 그 부모는 노하여 유화를 잡아 우발수(優渤水)에 던져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어부가 그를 건져서 동부여(東扶餘)왕 해금와(解金蛙)에게 바쳤다. 금와왕(金蛙王)이 유화의 자색(姿色)을 사랑하여 후궁에 들여 첩을 삼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낳으니 곧 해모수와 야합한 결과였다.

금와왕이 유화에게 따지고 물으니, 유화가 대답하기를 “햇빛에 감응하여 낳은 천신(天神)의 아들이고, 나는 아무런 죄도 범한 적이 없다.”고 하였다.

금와왕이 믿지 않고 그 아이를 돼지에게 먹이려고 돼지우리에 집어넣었으나 돼지가 피하여 먹지 않았고, 말에 밟혀 죽게 하려고 길에 던져 놓았으나 말들이 피하여 밟지 않았으며, 산짐승의 밥이 되라고 깊은 산에 갖다 버렸으나 다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유화에게 그를 거두어 기르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 아이가 성장함에 그 용기와 힘이 같은 또래에서 뛰어났고, 활솜씨가 기묘하기 짝이 없으므로 그 이름을 <추모(鄒牟)>라고 불렀다.

<위서(魏書)>에서는 <추모(鄒牟)>를 <주몽(朱蒙)>이라 쓰고, 주몽(朱蒙)은 부여 말로 <활을 잘 쏘는 자>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만주원류고(滿州原流考)>에는 지금의 만주어에 활을 잘 쏘는 자를 <卓琳芳阿(탁림방아: 이를 만주어로는 <주릴무어>이라 읽는다.-원주)라고 하는데, 주몽은 곧 <주릴무얼(탁림방아)>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광개토왕(廣開土王)의 비문(碑文)에서는 주몽을 <추모(鄒牟)>라 하였고, 문무왕(文武王)의 조서(詔書)에서는 <중모(中牟)>하고 <주몽(朱蒙)>이라고 하지 않았다.

<주몽(朱蒙)>이라고 한 것은 중국사에서 전하는 것을 신라의 문사(文士)들이 그대로 따라 쓰다가 고구려본기에 올렸기 때문이다. 이두문자인 <추모(鄒牟)>. <중모(中牟)>는 <줌> 혹은 <주무>로 읽어야 할 것인바, 이는 조선어이다. 한편 <주몽>은 <주물>로 읽어야 할 것인바, 이는 예어(濊語), 곧 만주족 선대(先代)의 말이다. 중국사에서 <주몽(朱蒙)>이라고 한 것은 예어(濊語)의 음(音)을 한자로 적은 것으로 <만주원류고>에서 말하고 있는 바가 그럴듯하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광개토대왕의 비문(碑文)을 따라서 <추모(鄒牟)>라 쓰기로 한다.

금와왕은 일곱 형제의 자식들을 두었는데, 장자(長子)는 대소라 하였다. 대소가 추모(鄒牟)의 재주와 용기를 시기하여 왕에게 권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매번 유화(柳花)의 주선으로 화(禍)를 면하였다.

추모가 19세가 되어 왕실 목장의 말들을 맡아 기르게 되었는데, 모두 다 살찌고 튼튼하게 기르면서 유독 한 마리 준마(駿馬)만을 골라 바늘을 혀 밑에 찔러 놓아 말이 먹지 못하게 하니, 그 말은 날로 비쩍 말라 갔다.

하루는 왕이 왕실 목장의 말들을 둘러보고 추모의 공을 칭찬하고는 그 비쩍 마른 말을 그에게 상으로 주었다. 추모가 말의 혀에서 바늘을 빼내고 다시 먹이를 주어 길러서 신수두의 10월 대제(大際)에 타고 나아가 사냥에 참여하였다.

왕이 추모에게는 겨우 화살 한 개만을 주었으나, 말은 잘 달렸고 추모는 활을 잘 쏘았으므로, 추모가 쏘아서 잡은 것이 대소의 일곱 형제들이 잡은 것을 전부 합한 것보다 몇 배나 되었다. 대소가 이에 그를 더욱 시기하여 살해하려는 음모가 더욱 심해졌다.

추모가 이를 알아차리고는 예씨(禮氏)를 아내로 맞이하여 밖으로는 아내에게 빠져서 다른 마음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속으로는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俠父) 등 세 사람과 공모하여, 비밀히 어머니 유화(柳花)에게 고별하고 처를 버리고 도망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니, 이때 추모의 나이 22세였다.

졸본부여에 이르니, 그곳의 부호 연타발(延陀勃)의 여식(女息)이자 미인인 소서노(召西努)가 부친의 재산을 상속하고, 해부루(解夫蔞)의 서손(庶孫)인 우태(優台)의 처가 되어 비류(沸流). 온조(溫祚) 두 아들을 낳았으나, 우태가 죽어서 과부로 지내고 있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소서노가 추모(鄒牟)를 보고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니, 추모가 이에 그 재산에 의지하여 명장 부분노(扶芬奴) 등을 불러들이고 민심을 거두어 모아 왕업의 기틀을 닦았다. 홀승골(惚升骨) 산 위에 도읍을 세워 국호(國號)를 <가우리>라 하고, 이두자로는 <고구려(高句麗)>라고 썼다. <가우리>는 <중경(中京)> 혹은 <중국(中國: 중심인 나라)>이란 뜻이다.

졸본부여(卒本扶餘)의 왕 송양(松讓)과 활쏘기 솜씨를 비교하여 그를 꺾어 누루고, 이어서 부분노(扶芬奴)를 보내어 그 무기고(武庫)를 습격, 탈취하고 마침내 그 나라를 항복시키고, 부근의 예족(濊族)들을 몰아내어 거주민들의 해(害)를 제거하고, 오이(烏離) 부분노 등을 보내어 태백산 동남의 행인국(荇人國: 그 지점은 불명-원주)을 멸하여 성읍(城邑)으로 삼고, 부위염(扶慰厭)을 보내어 동부여(東扶餘)를 쳐서 북 <가시라)의 일부분을 탈취하니 (광개토왕 비문의 “東扶餘 舊是鄒牟王屬民”(동부여는 옛날 추모왕의 속국이었다.)은 이를 가리킨 것인 듯함.-원주), 이에 고구려의 기초가 세워졌다.

이전 사서(史書)에서는 흔히 <송양(松讓)>을 국호(國號)라 하였으나, <이상국집(李相國集)> 동명편(東明編)에 인용한 <구삼국사(舊三國史)를 가지고 고찰하면, 거기에서는 비류왕(沸流王) 송양(松讓)이라고 하였다. 비류(沸流)는 곧 부여(扶餘)로서 졸본부여(卒本扶餘)를 말하는 것이므로, 송양(松讓)은 국명이 아니라 졸본부여의 왕의 이름이다.

그리고 또, 추모가 졸본부여의 왕녀를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그 왕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이 돌아간 후에 추모가 그 왕위를 이어받았다고 하였으나, 졸본부여의 왕녀, 곧 송양(松讓)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것은 추모의 아들 유류(儒留)였고, 추모가 아내로 맞이한 여자는 소서노(召西努)였지 졸본부여의 왕녀가 아니었다.

추모왕(鄒牟王)을 고구려본기에서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하였으나, <동명(東明)>은 <한몽>으로 읽어야 할 것이니, <한몽>은 <신수두>대제(大祭)에서 높이 받들어 제사지내므로 <한몽> 곧 <동명(東明)>의 호(號)를 올렸던 것이고, <성왕(聖王)>의 성(聖)은 <주무>의 의역(義譯)이다.

 

二, 동부여와 고구려의 알력(軋轢)

 

추모왕이 죽은 후에 그 아들 유류왕(儒留王)이 그 왕위를 잇고, 유류왕이 죽은 뒤에 그 아들 대주류왕(大朱留王)이 왕위를 이으니, 유류(儒留)는 고구려본기의 유리명왕(琉璃明王) 유리(類利)이다. <유류(儒留)>. <유리(琉璃)>. <유리(類利)>는 다 <누리>로 읽어야 할 것이니, <세상(世)>이란 뜻이고 <밝음(明)이란 뜻이다.

대주류왕(大朱留王)은 고구려본기에서 대무신왕(大武神王) 무휼(無恤)이라고 한 사람이니, <무(武)>. <주류(朱留)>. <무휼(無恤)>은 다 <무뢰>로 읽어야 하고 <우박>이란 뜻이고 <신(神)>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제 <유리(琉璃)>와 <明(명)>은 시호(諡號)로 쓰고 <무휼(無恤)>은 왕의 이름으로 쓰는 것은 <삼국사기> 저자의 망단(妄斷)이다.

따라서 본서에서는 광개토왕의 비문(碑文)을 따라서 <유리(琉璃)>. <대무신(大武神)>을 <유류(儒留)>. <대주류(大朱留)>로 쓴다.

유류왕(儒留王) 때에 동부여가 강성하여 금와왕(金蛙王)의 아들 대소가 왕위를 이어받은 후 고구려에 대하여 신하로서의 예를 갖추라고 요구하고 아들을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하자, 왕이 이를 따르려고 하다가 그만 두 태자를 희생하는 일이 일어났다.

첫째 태자는 <도절(都切)>이었다. 주류왕이 그를 동부여에 인질로 보내려고 하였으나 도절이 가지 않으므로, 왕이 격노하자 도절은 걱정과 울분으로 그만 병이 들어 죽었다.

둘째 태자는 <해명(解明)>이었다. 해명은 용력(勇力)이 초인(超人)이었는데, 그는 부왕(父王)이 동부여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국내성(國內城: 지금의 집안현-원주)으로 천도하는 것을 보고는 이를 비겁하고 유약한 일이라 하여 따라가지 않았다. 북부여왕(北扶餘王: 본기에서 <황룡국왕(黃龍國王)이라고 한 자이다- 원주)이 해명에게 강궁(强弓)을 주어 그 힘을 시험해 보려고 하자, 해명이 그 자리에서 그 강궁을 부러뜨려서 북부여 사람들의 힘없음을 조소하였다.

왕은 그 이야기를 듣고 해명이 장차 나라를 위태롭게 할 어리석은 인물이라 하여, 처음에는 북부여에 보내서 북부여왕의 손을 빌어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북부여왕이 해명을 경애하여 후대하여 돌려보냈다.

이에 유류왕은 더욱 창피하고 분해서 해명에게 검을 주어 자살하라고 하였다.

두 태자의 죽음이 혹 궁중의 처첩들 간의 질투 때문인 점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대개 동부여와의 외교상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으니, 이로부터 유류왕이 동부여를 얼마나 겁내고 있었는지를 미루어 알 수 있다.

동부여왕 대소가 여러 차례 수만 명의 대병(大兵)을 일으켜 고구려를 치다가 다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고구려 역시 매우 지치고 피폐해진지라, 동부여왕 대소가 또 사자를 보내어 조공을 바치지 않음을 질책하자, 유류왕이 두려워서 애걸하는 말로 사자에게 답을 하려고 하였다.

이때 왕자 주류(朱留: 본기의 무휼(無恤)-원주)는 아직 어린나이였으나 죽은 형 해명(解明)의 기개가 있어서, 부왕이 동부여 사자에게 비굴하게 애걸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스스로 부왕의 명령인 것처럼 꾸며서 동부여의 사자를 보고, 금와(金蛙)가 추모왕(鄒牟王)을 천한 목장지기의 직책으로 대우하였고, 대소가 추모왕을 해치려고 했던 일들을 일일이 세어가면서 그 죄를 묻고, 동부여의 왕과 신하들의 교만하고 거만함을 책망하고는 그 사자를 쫓아 보내고 말았다. 동부여의 대소왕이 이를 보고받고는 격노하여 또 대거 쳐들어왔다.

유류왕(儒留王)은 왕자 주류(朱留) 때문에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고 하여 크게 화를 냈으나, 자기도 이미 늙은 데다 또다시 주류를 도절(都切)이나 해명(解明)처럼 죽일 수는 없으므로, 국내의 병마(兵馬)들을 모두 주류에게 주어 나가 싸우도록 하였다.

주류가 말하기를, “동부여는 군사의 수가 많고 고구려는 적으며, 동부여는 기마병이고 고구려는 보병이니, 소수의 보병이 다수의 기마병과 더불어 평원에서 싸우는 것은 불리하다.”고 하고는, 이에 동부여의 군사들이 경유할 학반령(鶴盤嶺)의 계곡에 복병을 시켜 두었다가 동부여 군대가 지나갈 때에 돌격하도록 하였다. 계곡 속의 길이 험하여 말을 탄 군사들이 지나가기에 불편하므로 동부여 군사들이 모두 말을 버리고 산 위로 올라가자, 이때 주류가 군사를 풀어 그 전군을 섬멸하고 수많은 말들을 빼앗으니, 동부여의 정예부대가 이 전투에서 크게 당하여 다시 고구려와 겨루지 못하였다.

이 전투를 끝내고 나니 유류왕은 크게 기뻐하며 주류를 태자에 책봉하고 겸하여 군사(兵馬) 대권을 맡겼다.

 

三, 대주류왕(大朱留王)의 동부여 정복

 

대주류왕(大朱留王: <삼국사기>의 대무신왕(大武神王)-원주)이 학반령(鶴盤嶺)의 전투에서 동부여를 대파하고 유류왕(儒留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지 4년에 5만 명의 북벌(北伐) 군사를 일으켜 동부여로 쳐들어간다.

가는 도중에 창술(槍術)에 뛰어난 마로(麻盧)와 검술에 뛰어난 괴유(怪由)를 얻어 길잡이를 삼아 <가시라>의 남(南)에 이르러 진펄을 앞에 두고 진을 쳤다. 대소왕이 몸소 말을 타고 고구려 진으로 곧바로 쳐들어오다가 말의 발이 진흙에 빠지자 괴유가 그의 목을 쳐서 베었다.

대소왕은 죽었으나 동부여 군사들은 더욱 분발하여 앞 다투어 모여들어 대소왕의 원수를 갚으려고 대주류왕을 겁겹이 포위하였다. 이때 마로(麻盧)는 전사하고 괴유(怪由)는 부상을 당하였으며, 고구려 군에서는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대주류왕은 여러 차례 치고 빠져나가려 하였으나 어찌하지 못하여 7일 동안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마침 그때 짙은 안개가 일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대주류왕이 풀로 사람 모양을 만들어 진중에 세워놓고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사잇길로 도망하여 이물림(利勿林)에 이르렀다. 모든 군사들이 다 굶주린 데다 지칠 대로 지쳐서 움직이지도 못하였으므로, 들짐승을 잡아먹고 간신히 귀국할 수 있었다.

이 전쟁에서 사실은 동부여가 승리하였으나, 다만 대소왕이 죽고 태자가 없었으므로, 대소왕의 여러 종형제(從兄第)들이 왕위를 다투어 국내가 크게 어지러워졌다. 막내 동생 모갑(某甲)은 자기를 따르는 1백여 명을 데리고 남 <가시라>, 곧 남옥저(南沃沮)로 나와서 사냥 나온 해두왕(海頭王)을 습격하여 죽이고 그 병사들을 불러 모아 남 <가시라> 전부를 평정하였는데, 이것이 남동부여(南東扶餘)이다.

그리고 종제(從第)모을(某乙)은 고향에서 자립하였는데, 이가 <북동부여(北東扶餘)>이다. 그러나 오히려 여러 동생들이 각자 군사를 끼고 모을(某乙)을 치게 되자, 모을(某乙)은 병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투항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대주류왕이 북동부여 전체를 토평하였으나 그 국호는 오히려 존속시켰다.

역사에 보이는 <갈사국(葛思國)>은 곧 남동부여이고, <동부여(東扶餘)>는 북동부여이며, <후한서>. <삼국지> 등의 옥저전(沃沮傳)에 보인 <不耐濊(불내예)>는 북동부여이고, 예전(濊傳)에 보이는 <不耐濊(불내예)>는 남동부여이다.

사, 대주류왕(大朱留王)의 낙랑 정복

최씨(崔氏)가 남낙랑(南樂浪)을 근거로 낙랑왕(樂浪王)이라 칭하였다는 것은 이미 제3편 제4장에서 설명하였거니와, 그 마지막 왕 최리(崔理)에 이르면, 이때는 곧 대주류왕(大朱留王)이 동부여를 정복하던 때와 같은 시기이다.

최리(崔理)가 고구려의 위협을 두려워하여 미인인 딸 하나를 두고 늘 이를 진기한 보화(奇貨)로 사용하여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자 하였다. 이전에 갈사국(葛思國:남동부여-원주) 왕이 그 손녀 미인을 대주류왕의 후궁으로 바쳐서 아들을 낳았는데 얼굴이 기묘하고 풍신(風神)이 수려하여 이름을 호동(好童)이라고 하였다.

호동이 외가에 가는 길에 낙랑국을 지날 때 최리(崔理)가 나들이 하다가 호동을 만나보고는 놀라서 말하기를, “자네 얼굴을 보니 북국 신왕(神王)의 아들 호동이 아니야?” 하고, 드디어 호동을 데려다가 자기 딸과 결혼을 시켰다.

그때 낙랑국의 무기고에는 북과 나팔이 있어서 그 소리가 멀리까지 들리므로, 외적이 쳐들어오면 매번 이것을 치거나 불어서 여러 속국의 군사들을 불렀는데, 호동이 그 아내 최씨를 꾀여 “고구려가 낙랑을 침입하는 때에 네가 그 북과 나팔들을 없애버려라.”하고는 귀국하여 대주류왕을 설득하여 낙랑을 치도록 하였다.

고구려 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최리(崔理)가 북과 나팔을 울리려고 무기고에 들어가 보니, 북과 나팔이 조각조각 부서져서 쓸 수 없게 되었다. 북과 나팔이 소리를 내지 않으니 무슨 수로 여러 속국에게 구원병을 요청할 수 있겠는가. 최리가 자기 딸의 소행임을 알고 그를 죽인 뒤에 항복하였다.

호동은 이렇게 하여 큰 공을 이루었으나, 왕후는 자기 아들들의 적자(嫡子) 지위를 빼앗기게 될까봐 두려워서, 이에 주류왕에게 “호동이 나를 강간하려고 하였다.”고 거짓 고소(誥訴)하여, 마침내 호동이 자살을 하기에 이르니, 한 쌍 미남미녀의 말로가 똑같은 비극이 되고 말았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의하면, 대주류왕 즉위 4년 여름 4월에 대소(帶素)의 동생이 갈사왕(葛思王: 남동 부여왕-원주)이 된 사실을 기록해 놓고, 즉위 15년 여름 4월에 호동(好童)이 최리(崔理)의 사위가 된 사실을 기록해 놓고, 같은 해 11월에 호동이 왕후의 참언(讒言)으로 자살한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갈사왕이 있은 뒤에야 대주류왕이 갈사왕의 손녀를 후궁으로 맞아들일 수 있으며, 또 그런 뒤에야 갈사왕 손녀의 소생인 호동이 있을 수 있은즉, 설사 대주류왕 4년, 곧 갈사왕 건국 원년 4월에 대주류왕이 갈사왕 손녀를 후궁으로 맞아 그달부터 태기가 있어 그 다음해 정월에 호동을 낳았다고 하더라도, 15년에 이르러서는 겨우 11살 어린아이에 불과하니, 11살 어린아이가 어찌 남의 서방이 되어 그 아내와 함께 나라를 멸망시킬 계획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11살 어린아이가 어찌 큰 어머니인 왕후를 강간하려 했다는 거짓 고소(誥訴)로 부왕의 협의를 받아 자살하기에 이르렀겠는가.

동부여는 원래 북갈사(北葛思)에 도읍하였으나, 소위 갈사왕(葛思王)은 분립하기 전의 동부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이도 있겠지만, 그러면 이는 대소왕(帶素王)의 때가 되는데, 대소왕이 그의 딸을 대주류왕에게 준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대개 신라 말에 고구려사의 연대를 삭감하고 사실들을 이곳저곳으로 옮겼기 때문에 이같이 모순 덩어리 기록이 있게 된 것이며, 대주류왕 20년에 또“ 伐樂浪, 滅之)(벌낙랑, 멸지)”(->낙랑을 쳐서 멸망시켰다.)라고 하였으니, 하나의 낙랑을 다시 멸할 수는 없는 것인즉, 호동이 결혼하고 자살한 것은 다 대주류왕 20년의 일이 아닐까 한다.

이상에서 서술한 북부여. 북동부여. 고구려 삼국은 모두 다 <신朝鮮> 옛 땅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3, 백제의 건국과 마한(馬韓)의 멸망

 

一, 백제 소서노(召西努) 여대왕(女大王)의 백제 건국

백제본기(百濟本記)는 고구려본기보다 더 심하게 조작되었다. 백 몇 십 년의 삭감은 물론이고, 그 시조(始祖)와 시조의 출처(出處)까지 틀리게 만들었다.

그 시조는 소서노(召西努) 여대왕으로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 지금의 한양(漢陽)-원주)에 도읍하였다. 그가 죽은 후에 비류(沸流). 온조(溫祚) 두 아들이 분립하여, 그 하나는 미추홀(彌鄒忽: 지금의 인천-원주) 또 하나는 하남 위례홀(河南慰禮忽)에 도읍하였으나, 그 후 비류는 망하고 온조가 왕이 되었다.

그런데도 본기에서는 소서노를 쏙 빼고 그 편(篇) 머리에다 비류. 온조의 미추홀(彌鄒忽)과 하남위례홀(河南慰禮忽)이 갈라선 것을 기록해 놓고, 온조 13년에 하남위례홀에 도읍하였다고 기록해 놓았으니, 그러면 온조가 하남위례홀에서 하남위례홀로 천도(遷都)하였다는 것이 되는데, 이 어찌 웃을 일이 아니냐. 이것이 첫 번째 잘못이다.

비류(沸流). 온조(溫祚)의 아버지는 소서노의 전 남편, 곧 부여인 우태(優台)이므로 비류. 온조의 성(姓)도 부여(扶餘)이며, 근개루왕(近蓋蔞王)도 “백제가 부여에서 나왔음”을 스스로 증명하였다. 그런데도 본기에서는 비류. 온조를 추모(鄒牟)의 아들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그 둘째 잘못이다. 이제 이것을 고쳐서 백제의 건국사(建國史)를 설명하도록 한다.

소서노(召西努)가 우태(優台)의 처로서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두 아들을 낳고 과부가 되었다가 추모왕(鄒牟王)에게 개가(改嫁)하여 재산을 기울여 추모왕을 도와 고구려를 창건하였음은 이미 본장 3절에서 서술하였다.

추모왕이 그 때문에 소서노를 정궁(正宮)으로 대접하고 비루. 온조 두 아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하였는데, 유류(儒留: 후의 유리왕-옮긴이)가 그 모친 예씨(禮氏)와 함께 동부여에서 돌아오자, 예씨가 원후(元后)가 되고 소서노는 소후(小后)가 되었으며, 유류(儒留)가 태자가 되고 비류. 온조 두 사람의 신분은 덤받이 자식임이 드러났다.

그래서 비류. 온조가 상의하여 말하기를, “고구려 건국의 공이 거의 우리 모친에게 있거늘, 이제 어머니는 왕후의 자리를 빼앗기고 우리 형제는 기댈 데 없는 자들이 되었으니, 대왕이 계실 때에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대왕께서 돌아가신 후에 유류(儒留)가 왕위를 이으면 우리는 어디에 서겠느냐. 차라리 대왕께서 살아계신 때에 미리 어머니를 모시고 딴 곳으로 가서 딴 살림을 차리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고는 이 뜻을 소서노에게 고하여, 추모왕에게 청하여 다수의 금은보화(金銀寶貨)를 나누어 가지고 비류. 온조 두 아들과 오간(烏干). 마려(馬黎) 등 18명을 데리고 낙랑국(樂浪國)을 지나 마한(馬韓)으로 들어갔다.

마한에 들어가니,이때의 마한왕(馬韓王)은 기준(箕準)의 자손이었다. 소서노가 마한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서북으로 백리 떨어진 땅 미추홀(彌鄒忽)과 하북위례홀(河北慰禮忽) 등지를 얻어 소서노가 왕(王)이라 칭하고 국호를 백제(百濟)라 하였다. 서북의 낙랑국 최씨(崔氏)가 바야흐로 압록강의 예족(濊族)과 합하여 침입하고 핍박함이 심하였는데, 소서노가 처음에는 낙랑국과는 친하게 지내고 예족만 쫓아내다가, 나중에 예족의 침입과 핍박함이 낙랑국의 지시와 사주에 의한 것임을 깨닫고는 낙랑국과 절교하고 성책을 샇아 방어에 전력하였다.

백제본기(百濟本記)에서는 <낙랑왕(樂浪王)>이라, <낙랑태수(樂浪太守)>라 썼는데, 이는 몇 백 몇 십 년의 연대를 빼버린 뒤에 그 빼버린 연대를 가지고 중국의 연대와 대조한 결과 낙랑(樂浪)을 한군(漢郡)으로 간주하여 <낙랑태수(樂浪太守)라고 쓴 것이다.

그리고 예(濊)라고 쓰지 않고 <말갈(靺鞨)>이라고 썼으니, 이는 신라 말엽에 <예(濊)>를 <말갈(靺鞨)>이라고 한 당(唐)나라 사람들의 문자를 많이 보고 드디어 고기(古記)의 예(濊)를 모두 <말갈(靺鞨)이라고 고친 것이다.

 

二, 소서노가 죽은 후 두 아들의 분국(分國)과 그 흥망

 

소서노(召西努)가 재위 13년 만에 죽으니, 소서노는 말하자면 조선 역사상 유일한 여제왕(女帝王) 창업자(創業者)일 뿐만 아니라 또한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설한 자이다.

소서노가 죽은 뒤에 비류(沸流). 온조(溫祚) 두 사람이 상의하여 이르기를 “서북의 낙랑과 예(濊)가 날로 쳐들어와 괴롭히니, 모친 같은 성덕(聖德)이 없고서는 이 땅을 지킬 수 없으니 차라리 새 터를 찾아 옮겨 가는 게 옳다.” 하고, 이에 형제가 오간(烏干). 마려(馬黎) 등과 함께 부아악(負兒岳: 지금의 한양 북악(北岳)-원주)에 올라 도읍할 만한 자리를 살폈는데, 비류(沸流)는 미추홀(彌鄒忽)을 잡고, 온조(溫祚)는 하남위례홀(河南慰禮忽)을 잡아, 형제의 의견이 충돌되었다.

오간(烏干). 마려(馬黎) 등이 모두 비류에게 간하여 이르기를 “하남위례홀은, 북으로는 한강을 등지고 남으로는 옥택(沃澤: 비옥한 못)을 안고, 동으로는 높은 산(山岳)을 끼고 서로는 큰 바다(大海)에 둘러싸여 천험(天險)과 지리(地理)가 이만한 곳이 없거늘, 어찌 이곳을 버리고 다른 데로 가려 합니까.” 하였으나, 비류가 듣지 않으므로, 어쩔 수 없이 형제가 토지와 인민을 두 쪽으로 갈라서 하나는 비류가 차지하여 미추홀로 가고, 다른 하나는 온조가 차지하여 하남위례홀로 가니, 이에 백제가 동. 서 양 백제로 나뉘었다.

백제본기에 기록된 온조 13년까지는 사실 소서노의 연조(年祚)이고, 그 다음해 14년이 곧 온조 원년이니, 13년에 기록되어 있는 바 온조가 천도(遷都)하면서 내린 조서(詔書)는 비류와 충돌한 뒤에 온조가 차지한 부분의 인민(人民)들에게 내린 조서이며, 14년, 곧 온조 원년에 “分漢城民(분한성민)”(->한성의 인민들을 나누었다.)은 비류. 온조 두 형제가 한성(漢城)의 인민을 갈라 가지고 각기 제 서울로 간 사실일 것이다.

미추홀(彌鄒忽)은 <메주골>이요, 위례성은 <오리골>이니, 지금의 풍속에도 어느 동네든지 가끔 동편에 오리골이 있고 서편에 메주골이 있으니, 그 의의는 알 수 없으나, 그 유래가 오래된 것이다.

그런데 비류의 미추홀은 토지가 습하고 물이 짜서 백성이 살 수 없으므로 인민들이 많이 흩어져 달아났으나, 온조의 하남위례성은 수토(水土)가 적합하고 오곡이 잘 되어 인민이 편히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비류가 창피하고 분해서 병이 나 죽고, 그 신민(臣民)들은 다 온조에게로 오니, 이에 동. 서 양 백제가 다시 하나로 되었다.

 

三, 온조의 마한(馬韓) 습멸(襲滅)

 

백제가 마한의 봉토를 얻어 건국하였으므로 소서노 이래로 마한에 대하여 공손히 신하로서의 예를 다하여, 사냥을 하면 얻은 노루와 사슴을 마한에게 보내주고, 전쟁을 하면 얻은 포로들을 마한에 보내주었다. 그러나 소서노가 죽은 후에는 온조가 서북의 예(濊)와 낙랑(樂浪)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북으로는 패하(浿河: 지금의 대동강-원주)로부터 남으로는 웅천(熊川: 지금의 공주-원주)에 이르기까지를 백제의 땅으로 획정(劃定)해 달라고 요구하며 마침내 그 허락을 얻고, 그 뒤에 웅천(熊川)에 가서 마한과 백제의 국경에 성책을 쌓았다.

마한왕이 사자를 보내어 꾸짖기를. “왕의 모자가 처음 남으로 내려왔을 때 발 디딜 땅도 없다가 내가 서북 백 리의 땅을 떼어주어 오늘이 있게 되었는데, 이제 국력이 좀 튼튼해졌다고 우리의 강토를 눌러 성책을 쌓으니, 이것이 어찌 의리상 허용될 수 있는 일이냐.”하였다.

온조가 거짓으로 부끄러운 빛을 보이고는 성책을 헐었으나, 좌우에 말하기를 “마한왕의 정치가 그 도(道)를 잃어 나라의 세력이 자꾸 쇠약해지고 있으니, 이럴 때 취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조가 사냥을 간다는 핑계를 대고는 마한을 습격하여 그 국도(國道)를 점령하고 그 50여 개 나라들을 다 쳐서 멸하였으며, 마한의 유민으로 의병(義兵)을 일으킨 주근(周勤)의 전 집안을 참살(斬殺)하였는데, 온조의 잔학함이 또한 심하였다.

기준(箕準)이 남으로 도망 와서 마한의 왕위를 차지하고 성(姓)을 한씨(韓氏)라 하여 자손에게 전하다가 이 때에 이르러 망하니, <삼국지>에 “準後滅絶, 馬韓人復自立爲王.(준후멸절, 마한인부자립위왕)”(->기준(기준)의 후예가 망하여 끊어지고, 마한인(馬韓人)이 다시 자립하여 왕이 되었다.)이라고 한 것은 이를 가르키는 것이다. 여기서 온조를 마한인(馬韓人)이라고 한 것은, 중국인들은 언제나 백제(百濟)를 마한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온조는 고구려의 유류(儒留). 대주류(大朱留) 두 대왕과 동시대 사람이니, 온조대왕(溫祚大王) 이후에 낙랑의 침입과 노략질을 기록한 것이 없는 이유는, 이때는 이미 대주류왕이 낙랑을 멸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