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상고사

제3장 한 무제(漢武帝)의 침입

운우(雲雨) 2014. 7. 27. 20:34

 

1, 한나라 군대가 고구려에 패퇴한 사실(고구려의 9년 전쟁)

 

조선의 남북 열국(列國)이 갈라서던 판에 중국 한(漢) 무제(武帝)의 침입이 있었다. 이는 한갓 일시적인 정치상의 대 사건일 뿐만 아니라 곧 조선민족의 문화의 부침(浮沈)에도 비상한 관계를 가진 대 사건이다.

고대 동아시아에 불완전한 문자이나마 이두문(吏讀文)을 쓰고 역사 기록과 정치제도를 가져서 문화를 가졌다고 할 만한 민족은 중국 이외에는 오직 조선뿐이었는데, 당시 조선이 강성하여 매번 중국을 침략하거나 혹은 중국의 침략에 항거하였으며, 중국도 제(濟). 연(燕). 진(秦) 이래로 빈번히 조선에 대하여 방어 혹은 침입하였다는 것은 제2편에서 진술한 바와 같다.

그런데 진(秦)이 망하고 한(漢)이 흥하여서는 북방 흉노의 침략에 시달리다가 한 고조(高祖)가 모돈(冒頓)을 쳤으나 백등(白登: 산서성 대동부(大同府)부근-원주)에서 대패하여, 해마다 폐백을 바치고 황녀(皇女)를 모돈의 첩으로 바치는 치욕적인 조약을 맺고, 그 뒤에 그대로 이행하여 고조의 증손(曾孫) 무제(武帝)에 이르렀다.

무제는 야심이 충만한 제왕인지라, 백년 태평세월이 지속된 나머지 국력이 부강해진 것을 믿고 흉노를 쳐서 선대의 수치를 씻으려 하는 동시에, 조선에 대하여도 명분 없는 군사를 일으켜서 민족적 혈전을 개시하였다.

그런데 한 무제가 침입한 조선이 둘 있으니,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史記) 평준서(平準書)와 같은 것이다.-원주)에, "武帝卽位數年, 彭吳穿濊貊朝鮮, 置滄海之郡, 卽燕濟之間, 靡然騷動,(무제즉위수년, 팽오천예맥조선, 치창해지군, 즉연제지간, 미연소동)“(->무제(武帝)가 즉위한 지 수년 후에 팽오(彭吳)로 하여금 예맥조선을 쳐서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려 하였으므로, 연(燕)과 제(濟)사이의 지방은 큰 소동에 휩싸였다.)이라고 하였는데, 팽오(彭吳)가 담장에 구멍을 뚫듯이 쳐들어간 예맥조선(濊貊朝鮮)이 하나의 조선이고,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에, ”樓船將軍楊僕...左將軍筍遞...遂定朝鮮爲四郡)“(->누선장군...좌장군순체...수정조선위사군)”(누선장군 양복(楊僕)과 ...좌장군 순체(殉遞)가...마침내 조선을 평정하여 사군을 만들었다)이라고 하였는바, 양복(楊僕)과 순체(殉遞)가 멸망시킨 조선이 또 하나의 조선이다.

후자의 조선은 곧 조선열전에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위씨(衛氏: 즉, 위만조선인 줄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바이지만, 전자의 조선은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나 <사기(史記)> 평준서(平準書)에 이 같은 간단한 한 구절만 기재되어 있고 다른 전기(傳記)에서는 다시 보이지 않으므로, 지금까지 어떤 사가(史家)도 이것이 어떤 조선인지 말한 이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전자의 조선은 곧 동부여(東扶餘)를 가리킨 것으로, 한 무제가 위(衛) 우거(右渠)를 멸망시키기 전에 동부여를 군현(郡縣)으로 삼으려고 고구려와 9년 동안 혈전을 벌이다가 패하여 물러간 일이 있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이를 증명할 수 있는가?

<후한서(後漢書) 예전(濊傳)에서는 “漢武帝元朔元年, 濊君南閭等 叛右渠, 率二十八萬口, 詣遙東降漢, 而其地爲滄海郡,(한무제원삭원년, 예군남려등반우거, 솔이십팔만구, 예요동항한, 이기지위창해군)”(->한 무제 원삭(元朔) 원년에, 예군(濊君) 남려(南閭) 등이 우거(右渠)에 반기를 들고 28만 명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찾아와서 한(漢)에 투항하였다. 그리고 그 땅을 창해군으로 만들었다.)이라고 하였으며,

<한서(漢書)> 본기(本記)에서는 “元朔三年春, 罷滄海郡,(원삭삼년춘, 파창해군)”(-> 원삭 3년 봄에 창해군을 파하였다.)이라고 하였고,

<사기(史記)> 공손홍전 (公孫弘傳)에서는 “弘數諫...願罷...滄海, 而專奉朔方...上乃許之(홍삭간, 원파, 창해, 이전봉삭방, 상내허지”(->공손홍이 여러 차례 간하여... 창해군을 파하고 전적으로 북방 경영에만 전념하자고 하니...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라고 하였다.

지금까지의 학자들은 위 세 책과 앞에서 말한 한서(漢書)식화지(食貨志)의 본문을 합하여, “예맥조선(濊貊朝鮮)은 예(濊)의 군장(君長)인 남려(南閭)의 나라(國), 곧 지금의 강릉(江陵)이니, 강릉이 당시 우거(右渠)의 속국으로서 한(漢)에 반항(反抗)하므로, 한이 팽오(彭吳)를 보내어 항복을 받고, 그 토지로서 창해군(滄海郡)을 삼았다가, 그 뒤에 그 땅의 경계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유지비용이 너무 많이 들므로, 그 전쟁을 그만둔 것이다.”라고 단안하였다.

그러나 이 단안에서의 잘못은 다음과 같다.

(一) 중국사에서는 항상 동부여(東扶餘)를 예(濊)로 잘못 기록하였다는 것과, 남. 북 양 동부여는 그 하나는 지금의 혼춘(琿春: 훈춘-원주)이고 또 하나는 지금의 함흥(咸興)이라는 것은 이미 본편 제2장 제2절과 3절에서 설명하였다. 그런데도 동부여를 지금의 강릉이라고 하는 것은, 신라가 그 동북 지방의 땅 1천여 리를 잃고 그 잃은 지방의 고적(古跡)을 내지(內地)로 옮길 때에 동부여의 고적(古跡)을 지금의 강릉으로 옮겼기 때문에 생긴 틀린 말이므로, 예군(濊郡) 남려(南閭)는 함흥의 동부여왕(東扶餘王)이고 강릉의 군장이 아니다.

(二)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의 본문은 명백히 “漢武帝卽位數年, 彭吳穿濊貊朝鮮,(한무제즉위수년, 팽오천예맥조선)”->무제(武帝)가 즉위한지 수년 후에 팽오(彭吳)로 하여금 예맥조선을 치게 하였다.)이라고 하였는데, <후한서>에 기록된바 창해군을 처음 설치한 해는 무제 즉위 13년(기원전 128년)이니, 13년을 <수년(數年)>이라 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한서(漢書)주보언열전(主父偃列傳)의 원광 원년(元光元年:기원전 134년)엄안(嚴安)의 상소문(上疏文)에서, “今欲, 略濊州, 建置城邑)”(->지금 예주(濊州)를 침략하여 ...(그곳에) 성읍(城邑)을 설치하고자 한다.)이라고 하였는바, 략예주(略濊州)는 곧 예맥조선을 침략하려는 계획을 기리킨 것이고, 건치성읍(建置城邑)은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여 경영하고자 하였던 계획을 가리킨 것이다.

그리고 원광 원년(元光元年, 즉 원삭 원년(元朔元年: 기원전 128년)의 6년 전에 엄안(嚴安)이 예(濊)에 대한 침략과 창해군 설치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은즉, 남려(南閭)가 항복한 것과 팽오(彭吳)가 쳐들어온 것은 벌써 원광 원년(元光元年:기원전 104년)의 일이지, 그 6년 후인 원삭 원년(元朔元年 기원전 128년)의 일이 아니다.

(三) 창해군을 처음 설치하려고 한 해인 원강(元光) 원년은 기원전 134년이고, 창해군 설치 계획을 철패한 해인 원삭(元朔) 3년은 기원전 126년이니, 그러면 한(漢)이 동부여를 침략하여 창해군을 만들기 위한 전쟁은 전후로 9년이나 걸렸던 것이다.

만약 동부여가 우거(右渠)의 속국이었다면, 우거가 군사를 끌고 와서 구원하지 않을 수 없으며, 만일 와서 구원하였다고 한다면, 사기(史記)조선왕만전(朝鮮王滿傳)에 우거의 한(漢)에 대한 관계, 즉 진번진국(眞番辰國)이 한(漢)과 왕래하지 못하도록 막은 사실과 한(漢)의 요동 동부도위(東部都尉)를 쳐서 죽인 사실 등과 같은 것들은 다 기록하면서, 어찌하여 이보다 더 중대한 9년 전쟁의 사실은 뺐겠는가.

앞에서 설명한바 개정한 연대에 의하면, 이때는 동부여가 고구려에 정복된 뒤였으며, 따라서 남려(南閭)는 위씨(衛氏)의 속국이 아니라 고구려의 속국이었다.

그렇다면 남려(南閭)는 고구려의 속국이면서 왜 고구려를 배반하고 한(漢)에 투항하였는가.

남려(南閭)는 대개 남동부여(南東扶餘), 즉 <후한서>와 <삼국지>의 예전(濊傳)에 기록된바 불내예왕(不耐濊王)이며, 고구려본기에 기록된바 자기 손녀를 대주류왕(大朱留王)에게 시집보낸 갈사왕(葛思王)이다. 그렇다면 남려는 대주류왕의 처조부(妻祖父)가 되고, 대주류왕은 남려의 손녀 사위가 되며, 제3장에서 서술한 호동(好童)은 남려의 진외증손(眞外曾孫)이 되니, 말하자면 그 붙이(친척간의 촌수)가 매우 가까운 사이이다. 그러나 호동의 처의 부친, 즉 장인(丈人)인 낙랑왕 최리(崔理)도 쳐 죽이는 판에, 어찌 처조부와 진외증손을 알아보겠는가. 고구려의 동부여에 대한 압박이 심하였던 것도 가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런즉 남려가 옛날 부형(父兄)의 원수이기 때문이든 아니면 현재 받고 있는 압박의 고통 때문이든 간에, 어찌 고구려에 대하여 보복할 생각이 없었겠는가.

이에 고구려에 대하여 동일한 원한을 가진 낙랑 각 소국(小國)들과 연합하여 우거(右渠)와 은밀히 손을 잡고 고구려를 배척하려고 하였으나, 우거는 사실 고구려보다 미약하여 고구려를 대항하지 못하므로, 남려가 이에 우거를 버리고 한(漢)과 통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과 통하려면 부득불 위씨(衛氏)의 나라(衛滿朝鮮)를 경유해야만 할 터인데, 우거는 동부여가 혹시 위씨국(衛氏國)의 비밀을 한(漢)에 누설할까봐 우려하여 국경 통과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기(史記) 조선왕만전(朝鮮王滿傳)에, “眞番房衆國, 欲上書入見天子, 右渠又壅閼不通(진번방중국, 욕상서입견천자, 우거우옹알불통)”(->진번(眞番) 주변의 여러 나라들은 글을 올려 들어가 천자(天子)를 만나고자 하였으나, 우거(右渠)가 길을 막아 통할 수 없었다.)이라고 한 것이니, 眞番房衆國(진번방중국)(-> 진번(眞番) 주변의 여러 나라들)은 곧 동남부여와 남낙랑(南樂浪) 등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남려가 마침내 해로(海路)를 통하여 한(漢)으로 가서 사정을 호소하니, 야욕으로 가득 차 있던 무제(武帝)가 어찌 이 기회를 놓칠 수 있었겠는가.

드디어 동부여를 장래의 창해군(滄海郡)으로 미리 정해놓고, 팽오(彭吳)를 대장(大將)으로 삼아, 연(燕) 제(濟)(지금의 북경시와 산동-원주)의 병마(兵馬)와 양식 등을 총 징발하여 바다를 건너 고구려와 싸워 동남부여와 남낙랑(南樂浪) 열국(列國)을 구원하려 하였으나, 고구려의 대항이 의외로 강경하여 9년간이나 혈전을 계속하였는데, 한(漢)의 패전이 빈번하였으므로 이에 창해군(滄海郡)혁파(革罷)라는 핑계를 내세워 병력을 거두고 전쟁을 종결시켰던 것이다.

이와 같이 9년간 양국 사이에 혈전이 있었다면, 사마천(司馬遷)은 왜 사기(史記)조선열전(朝鮮列傳)에 이 사실을 기록해 놓지 않았을까?

이는 다름아니라 위중국휘치(爲中國諱恥)(-> 중국에게 수치스런 일은 감춘다.) 가 공자의 춘추(春秋) 이래 중국 사가들이 떠받드는 유일한 원칙, 곧 종지(宗旨)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삼국지 왕숙전(王肅傳)에 의하면, “사마천이 <사기>에 경제(景帝)와 무제(無帝)의 잘잘못을 있는 그대로 썼더니, 무제가 이를 보고 대노하므로, 효경본기(孝景本記)와 금상본기(今上本記: 즉 무제본기-원주) 두 편을 삭제하였으나, 이로 말미암아 그 뒤에 사마천은 불알을 까는 궁형(宮刑)에 처해졌다. 고 하였다.

고구려에 대한 전쟁 패배는 한 무제처럼 무력을 숭상하는 자(尙武者)에게는 유일하게 치욕으로 여기는 일이므로 스스로 감추는 것이었는데, 만일 이 일을 있는 그대로 썼더라면 불알 까이는 궁형(宮刑) 뿐 아니라 목이 달아나는 참형(斬刑)까지 당하였을 것이다. 그것을 뺀 것은 고의(故意)일 것이다. 그리고 <사기> 평준서(平準書)에서 그 사실을 언뜻 비추었으나 “彭吳. 賈滅朝鮮(팽오. 가멸조선)”이라 하여 조선을 멸망시킨 것처럼 쓴 것 또한 그 당시의 권력자가 싫어하는 바를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에서는 그 사실이 너무 동떨어진 것이라고 하여 滅(멸)자를 穿(천)자로 고쳤으나, 그 전부를 사실대로 기록하지 못한 것은 사마천(司馬遷)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한 무제(武帝)와 싸운 자는 대주류왕. 곧 고구려본기의 대무신왕(大武神王)일 것이다. 그러나 본기에서는 연대를 삭감(削減)하였기 때문에 한 무제와 동시대인 대주류왕이 한(漢) 광무(光武)와 동시대인 것처럼 되고, 그리고 또 중국사의 낙랑에 관한 기록과 맞추려 하였기 때문에 대주류왕이 도리어 한(漢)에게 낙랑국을 빼앗겼다는 거짓 기록(記錄)을 남기게 된 것이다.

 

2, 한 무제, 위씨(衛氏)를 쳐서 멸망시킴(위씨조선의 멸망)

 

한 무제가 9년 동안 장시간의 혈전에서 패하여 물러가서 이후 17년 동안 조선 열국을 엿보지 못하였으나, 그 마음이야 어찌 동방침략을 잊었겠는가.

이에 위씨(衛氏: 위만조선)는 비록 조선 열국의 하나이지만 그 왕조가 본래 중국의 종자(種子)이고 그 장상(將相)들도 흔히 한(漢)으로부터 망명온 자들의 후예들이므로, 이들을 유인하여 조선 열국을 잠식하는 길잡이로 삼으러하였다.

그런 와중에 위씨(衛氏)에게서 길을 빌려 동부여를 구하고 고구려를 치는 편의를 얻고자 하여, 기원전 109년에 한 무제가 사자 섭하(涉荷)를 보내어 먼저 “한(漢)과 동부여 사이를 왕래하는 사절(使節)이 위씨국(衛氏國: 위만조선)의 국경을 통과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고 하면서 한(漢)의 국위(國威)로써 우거(右渠)를 위협하고, 한편으로는 많은 뇌물을 주면서 꾀였으나, 우거는 완강히 거절하고 듣지 않았다.

섭하가 이에 한 무제의 밀지(密旨)에 따라 귀국하는 길에 양국의 국경인 패수에(浿水), 즉 지금의 헌우락(軒芋落)에서 우거가 보낸 전송사자(錢送使者), 즉 우거의 부왕(副王)을 찔러 죽이고 급히 한(漢)으로 달아나서 한 무제에게 “조선국 대장을 죽였습니다.”하고 외치니, 한 무제는 사실 다른 흉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가 죽인 자가 누구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그 공으로 섭하를 요동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임명하였다.

섭하가 임지(任地)에 온 지 얼마 후, 우거가 이전의 일에 원한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섭하를 습격하여 죽였다.

무제가 이 일을 구실로 좌장군(左將軍) 순체(筍替)에게는 무장병 5만을 이끌고 요수(遙水)를 건너 패수(浿水)로 향하게 하고,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에게는 해군 7천 명을 이끌고 발해(渤海)로 나아가 열수(列水)로 들어가게 하여, 우거의 서울, 곧 왕검성(王儉城: 조선의 고대 세 왕검성 중의 하나-원주)을 좌우로 협격하도록 하였으나, 양복은 열수 입구에 이르러 상륙하였으나 곧 대패하여 산속으로 도망쳐서 그곳에서 잔병(殘兵)을 거두어 스스로를 지키고 있었고, 순체(筍替)는 패수(浿水)를 건너려 하였으나 위씨(衛氏)의 군사들이 막아 지켜서 여의치 못하였다.

이에 한 무제가 두 장수의 패전 소식을 듣고 사자 위산(衛山)을 보내어 황금을 풀어 여러 신하들에게 뇌물을 먹여서 그들 사이를 이간(離間)하였다.

위씨의 나라는 원래 조선과 중국의 떠돌이 도적들의 집단이었기 때문에, 그 신하들은 위씨에 대한 충성심보다 황금에 대한 욕심이 대단히 강하였으므로, 그의 신하들은 주전(主戰)과 주화(主和) 두 파로 갈라져서 서로 다투다가, 한(漢)이 비밀리에 많은 황금을 풀자 주화파(主和派)가 갑자기 많아졌다. 이들은 우거에게, 태자를 한(漢)의 진중에 보내어 한(漢)의 장수에게 사죄하고 군량과 말들을 바치겠다고 약속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우거는 “태자가 호위병 1만 명을 데리고 패수를 건너가서 한(漢)의 장수를 만나보게 하라”고 지시하였고, 한(漢)의 장수는 “태자가 1만 명의 군대로 패수를 건너오려면 무장을 갖추지 말고 오라.”고 하여, 양편이 서로 버팀으로써 교섭이 깨어졌다.

그러나 그 황금의 뇌물이 효력을 발휘하여 우거의 재상(宰相) 노인(路人). 한음(韓陰). 삼(參)과 대장 왕겹(王겹)이 한(漢)과 친하게 지내면서 전쟁에 힘을 쓰지 않으므로, 한(漢)의 장수 순체가 패수를 건너와서 왕검성의 서북을 치고, 양복은 산 속에서 나와 왕검성의 동남을 쳤다.

한 무제가 교섭이 파열된 것을 이유로 위산(衛山)에게 죄를 가하여 참형에 처하고, 제남(濟南)태수 공손수(公孫遂)를 전권을 지닌 사자로 보내어 두 장수를 감독하게 하는 동시에, 더욱 많은 황금을 가지고 가서 우거의 여러 신하들을 매수하도록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순체와 양복은 서로 먼저 우거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다투느라 사이가 나빠졌다.

이에 공손수가 순체의 편을 들어주어 양복을 불러와서 순체의 군중에 가두어 놓고는 순체로 하여금 양복의 군사들까지 합쳐서 지휘하여 싸우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돌아가서 한 무제에게 보고하니, 한 무제가 “황금만 낭비하고 위씨의 여러 신하들을 항복시키지 못하였다.”고 크게 화를 내며 공손수의 목을 베었다.

얼마 후 한음(韓陰). 왕겹(왕겹). 노인(路人) 등이 뇌물을 받은 일이 발각되어, 노인은 참형을 당하고 한음과 왕겹 두 사람은 도망을 가서 한(漢)의 진중에 투항하였다. 이듬해 여름에 삼(參)이 우거를 암살하고 성을 들어 항복하자, 우거의 대신 성기(成己)가 삼(參)을 토벌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때 우거의 왕자 장(長)이 배반하여 삼(參)에게 붙어서는 노인(路人)의 아들 최와 합하여 성기(成己)를 죽이고 성문을 열어줌으로써, 결국 위씨(衛氏)는 망하고 말았다.

한 무제가 그 땅을 나누어 진번(眞番). 임둔(臨屯). 현토(玄兎). 낙랑(樂浪) 등 사군(四郡)을 만들었다.

이때의 사실은 오직 사기(史記) 조선열전에 근거할 뿐인데, 조선열전 중에 한(漢)이 황금과 비단을 뇌물로 써서 위씨의 여러 신하들을 매수한 일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사마천이 무제본기(武帝本記)를 쓰면서 잘잘못을 정직하게 썼다가 화를 입고 궁형(宮刑)을 당했기 때문에 동부여에 대한 한(漢)의 패전도 사실대로 기록할 수 없는 심리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정직하게 적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裡面)에는 한(漢)이 전쟁에서 패하고 뇌물로 성공한 사실이 지상(紙上)에 뚜렷이 보이는데, 이를테면 “滿, 得以兵威財物侵, 降其旁小邑(만, 득이병위재물침, 항기방소읍”(-> 위만은 군대의 위력과 재물을 사용하여 침략함으로써 그 주위의 소읍(小邑)들을 항복시켰다.)이라고 하여, 위만(衛滿)의 건국이 군대의 위력(兵威)과 재물(財物) 양자로써 성취되었음을 기록한 것은, 은연중에 한 무제(武帝)를 빗대어 말함으로써 위씨를 멸망시킬 때에 당당한 병력으로 하지 못하고 재물로써 적을 매수하는 비열한 수단을 썼음을 꼬집은 것이다.

그리고 “遣衛山, 因兵威往諭右渠,(견위산, 인병위왕유우거)”(-> 위산(衛山)을 보내어 군대의 위력(兵威)으로써 우거를 타이르도록 하였다.)라고 하여 병위(兵威)자 두 자만 쓰고 재물(財物)자 두 자는 뺐으나, 이때에 순체와 양복은 이미 싸움에서 패하고 증원군도 가지 않아서 군대의 위력(兵威)이 도리어 우거보다 약했던 때인데, 무슨 군대의 위력(兵威)이 있었다는 것인가.

이것은 곧 윗 문장의 병위재물(兵威財物) 네 자를 이어 받아서, 위산(衛山)이 가져간 것은 군대의 위력(兵威)이 아니라 재물(財物)이란 뜻을 포함한 것이며, 위산(衛山)과 공손수(公孫遂)가 둘 다 아무런 이유 없이 참수당한 것을 기록해 놓은 것은 한 무제가 황금과 비단만 쓰고 성공하지 못한 것에 화를 냈음을 표시한 것이며, 위씨(衛氏)가 망한 후에 순체와 양복이 하나는 참수 당하고 또 하나는 쫓겨나고, 관작에 봉해지는 상을 받은 자는 위씨에게 반기를 든 역신(逆臣) 노인(路人)의 아들 최(崔)와 왕겹(王겹) 등 4명 뿐이니, 이는 곧 위씨의 멸망이 병력에 있지 않고 한(漢)의 재물을 받고 나라를 팔아먹은 간신(奸臣)들에게 있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3, 한사군(漢四郡)의 위치와 고구려의 대(對) 한(漢) 관계

 

위씨(衛氏:위만조선)가 망하자 한(漢)이 그 땅을 나누어 진번(眞番). 임둔(臨屯). 현토(玄兎). 낙랑(樂浪) 등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는바, 사군(四郡)의 위치 문제는 삼한(三韓)의 연혁(沿革) 문제에 관한 논쟁 못지않은 조선사상 논쟁거리가 되어왔다.

만반한(滿潘汗) 패수(浿水)왕검성(王儉城) 등 위씨의 근거지가 지금의 해성(海城). 개평(蓋平) 등지일 뿐만 아니라(이에 대하여 제2편 제2장에서 이미 상술하였음)-원주), 당시에 지금의 개원(開原) 이북은 북부여국이었고, 지금의 흥경(興京) 이동은 고구려국이었으며, 지금의 압록강 이남은 낙랑국이었고, 지금의 함경도 내지 강원도는 동부여국이었으니, 위의 4개 나라 이외에서 한사군(漢四郡)을 찾아야할 것인즉, 사군(四郡)의 위치는 지금의 요동반도 이내에서 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군의 위치에 대하여 이설(異說)이 백출(百出)한 것은 대개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 첫째는 지명(지명의 같고 다름을 잘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패수(浿수). 낙랑(樂浪) 등은 다 <펴라>로 읽어야 할 것이니, 지금의 대동강은 당시의 <펴라>란 물이요, 지금의 평양(平壤)은 당시의 <펴라>란 서울이니, 물과 서울을 다 같이 <펴라>라고 이름 붙인 것은 마치 지금의 청주(淸州)<까치내>란 물 곁에 <까치내>란 촌(村)이 있음과 같이, <펴라>란 물 위에 있는 서울이므로 또한 <펴라>라고 이름한 것이다.

패수(浿水)의 패(浿)는 <펴라>의 <펴> 음(音)을 취하고 패수(浿水)의 수(水)는 <펴라>의 <라>의 뜻(義)을 취한 것으로, <펴라>로 읽은 것이다. 그리고 낙랑(樂浪)의 <낙(樂>)은 <펴라>의 <펴>의 뜻(義)을 취하고 낙랑(樂浪)의 <랑(浪)>은 <펴라>의 <라>의 음(音)을 취한 것으로, <펴라>로 읽은 것이다.

기타 낙랑. 평양(平壤). 평양(平穰). 평나(平那). 백아강(百牙岡) 등도 다 <펴라>로 읽을 것이니, 그 해석은 여기에서 생략하거니와, 한 무제가 이미 위씨조선, 곧 불조선을 멸하여 요동군(遙東郡)을 만들고는 <신>. <말> 양 조선의 지명을 가져다가 위씨조선의 옛 지명을 대신하였는데, 지금의 해성(海城). 헌우락(軒芋樂)의 본명은 <알티>(안지 혹은 안시라 한 것-원주)이거늘, 이를 고쳐서 <패수(浿水)>라고 하였던 것이다.

<사기(史記)의 작자 사마천(司馬遷)은 이 고친 지명에 의거하여 사군(四郡) 이전의 고사(故事)를 설명하였으므로 “漢興...至浿水爲界(한흥...지패수위계)”(-> 한(漢)이 흥하자...패수(浿水)를 경계로 삼았다.)와 “滿...東走出塞, 度浿水(만...동주출새, 도패수)(-> 위만(衛滿)은...동으로 달아나 국경을 넘어 패수(浿水)를 건넜다.) 등의 말이 있게 된 것이다.

진번(眞番)은 원래 <신>. <불>. 양 조선을 합쳐서 부른 것인데도, 한(漢)이 이를 취하여 고구려를 진번군(眞番郡)으로 가정(다음에서 상세히 설명함-원주)하였다.

<사기>의 “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시전연시, 상략속진번조선)”(-> 처음 연(燕)의 전성기 때에 일찍이 진번조선(眞番朝鮮)을 침략하여 복속시켰다.)이란 기사와 “滿...梢役屬眞番朝鮮(만...초역속진번조선)”(-> 위만(衛滿)은...차차 진번조선과 싸워서 이를 복속시켰다.)이란 기사 등에 있는 진번조선(眞番朝鮮)은 모두 <신>. <불> 양 조선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진번. 임둔. 개래복속(眞番, 臨屯, 皆來服屬)“(-> 진번(眞番)과 임둔(臨屯)이 다 와서 복속하였다.)이란 기사와, ”眞番房衆小國. 欲上書見天子(진번방중소국, 욕상서견천자)“(->진번(眞番) 주변의 여러 소국들이 글을 올려 천자를 보고자 하였다.)라는 기사 등에 있는 진번(眞番)은 다 한 사군(四郡) 이후에 한 사군의 하나인 진번(眞蕃)을 가리킨 것으로서, 이 또한 후에 와서 고친 지명에 의거하여 옛 일을 설명한 것이니, 이는 마치 을지문덕(乙支文德) 이후에 살수(薩水)의 명칭이 청천강(淸川江)이 되었으므로 을지문덕 시대에는 청천강이 없었으나, 우리가 ”을지문덕이 청천강에서 수나라를 격파하였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의 학자들은 이것을 모르고 <사기(史記)>의 패수(浿水)와 <진번(眞番)> 등을 사군(四郡) 이전의 명칭으로 아는 동시에, 헌우락 패수(軒芋樂 浿水). 대동강 패수(大同江 浿水)의 양 패수(浿水)와, 두 나라의 이름(國名)인 진번(眞番: 즉 眞韓과 番韓-옮긴이)과 하나의 군 이름(郡名)인 진번(眞番)두 가지 서로 다른 진번(眞番)을 혼동해서 사용하는 것과 그 둘째는 기록의 진위(眞僞)를 잘 변별(辯別)하지 못한 까닭이다.

예를 들면 한서(漢書)의 무제본기(武帝本記)원봉(元封) 3년의 진번. 임둔. 주(主)에서 신하 찬(瓚)이 말하기를, 무릉서(茂陵書)에 의하면, 진번군의 치소(治所: 군청 소재지)인 삽현(揷縣)은 장안에서 7.640리 떨어져 있고...임둔군의 치소인 동이현(東貽縣)은 장안에서 6.130리 떨어져 있다. 라 하였고, 무릉서(茂陵書)는 무릉인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쓴 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기(史記)의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에서는 “相如旣卒五歲, 天子始際后土(상여기졸오세, 천자시제후토)”(-> 상여가 죽고 나서 5년 후에 천자가 처음으로 후토(后土)에 제사지냈다.)라고 하였고, <사기집해(史記集解)>에서는 “元鼎四年...始立后土(원정4년...시립후토)”(-> 원정(元鼎) 4년에...비로소 후토(后土)를 세웠다.)라고 하였다. 원정(元鼎) 4년은 기원전 113년이고, 사마상여가 죽은 것은 그 5년 전인 원수(元狩) 6년(기원전117년)이므로, 사마상여는 진번. 임둔 군을 설치한 해인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년)에는 이미 죽은 지 10년이나 되는 자이니, 10년 전에 이미 죽은 사마상여가 어찌 10년 후에 세워질 진번군과 임둔군의 위치를 말 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무릉서(茂陵書)는 위서(僞書)인 동시에, 그 책에서 말하는 진번(眞番) 임둔(臨屯)운운은 위증임이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한서(漢書) 지리지에는 요동군 군현지(郡縣志) 이외에 따로 현토(玄兎)와 낙랑(樂浪) 두 군지(郡志)가 있으므로 역사를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요동반도 이외에 현토. 낙랑 두 군(郡)이 존재한 것처럼 인식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위략(魏略)의 만반한(滿潘汗)이 곧 <한서> 지리지(地理志) 요동군지(遙東郡志)에서 말하는 문(汶). 번한(番韓)이라는 것과, <사기>에서 말한 패수(浿水)는 곧 요동군 번한현(番汗縣)의 패수(浿水)라는 것은 이미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이니, 지리지(地理志)의 현토. 낙랑 양 군(郡) 운운은 후세 사람의 위증임이 틀림이 없거늘, 지금까지의 학자들은 이와 같은 위작(僞作)의 문건(公案)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언제나 위의 <한서>본기의 진번. 임둔의 주(主)나 <한서> 지리지의 낙랑. 현토 양 군지(郡志)를 금석(金石)에 새겨져서 고치거나 바꾸기가 불가능한 진서(眞書)인 것처럼 잘못 인식해 왔다.

이러한 까닭으로 인하여 사군(四郡)의 위치에 관하여 참고할 근거가 비록 분분하게 이야기되어 왔으나 그 어느 하나도 정곡(正鵠)을 얻은 이가 없었던 것이다.

한사군(漢四郡)은 원래 땅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지상(紙上)에 그렸던 일종의 가정(假定), 곧 계획이었다. 말하자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서는 그곳에 진번군(眞番郡)을 만들 것이다. 북동부여, 곧 북옥저(北沃沮)를 멸망시키고 나서는 그곳에 현토군(玄兎郡)을 세울 것이다. 남동부여, 곧 남옥저(南沃沮)를 멸망시키게 되면 그곳에 임둔군(臨鈍郡)을 만들 것이다. 낙랑국을 멸망시키게 되면 그곳에 낙랑군(樂浪郡)을 설치할 것이다. 라고 하는 가정에 근거한 계획일 뿐이었지, 실제로 세워졌던 것은 아니다.

한 무제가 그 가정(假定)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위의 각지에 대하여 침략을 시작하였을 것이며, 낙랑과 양 동부여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고구려에 대한 숙원(宿怨)이 있었으므로 한(漢)의 힘을 빌려 고구려를 배척하려고 하였을 것이며, 고구려는 전에 대주류왕(大朱留王)의 전승(戰勝)한 기세를 믿고 한(漢)과 결전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전쟁은 대개 기원전 108년경, 곧 위씨(衛氏)가 멸망한 해에 시작하여 기원전 82년에 이르러 끝났는데, 한(漢)이 패하여 사군(四郡) 설치의 희망이 영원히 끊어졌기 때문에 진번. 임둔 두 군은 그 명칭을 폐지하고, 현토. 낙랑 두 군은 요동군 내에 임시로 설치하기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한서(漢書) 본기에는 진번군을 철폐하였다고 하였을 뿐이고 임둔군을 철폐하였다는 말은 없으나, 후한서(後漢書) 예전(濊傳)에, “昭帝罷眞番, 臨屯, 以幷樂浪, 玄兎(소제파진번, 임둔, 이병낙랑, 현토)”(->소제(昭帝)가 진번. 임둔을 없애고 낙랑. 현토로 합쳤다.)라고 한 것을 보면, 임둔군도 진번군과 동시에 폐지하였던 것이다.

<후한서> 예전에는 “현토를 구려(句麗: 한(漢)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가리킨 것-원주)로 옮겼다.”고 하였으며, <삼국지> 옥저전(沃沮傳)에는 “처음에 옥저로써 현토군을 삼았다가 후에 고구려(高句麗) 서북으로 옮겼다.”고 하였으나, 옥저전(沃沮傳)의 불내예왕(不耐濊王)은 북동부여와 남동부여의 왕을 가리킨 것이고, 예전(濊傳)의 불내예왕(不耐濊王)은 낙랑을 가리킨 것이다.

따라서 양 동부여와 낙랑국은 둘 다 당시에 독립왕국이었으니, 그러면 현토군이 옥저. 곧 북동부여에서 요동으로 이사한 것이 아니라, 다만 북동부여를 현토군으로 만들려던 기도(企圖)가 실패하였으므로, 비로소 요동, 곧 지금의 봉천성성(奉天省城)에 현토군을 임시로 설치하였던 것이다. 그 위치는 확실히 말할 수 없으나, 대개 지금의 해성(海城) 등지였던 것 같다.

왜 진번. 임둔을 철폐하는 동시에 현토. 낙랑 두 군을 임시로 성치하였는가?

이는 다름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낙랑국과 남동부여국이 고구려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원한이 심하여, 한(漢)이 전쟁에서 패하여 물러난 뒤에도 양국이 오히려 사자를 보내어 은밀히 내통하고, 상민(商民)들이 왕래하며 물자를 서로 교역하므로, 한(漢)이 요동에 현토. 낙랑 두 군을 임시로 설치하여 양국에 대한 교섭을 맡게 하고, 혹 고구려와 전쟁을 하는 경우에는 두 나라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는데, 이것은 한(漢)의 두 나라와의 관계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매번 두 나라가 한(漢)과 통하는 증거와 흔적을 발각하면 반드시 그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켰는데, 이것은 고구려와 두 나라와의 관계이다. 수백 년 동안 이 두 나라 때문에 고구려의 한(漢)에 대한 진취(進取)가 크게 방해를 받았던 것이다.

본서에서 양 낙랑(樂浪)을 구별하기 위하여, 낙랑국(樂浪國)은 남낙랑(南樂浪)이라 쓰고, 한(漢)이 요동(遙東)에 설치한 낙랑군(樂浪郡)은 북낙랑(北樂浪)이라 쓰는데,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보이는 낙랑왕(樂浪王)과 신라본기에 보이는 낙랑국(樂浪國)은 다 이 남낙랑(南樂浪)을 가리킨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의 학자들은 언제나 요동에 있는 북낙랑(北樂浪)은 모르고, 남낙랑(즉, 낙랑국)을 낙랑군(樂浪郡)이라 주장하는 동시에, <삼국사기>의 낙랑국(樂浪國). 낙랑왕(樂浪王)은 곧 한군(漢郡)태수(太守)의 세력이 동방에 위력을 떨치고 그 세력이 한 나라의 왕과 같으므로 <국(國)> 혹은 <왕(王)>이라 불렀다고 단정하였으나, 고구려와 접경인 요동 태수를 요동국왕(遙東國王)이라고 부른 일은 없으며, 현토 태수를 현토국왕(玄兎國王)이라고 부른 일도 없었으니, 어찌 홀로 낙랑태수만은 낙랑국왕(樂浪國王)이라 불렀겠는가. 이것은 억설(臆說)임이 분명하다.

근일 일본인이 낙랑 고분(古墳)에서 간혹 한 대(漢代)의 연호(年號)가 새겨진 기물과 그릇을 발견하고, 지금의 대동강 남안을 위씨(衛氏)의 고도(故都), 곧 후에 와서 낙랑군(樂浪郡)의 치소(治所: 군청 소재지)라고 주장하나, 이따위 기물이나 그릇들은 혹시 남낙랑(南樂浪: 樂浪國)이 한(漢)과 교통할 때에 수입한 기물 또는 그릇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고구려가 한(漢)과의 전쟁에서 이겨서 노획한 것들일 것이다. 이런 것으로써 지금의 대동강 연안이 낙랑군의 치소(治所)였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