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아름다운 구속

운우(雲雨) 2011. 6. 19. 16:33

 

아름다운 구속      운우


수천 명의 눈과 귀가 한쪽으로 쏠려있다.

이제 잠시 후 한 발의 포 소리와 함께 칠천여명의 건각들이 이 곳

경주시민 운동장을 뒤로하고 42.195km의 대 장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드디어 “꽝” 하고 대포소리의 굉음을 신호로 칠천여명의 주자들이

일제히 경주시민 운동장을 박차고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42.195km의 고독의 레이스가 장엄하게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나도 그 숫자속의 일원으로서 피나는 승부를 펼치게 된 것이다.

운동장 남문을 빠져나와 북천을 따라 보문단지 쪽을 향하여 끝없는

행렬이 이어지며 달리기 시작한다.

길옆의 벚꽃나무들은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했고 휴일을 맞은

시민들은 일 년에 한번 치러지는 이 큰 행사에 너도나도 연도에

늘어서 자기고장을 찾은 많은 선수들을 향하여 아낌없는 박수를

쳐주고 있다.

“아저씨 힘내세요! 아저씨 파이팅!”

여기저기서 힘내라는 응원의 소리가 들린다.

응원에 힘입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힘이 절로난다.

이 대회에 나오기까지의 그 힘들었던 겨울 훈련이 머리를 스쳐간다.

연습을 무서워하지 않는 마라토너는 없다고 한다. 오래 달리기,

산에 뛰어 오르기, 등 각종 이름을 달고 매일 30km ~ 50km 에

달하는 거리를 뛰는 일은 정상인이라면 할 일이 아닐 것이다.

가장 원시적이며 숭고하다는 마라톤은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대회에 임박해 식이요법을 통해서 인내력을 시험하는 먹기 훈련은

또 하나의 고통이다.

초반에는 소금기 없는 육식일색으로 후반에는 탄수화물과 단백질

위주로 섭취하는 이 편식요법에는 에너지를 최대한 비축한 상태에서 경기에

임해 체력의 한계에 조금이라도 늦게 도달하려는 비원이 담겨있는 것이다.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는 이 요법은 단식보다 더 선수를 처절하게 만드는 것이다.

실전보다 훈련이 더 괴로운 것은 모든 운동의 속성이지만 마라톤은

그 극한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레이스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전쟁은 치러지는 것이며 사실상 승부도

그때 어느 정도 결정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요란한 소음을 내며 경찰 오토바이가 옆을 스쳐간다.

완만한 언덕을 오르니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이다. 스피드를 내기 시작했다.

많은 주자들이 뒤처지고 있다.

멀리 경주 조선호텔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많은 호텔 직원들과 학생들이 꽹과리와 북을 치며 뛰는 선수들의 힘을 돋운다.

내 앞에 뛰는 선수가 응원소리에 힘이 나는지 더욱 스피드를 내고 있다.

키가 큰 편인데 연습을 많이 했는지 살이 검게 타 있다.

다리 근육을 보니 제법 고르게 발달된 모습이다. 원래 마라톤에는

단거리 근육과 단거리 근육이 있다.

마라톤은 단거리 육상 선수처럼 속근(짧은 근육) 보다는 지구력에 유리한

지근(긴 근육)이 발달해야 한다.

우람하거나 딱딱한 것이 아니라 소담하면서도 물컹물컹할 정도로

탄력이 있는 근육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 달리고 있는 선수는 모든 구비조건을 갖춘 듯 보였다.

이제 오른쪽으로 보문호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는 계속해서 보문호를 끼고 뛰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12km 정도 뛰었는데 벌써 많은 선수들이 지쳐있는 것 같다.

오늘따라 날씨가 덥다.

보통 다른 때에는 너무 추워 고생했는데 올해는

3월이라 해도 무척 덥다는 생각이다.

12km에 이르니 곧게 뻗은 도로에 무수한 차들이 경찰의

제지를 받아 꼼짝 못하고 묶여있다.

그들도 차에서 내려 힘찬 응원을 하여준다.

길옆에는 뛰다가 기권을 하고 걸어가는 사람과 드러누워 있는 사람

앉아서 뛰는 사람을 부러운 눈으로 우두커니 보는 사람 물바가지로

온몸에 물을 붓고 뛰는 사람 등 여러 형태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인생살이의 축소판이라 하는 마라톤을 완주 하는데 따르는 가공할만한

시련은 단순히 체력만으로 극복 될 수 없다는데 마라톤의 고뇌가 있다.

지금 내가 뛰면서 보고 있는 모습들이 바로 그러한 모습들인 것이다.

첫 5km ~ 10km 와 30 ~ 35km 그리고 막판 스퍼트를 정점으로

수도 없이 찾아오는 고비들은 사실 쉬어야 할 때니 그만 뛰라고

하는 자연스러운 몸의 신호인 것이다.

그러나 마라토너는 자연의 흐름에 거역할 것을 요구 받는다.

그리고 문자 그대로 죽을  힘을 다해 반역을 감행하는 것이다.

이제 보문호도 지나고 좁은 도로에 접어들고 있었다.

매우 한적한 길이다.

나와 경쟁했던 사람들은 이제는 뒤에 쳐져있다.

유유자적하게 뛰고 있는데 KBS중계차가 다시 내 모습을 촬영하기 시작한다.

조금 후면 절반인 21km 지점에 도착할 것이다.

체력이 어느 정도 소진된 느낌이다. 2년 전 대회 생각이 떠오른다.

그때는 처음 뛰어보는 풀코스였는데 한마디로 우습게

알고 도전 했다가 고생한 케이스다.

21km 지점에 오니 다리에 쥐가 나고 도저히 뛸 수가 없었다.

길 한복판에 주저앉아 신발을 벗고 맨발로 뛰기 시작하다가

그 날은 날씨가 너무 추워 발이 시려서 뛸 수가 없었다.

다시 신발을 신고 뛰는데 다리가 천근만근이라 움직이는 것도 귀찮을 정도였다.

뛰며 걸으며 30km 지점을 통과하며 급수 대에서 물을 여섯 컵을 마셨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는 많이 달랐다.

많은 연습을 했기에 2년 전 모습과는 판이한 모습이다.

30km 를 통과했다. 몸이 많이 무거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대략 30km 를 넘어서면 비축된 에너지는 다 소모된다.

훈련이 부족한 선수라면 느리게 뛰어 여기까지 왔더라도 배가

고파서 더 못 뛰는 상태로 접어드는 구간이다.

멀쩡해 보이는 선수가 갑자기 만취한 사람처럼 코스를 이탈해

우왕좌왕하다가 쓰러지기도 한다.

환각까지 찾아드는 이 순간을 견뎌내게 하는 것은 체력이

아니라 기억이나 연습 때 치를 떨며 겪었던 고통의 기억만이

그를 다시 뛰게 하는 것이다.

나침반이자 추동력이 되는 것이다.

마라톤은 42.195km가 아니라 12.195km 경기라고

한 금언은 여기에 기인한다.

 30km 는 예고편이라면 막판 12km가 모든 것을 판가름하는 것이다.

추상적인 듯 한 정신력이 실재하는 힘으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인 것이다.

이제35km 지점을 통과하고 있다.

나 자신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뛰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나의

몸에 축적했던 에너지를 모두 소비하고 시종일관 앞으로

가야 된다는 일념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앞에 남아 있는 7km 가 지금껏 뛰어온 거리보다 더욱더 멀게만 느껴진다.

한사람이 옆에 따라붙는다.

여기까지 와서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오기가 발동한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뛰기 시작했다.

2km는 왔을 듯싶다. 상대의 숨소리가 가빠오는 듯하다.

앞으로 치고 나가 보았는데 상대가 악착같이 따라 붙는다.

그리고 도리어 앞지르기 시작한다.

이 지점에서 지기는 싫었다.

나도 스피드를 가속화 했다.

다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룹을 지어 달릴 때 마라토너는 상대의 숨소리가 가빠지거나

발이 무거워지는 기색이 보이면 없던 힘도 생겨나기 마련이다.

반대로 상대에게 지친 기색이 끝내 보이지 않으면 심리적으로 위축된다.

그러면 심폐기능도 위축되는 감이 온다.

상대를 의식하는 일은 그래서 괴롭다.

언제 주먹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복서처럼 그 상대가 언제 스퍼트를

감행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항상 긴장하고 대비상태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언젠가 상대는 튀어 나온다.

그러나 이 지겨운 상대와도 막상 떨어지면

다시 불안해 지는 게  마라토너의 심리다.

홀로 스스로를 통제하고 조절하는 것 역시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려운 모든 것을 극복하고 경주 시가지 입구인 분황사 터

앞을 달리고 있었다.

꼴인 지점까지는 3.5km 정도, 옆 상대의 숨소리를 들어보았다.

매우 거칠게 들린다. 지쳤다는 조짐이다.

나는 튀어나오며 스퍼트하기 시작했다.

상대도 안간힘을 쓰지만 역부족인 듯하다.

나는 이제 경주 시가지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곳곳에 마라토너들을 환영하는 아치와 현수막들이 눈에 들어온다.

연도에 늘어선 시민들이 손뼉을 치며 격려를 한다. 몸은

천근만근인데 어디서 나오는지 힘이 불끈불끈 솟는다.

경주 삼거리를 지나고 역전앞을 지난다.

조금 후면 북천을 가로지른 다리가 나타날 것이다.

죽을  힘을 다 해서 스퍼트를 계속했다.

다리 위를 통과하고 운동장으로 이어지는 좁은 소로를 달리고 있다.

연도에 늘어선 시민들이 환호를 하여준다.

드디어 경주 시민 운동장이 보이고 천을 따라 달리던 길이

내리막길로 접어들게 된다.

달리는 발걸음이 더욱 빨라지기 시작한다.

몸에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에너지를 모두 쓰며

안간힘을 다해 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나를 환영해줄 동료들의 얼굴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한다.

숲길을 지나서 바로 남서 문이 성큼 눈앞에 들어온다. 문 입구에

들어서니 우리 팀 응원이 더욱 힘을 솟게 한다.

“회장님 파이팅! 힘내세요!”

하얀 소금과 땀으로 범벅된 내가 드디어 경주 시민운동장

트랙을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단 몇 초의 시간을 단축하려고 사력을 다 한다.

꼴인 지점이 앞에 가까이 있는데 멀게만 느껴진다.

그리고 두 손을 높이 들고 꼴인 을 했다.

그 멀고먼 42.195km 동안의 구속이 인내 속에 아름답게

끝맺음하는 순간이었다.

출처 : 고려대학교석탑문학사랑회
글쓴이 : 운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