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의 문학 오페라

벨칸토와 고전비극

운우(雲雨) 2022. 3. 3. 15:21

벨칸토와 고전비극

볼테르의 비극<세미라미스>

로시니의 오페라<세미라미데>

 

유럽 역사에서 볼테루와 루소의 관계만큼 흥미로운 관계도 없을 것이다. 볼테루가 루소보다 18년 연상이지만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고, 계몽주의 사상기로서 프랑스 혁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젊은 시절 루소는 볼테루를 존경했다. 볼테루가 쓴 책을 모두 읽고 그에게 표현의 명확성과 문체의 우아함을 배웠다. 33살 때인 1745년에는 볼테루가 대본을 쓰고, 라모가 음악을 붙인 오페라 <나바르의 왕녀>개정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루소는 볼테르에게 그의 대본을 수정해고 좋겠냐는 정중한 편지를 보냈고, 볼테르로부터 그래도 좋다는 답장을 받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나빠진 것은 1754년 루소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발표하고부터였다. 이를 통해 루소가 얘기하고자 한 것은 문명의 발전이 인간의 선량한 본성을 타락시켰고, 그 결과 인간 사이에 불평등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볼테르는 그 말에 찬성할 수 없었다. 루소가 인류가 그동안 이룩해 놓은 문명을 부정했다고 생각한 볼테르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인류의 진보에 반대하는 새로운 책을 고맙게 받았습니다. 이만한

기지로 우리를 동물로 만들려고 시도한 사람은 당신을 빼놓고는 없을

겁니다. 책을 읽으니 네 발로 기어다니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나는 그

런 습관을 버린 지 60년이 지났기 때문에 불행하게도 다시 길 수는

없을 것 같군요.

 

그때부터 두 사람 사이에 적의에 찬 편지가 오고 갔다. 루소는 볼테루가 자신의 고향 제네바에 극장을 건립한다는 소식을 듣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인류의 진보에 반대하는 새로운 책을 고맙게 받았습니다. 이만한

기지로 우리를 동물로 만들려고 시도한 사람은 당신을 뺂고는 없을

겁니다. 책을 읽으니 네 발로 기어다니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나는 그

런 습관을 버린 지 60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불행하게도 다시 갈 수는

없을 것 같군요.

 

그때부터 두 사람 사이에 적의에 찬 편지가 오고 갔다. 루소는 볼테르가 자신의 고향 제네바에 극장을 건립한다는 소식을 듣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볼테르와 루소는 출신 성분부터 당신은 당신이 찾은 피난처 제네바를 타락시켰습니다. 바로 당신이

제게 고향에 머무는 것을 못 견디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저는 당신 때

문에 이국 땅에서 죽어야 합니다. 당신이 제 조국에서 인간이 바랄 수

있는 모든 영예를 차지하는 동안, 저는 죽은 짐승을 버리는 구덩이에

던져질 것입니다. 한마디로 저는 당신을 증오합니다.

 

볼테루와 루소, 두 사람 사이의 반목은 단순한 성격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보다 근본적인 계급 차이 그리고 그로 인한 사상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었다. 볼테르와 루소는 출신 성분부터가 달랐다. 볼테르는 귀족 출신은 아니었지만 부유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게다가 그의 어머니는 귀족 취향을 즐기는 여성이었다. 사상적으로 때로 민중의 편에 서기도 했지만 볼테르는 어려서부터 상류층의 생활에 익숙했으며, 그 자신이 상류층이라는 사실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이것은 루소를 제외한 대부분의 계몽주의자들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간혹 민중의 대변자 역할을 했지만 그들 자신이 민중은 아니었다. 

반면에 루소는 가난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생계유지를 위해 밑바닥을 전전해야했던 진정한 '민중의 아들'이었다. 이런 그의 '존재'가 그의 '의식'을 치열하고 자유롭게 만들었다. 루소는 지식인의 정신적 독립은 물질적 독립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교회나 귀족 등 누구로부터 그 어떤 후원도 받지 않았다. 오페라 <마을의 점쟁>를 보고 감동한 루이 15세도 그를 불렀지만, 왕의 부름에 응하면 연금을 받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끝내 가지 않았다. 그리고 악보 필사와 글쓰기로 생계를 유지하며 평생 소박한 소시민의 삶을 영위했다.

볼테르와 루소 사이에 놓인 계급적 차이 그리고 이로 인한 사상과 예술관의 차이는 그들이 만든 작품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루소의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와 로시니에 의해 오페라로 만들어진 볼테르의 비극 <세미라미스>사이에는 프랑스어로 되어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공통점이 전혀 없다. 루소가 소박한 민중의 삶을 그린 새로운 오페라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을 때에도 볼테르는 이미 생기를 잃어가고 있는 고전비극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전제정치를 혐오하고, 교회의 위선을 비웃는 등 진보적인 사상을 가졌지만, 이상하게 예술에 있어서만큼은 보수성을 면치 못했다. 

 

시대의 반항아

 

프랑수아 M. A. 볼테르는 프랑스 파리에서 부유한 법원 관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파리의 교양 있는 상류층이었는데, 덕분에 그는 어려서부터 문화와 예술에 대한 감수성을 키울 수 있었다. 17살 때인 1711년 볼테르는 당시 관례에 따라 예수회 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학교에 다니면서 신앙심이 깊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반항아가 되었다. 젊은 시절 그는 글쓰기를 좋아하고 학구적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방탕하게 생활했다.

21살이던 1715년 볼테르는 파리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는 루이 14세가 죽고,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루이 15세를 대신해 오를레앙 공 필리프가 섭정을 할 때였다. 볼테르는 틈만 나면 귀족이나 왕족을 비웃는 글을 써서 이들의 미움을 샀는데, 그렇게 까불다가 어느날 필리프를 풍자하는 시를 썼다는 이유로 바스티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하지만 감옥에서도 그의 기개는 꺾이지 않았다.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오이디프스>라는 비극을 썼는데, 이것이 크게 성공을 거두면서 부와 명성을 얻었다. 

그 후에도 볼테르의 말과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러다가 또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1721년, 어떤 귀족에게 말대꾸했다는 이유로 그의 하인에게 늘씬 두들겨 맞은 것이다. 화가 난 볼테르는 다음 날 귀족에게 결투를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대신 불경죄로 또 다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때 그는 자신의 계급적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결국 그는 귀족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싼 '아랫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볼티르는 프랑스를 떠나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감옥에서 나온 볼테르는 영국으로 건너갔고, 3년간 머물면서 놀라운 경험을 했다. 프랑스보다 먼저 민주주의를 이룩한 영국은 모든 면에서 프랑스를 앞서가는 나라였다. 그는 의회나 언론이 왕을 서슴없이 비판하는 것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절대 군주가 지배하는 프랑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영국에서는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운 문화적으로도 프랑스를 앞서가는 나라였다. 극작가이기도 했던 볼테르는 세익스피어의 비극을 보고도 큰 충격을 받았다. 작품 자체는 마음에 안 들었지만, 연극을 공연하는 방식, 즉 무대장치와 연출의 역동성, 관객을 사로잡는 그 거친 에너지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에 비하면 프랑스 비극은 빛바랜 귀족 미망인과 같은 것이었다. 

 

비극의 발견

 

볼테르가 극작가로 활동하던 시기는 코르네유와 라신으로 상징되는 위대한 프랑스 고전비극의 시대가 이미 저문 뒤였다. 당시 비극 작가들은 고전비극의 규칙을 지키기에 급급할 뿐 시대에 맞는 새로운 창조력을 발휘하는 데에는 무능했다. 내용은 빈약하고 형식만 남은, 냉정하고 인공적인 허구의 세계만 반복해서 생산해내고 있었다. 

볼테르는 이렇게 무기력한 프랑스 비극에 생기를 불어넣고자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계몽주의자였던 그가 왜 당시 새롭게 태동하던 시민극에서 답을 찾지 않고, 이미 한물간 고전비극에 매달려나 하는 것이다. 고전비극은 지배 계급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주인공도 보통 사람이 아닌 신이나, 영웅, 왕후장상과 같이 특별한 신분의 사람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극은 식자층과 저잣거리의 사람들을 구별해주는 신분의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다. 

볼테르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소리 높여 외쳤지만, 적어도 정신적인 측면에서만큼은 스스로 상류층에 속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뼛속 깊이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하게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가 세익스피어의 비극 공연을 보고 크게 감동했으면서도 정작 작가인 세익스피어에 대해서는 "약간의 영감을 가진 야만인", "고상한 취미는 전혀 없으며 규칙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평가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고전비극의 관점에서 볼 때, 세익스피어의 비극은 허점투성이었다. 무엇보다 볼테르는 그의 비극이 고전비극의 형식을 따르지 않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전체적인 통일성이 부족한 것, 시의 운율을 무시하는 것, 비극에 희극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는 것도 눈에 거슬렸다. 그는 고전 비극의 규칙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고전비극의 대원칙인 '삼일치의 원칙'을 가능하면 지키려고 노력했다. 당대 프랄스 고전비극의 무기력함을 한탄했음에도 고전비극의 형식에 매달렸다. 비극에 관한 한 그는 개량주의자였지 혁명가가 아니었다. 소포클라테스와 라신만이 그의 진정한 우상이었던 것이다. 

볼테르는 비극에서 소재의 범위를 확대하려고 노력했다. 기존 고전극에서는 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가 배경이었는데, 그는 이것을 중국, 인도, 중동, 아메리카 등으로 넓혔으며, 비극의 원인도 연애뿐 아니라 종교적 광신이나 정치적 야심 등으로 다각화했다. 그리고 공연 때에는 화려한 장치나 의상을 사용하고, 유령의 등장과 같은 비일상적인 장면을 집어넣어 활기를 주려고 했다. 

볼테르는 일생 수십편의 비극과 희극, 소설을 썼다. 이중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분야는 비극인데, 모두 20편을 썼지만 그중 잘된 작품이라고 평가 받는 것은 1732년 작 <자이르>와 1743년 작 <메로프>뿐이다.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는 것은 1759년에 쓴 풍자소설 <칸디드>이다. 본인은 별로 심혈을 기울이지 않고 재비 삼아 썼다고 하는데, 오히려 이것이 지금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볼테르는 오페라 대본도 썼다. 당대 프랑스 최고의 작곡가 라모와 함께 <나바르의 왕녀>, <삼손>, <영예의 전당>과 같은 오페라를 만들었다. 볼테르가 이렇게 오페라에 관심을 보인 것은 오페라가 비극의 생명력을 강화시켜주는 장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중에 비극의 대항마로서 오페라의 역할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지만, 초창기에는 오페라가 그 장대함이라든가 강렬한 감정, 이국정서, 볼거리 등 모든 면에서 비극이 나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라모와 손잡고 오페라를 만들었던 것이다.

비록 오페라를 염두에 두고 쓴 작품이 아닐지라도 볼테르의 비극은 여러가지 점에서 오페라와 같은 특성을 지닌다. 그래서 그런지 19세기 초 많은 작곡가들이 볼테르의 비극을 오페라로 만들었는데, 그중 <자이르>는 무려 13편이나 나올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볼테르 원작의 오페라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로시니의 <세미라미테>와 <탄크레디>이다.

 

전설의 여왕 세미라미스

 

볼테르의 비극<세미라미스>는 1748년 작품으로 고대 아시리아 여왕 세미리미스의 전설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세미라미스는 아시리아의 샴시아다드5세의 아내이자 아다드

나라리3세의 어머니로, 세미라미스는 그녀의 그리스식 이름이다. 

묘지에 있는 비문에 따르면 그녀는 아다드 5세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아다드 니라리가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아시리아를 다스린 것으로 되어 있다. 통치 기간은 기원전 811년에서 808년으로 추정되며, 이는 헤로도토스 의 역사에서도 나온다.

그런데 세미라미스는 이런 역사적 사실보다 그녀를 둘러싼 전설로 더 유명하다. 세미라미스의 전설에는 몇 가지 버전이 있다. 그녀는 시리아의 여신 데르게토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갓난 아기일 때 버려져 비둘기에 의해 양육되었다. 성인이 된 후에는 아시리아의 왕 니누스의 눈에 들어 그의 아내가 되었으며, ㄱ와의 사이에서 아들 니니아스를 낳았다. 

그런데 니누스 왕이 화살에 맞은 상처가 덧나 죽고 말았다. 당시 세미라미스는 아주 젊었으며, 왕자 니니아스는 어린 아이였다. 아직 소년인 아들에게 거대한 제국을 맡길 수 없었던 그녀는 묘책을 생각해냈다. 터번을 쓰고 팔다리가 드러나지 않는 옷을 입고 아들 행세를 한 것이다. 당시 어린 왕자는 수염도 나지 않은 변성기 이전의 어린 소년이었기 때문에 이런 속임수가 가능했다. 게다가 니니아스의 얼굴이 어머니 세미라미스와 닮았기 때문에 누구도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다. 

절대 권력을 얻게 된 세미라미스는 남자 못지않은 패기와 열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정복 전쟁에 나서 이집트, 메디아, 리비아, 페르시아, 아라비아, 아르메니아를 손에 넣었고, 바빌론을 되찾은 다음 류프라테스 강변에 호사스러운 공중 정원을 지었다. 

이렇게 세상 여느 남자 못지 않은 업적을 세웠지만, 그녀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육체적 욕망을 억제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많은 남자와 잠자리를 했는데, 그중에는 자신의 아들 니니아스도 있었다. 그런데 욕정은 물론, 질투심도 강했던 것 같다. 궁에 있는 여자들이 자기 아들을 유혹할까봐 모두 정조대를 차게했다고 한다. 

42년간 통치하면서 시리아를 강국으로 만든 세미라미스는 아들 니니아스가 모반을 꾀한다는 사실을 알고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비둘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그런데 세미라미스의 죽음에 관해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세미라밋가 성인된 아들에 대한 욕정에 사로잡혀 아들을 침실로 불러들였고, 이에 분노를 느낀 아들이 그녀를 죽였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세미라미스가 수많은 남자와 잠자리를 하는 것을 보고 니니아스가 치욕감을 느낀 나머지 그녀를 죽였다는 설도 있다. 

한편 니누스 왕이 전쟁 중에 생긴 상처가 덧나 죽은 것이 아니라 세미라미스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남장 여왕, 남편 독살, 근친상간, 친모 살해 등 세미라미스를 둘런싼 다소 엽기적이면서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나중에 수많은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볼테르의 비극 <세미라미스>도 그중 하나이다.

 

볼테르의 비극<세미라미스>

 

15년 전, 세미라미스는 자기가 페위될 것이라는 아수르의 말을 믿고 그와 공모해 남편이자 왕인 니누스를 독살했다. 그녀가 남편을 독살하는 와중에 아들 니니아스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 후 그녀는 남편을 독살하고 아들을 잃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왔다. 정신적으로 너무 피폐해져 더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결국 왕관을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기로 한다. 아수르는 은근히 자기가 왕관을 물려 받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야심만만한 그는 왕비 세미라미스와 공모해 나누스를 죽인 후 여왕 옆에서 2인자로 권력을 누렸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삶에 싫증이 났다. 그는 더 강력한 힘을 원했다. 그러던 차에 여왕이 후계자를 정한다고 한 것이다.  

한편 이 무렵 스키타이 출신의 전사 아르사체가 여왕의 부름을 받고 바빌론으로 돌아온다. 아수르는 신전에서 아르사체를 발견하고 누구 마음대로 바빌론으로 돌아왔냐고 질책한다. 그러자 아르사체는 여왕의 부름을 받고 왔다고 답한다. 이 자리에서 아르사체와 아수르는 아제마 공주를 두고 말다툼을 벌인다. 아르사체는 전쟁터에서 아제마 공주를 구해주었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아수르는 아제마와 같은 왕족인 벨루스  가문 출신이다. 이것ㅇㄹ 빌미로 그는 자기가 아제마와 결혼해야한다고 우기는데, 사실 이것은 그녀를 사랑해서라기보다 왕족인 그녀와 결혼함으로써 자기 위치를 더욱 확고히 하려는 속셈에서 나온 것이다. 아르사체는 권력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며, 결코 아제마를 포기할 수 없ㄷ고 주장한다.

바빌론으로 돌아올 때 아르사체는 자기 아버지 프라다테 왕이 죽으면서 남긴 상자를 가지고 왔다. 프라다테 왕은 죽은 니누스 왕의 친구인데, 그 안에는 니누스가 죽어가면서 프라다테 왕에게 보낸 편지와 칼이 들어 있다. 프라다테는 유언으로 아르사체에게 이 상자를 바빌론의 제사장에게 보여주라는 말을 남겼다. 제사장은 상자 안에서 니누스 왕의 편지를 거내 읽는데, 편지에는 놀랍게도 니누스가 독살 당했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니누스 왕이 자신의 복수를 대신할 사람ㅇ로 아르사체를 지목했다는 것이다. 그 전에도 니누스 왕이 무덤 근처에서 복수를 해 달라는 유령의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 아르사체는 왜 하필 자기에게 그런 일을 시킬까 의아해한다.

한편 세미라미스는 깊은 슬픔에 빠져있다. 자기가 독살한 나누스의 영혼이 피투성이가 된 채 나타나 그녀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그러는 와중에 영혼이 그녀의 귀에 대고 '아르사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를 듣고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세미라미스는 전쟁터에서 아르사체를 불러들였던 것이다. 

드디어 세미라미스가 왕위 계승자를 선포하는 날이 되었다. 아르사체는 세미라미스에게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하지만 절대로 아수로 왕으로 섬길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 말에 세미라미스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그를 안심시킨다.그리고 모두가 있는 앞에서 앞으로 이 나라의 왕은 아르사체이며, 그가 자기의 남편이 될 것이라고 선포한다.

그 말을 듣고 모두가 놀라는 순, 땅이 진동하고 천둥 번개가 친다. 그리고 무덤에서 죽은 왕 니누스의 유령이 나타난다. 유령은 아르사체가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와 함께 자기를 죽음으로 몰고간 자에 대한 응징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유령은 아르사체에게 그 죄인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한다. 

그 이후 아르사체는 대제사장으로부터 자신의 출생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듣게 된다. 아르사체가 바로 니누스 왕이 죽은 후 사라진 왕자 니니아스라는 사실이다. 니누스가 죽어가면서 보낸 편지에는 "나는 독으로 죽어간다. 내 아들을 저 죄 많은 아내로부터 보호해 주기를"이라고 쓰여 있다. 

편지를 읽고난 아르사체는 자기 앞에 놓인 가혹한 현실에 전율한다. 그리고 아수르에게 복수할 것을 맹세한다. 그렇다면 어머니인 세미라미스는 어떻게 할까? 아르사체는 세미라미스에게 가서 니누스의 편지를 보여준다. 남편으로 지목한 아르사체가 사실은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여왕은 용서를 빈다. 죄책감에 싸여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죄 많은 어미를 죽여달라고 간청한다. 하지만 아르사체는 자기는 여전히 그녀의 아들이고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한편 왕위를 아르사체에게 빼앗긴 아수르는 아르사체가 니누스의 무덤을 찾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를 죽이고자 니누스의 무덤으로 스며든다. 그러자 이 사실을 안 세미라미스가 아들을 구하기 위해 무덤으로 간다. 아르사체 역시 아버지 니누스 왕이 남긴 복수의 칼을 들고 무덤으로 간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아수르를 칼로 찌른다. 아버지 대신 복수에 성공한 그는 온몸에 피를 묻힌 채 밖으로 나온다. 아제마는 이제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기분으로 나라를 통치하라고 위로한다. 그런데 바로 그때 눈앞에 아수르가 나타난다. 아수르는 아르사체를 비웃으면서 칼에 찔린 사람이 누군지 보라고 말한다. 그가 찌른 사람은 아수르가 아니라 세미라미스였던 것이다. 세미라미스스는 자기의 운명을 받아들인다고 말하고 죽는다. 대제사장이 신들에 의해 정의가 실현되었으니 신을 두려워 하라는 말을 하는 가운데 극이 끝난다.

 

센세이션에 집착하다

 

예절과 명예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볼테르는 이작품의 결말을 두고 고민했다. 아들이 어머니를 죽이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인륜을 저버리는 일로 생각되었다. 고전비극의 신봉자인 그에게 아들이 어머니를 죽이는 '상스러운 행동'은 고상하지 못한 것이고, 비극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어머니를 죽이는 것과 아들이 후회하고 있는 어머니를 용서하는 것 사이에서 고민하던 볼테르는 결국 이 문제를 아들이 실수로 어머나를 죽이는 것으로 해결했다. 신이 '아들의 실수'를 무기로 정의를 실현한 것으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볼테르는 비극을 쇄신해야할 필요를 인정했으면서도 편협한 취향과 창조성의 부족으로 이를 실현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창조성의 부족은 <세미라미스>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 작품은 기존에 있는 소재의 짜깁기 같은 인상을 준다. 어딘가에 살아 있는 아들에 대한 모성은 크레비용의 <세미라미스>을 연상시키고, 니누스의 유령이 나타나 아들에게 복수를 당부하는 것, 아들에게는 자기 어머니를 직접 응징하지 말라는 것은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영상시킨다. 아들과 어머니의 결혼은 고대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와 비슷하고, 연인과 결탁해 남편과 왕을 죽이는 것 역시 그리스 비극 <엘렉트라>와 비슷하다. 왕을 죽이고 죄책감에 늘린 나머지 죽은 자의 환영을 보는 장면은 세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생각나게한다. 

그런가 하면 볼테르는 비극 작가로서 가장 중요한 능력, 등장 인물의 심리 묘사 능력도 부족했다. 그 부족함을 그는 자극적인 무대 효과로 메우려고 했다. 관객에게 잘 보이려고 온갖 잔재주를 다 부렸으니, 무대 위에 유령을 등장시키고, 땅이 흔들리고 천둥 번개가 치는 장면을 즐겨 연출하곤 했다. 자극적인 장면을 위해서는 평소 금과옥조처럼 여겼던 고전비극의 원칙들도 과감히 무시했다. 고전주의의 외형만 지켰을 뿐, 어떤 경우에도 센세이션을 일으키려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세미라미스> 초연이 얽힌 일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당시 그가 가장 공을 들인 장면은 바로 무덤 속에서 니누스의 유령이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무대에 관객이 너무 많이 앉아 있어서(당시 무대에 귀족을 위한 자리가 있었다)니누스 역을 맡은 배우가 자칫 관객들의 발에 걸려 넘어질 지경이었다. 보다 못한 볼테르가 "유령에게 길을 비켜줘!"라고 소리쳤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로시니의 오페라세리아<세미라미데>

 

볼테르가 <세미라미스>를 발표한지 50여 년이지난 1823년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로시니가 오페라 <세미라미데>를 작곡했다. 로시니는 오페라부파와 오페라세리아 분야에 두루 작품을 남겼는데, 볼테르의 비극을 바탕으로 쓴 <세미라미데>는 오페라세리아에 속한다.

로시니가 쓴 오페라의 대본은 대체로 볼테르의 원작을 따르고 있다. 다만 등장인물에 약간 차이가 있다. 볼테르의 원작에는 세미라미스의 시녀 오타네스가 나오지만, 오페라에서는 오타네스가 빠지고 대신 원작에는 없는 인도 왕 이드레노가 나온다. 이드레노를 제외한 나머지 등장인물들은 원작과 같다. 

막이 오르기 전에 먼저 서곡이 연주된다. 오페라 서곡은 대개 그 오페라의 분위기를 암시한다. 서곡만 들어도 그 오페라가 인간과 신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다룬 비극인지, 감미롭고 애처로운 사랑 이야기를 담은 멜로드라마인지, 풍자와 해학이 흘러넘치는 코믹물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세미라미데>는 이런 전제를 무시한다.이 오페라의 서곡을 듣고 있으면 막이 오른 후 무대에 펼쳐질 이야기가 무겁고 어두운 비극이라는 사실을 전혀 짐작할 수 없다. 로시니의 오페라부파인 <세비야의 이발사> 서곡처럼 익살맞고, 부드러우며, 가벼운, 이른바 '로시니표 서곡'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 안에 마치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듯 오페라를 써댔던 로시니는 미리 작곡한 서곡을 이 오페라 저 오페라 가져다 쓰는 경우가 많았다. 이럴 경우 서곡이 오페라의 분위기 와 맞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세미라미데> 서곡은 다르다. 오페라에 나오는 멜로디를 바탕으로 새로 작곡했기 때문이다.

서곡은 조용한 북의 울림으로 시작한다. 그런 다음 현악기들이 작은 음 조각을 익살스럽게 연주한다. 이것이 여러차례 반복되면서 점차 음량이 확대되는 로시니 크레센도가 등장한다. 그런 다음 호른이 목가풍의 서정적인 노래를 연주하고, 이어서 목관악기들이 현악기의 피치카토 반주에 맞추어 같은 멜로디를 반복한다. 오페라의 1막 피날레에 나오는 멜로디이다. 그런 다음 바이올린이 요정의 휘파람소리 같은 가벼운 멜로디를 연주한는데, 이는 오페라의 2막 피널레에 나오는 멜로디에서 따온 것이다. 뒤로 갈수록 음악은 더 코믹해지고 템포는 정신없이 빨라진다. 막이 오르면 비극의 주인공 세미라미데가 아니라 <세비야의 이발사>의 피가로나, <라 체레넨톨라>의 돈 마니피코가 등장해 호들갑을 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아르사체의 귀환

 

그러나 막이 오르면 무대 위에서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1막의 첫 무대는 바알 신의 신전이다. 대제사장 오레오가 바알 신전에서 신을 찬양하고, 바빌론의 엄숙한 임무를 일깨우는 노래를 부른다. 신전에서는 사람들이 여왕 세미라메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오늘 이 신전에서 세미라미데가 자기 뒤를 이어 왕관을 물려받을 사람을 발표하기로 되어 있다. 아수르는 은근히 자기가 왕위를 물려받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지만, 세미라미데의 마음속에는 다른 사람이 있다. 바로 아르사체이다. 그런데 세미라미데가 후계자의 이름을 말하려는 순간 갑자기 유령이 나타난다. 오케스트라가 무거운 음향을 연주하는 가운데 유령이 "멈추어라. 아직 말하지 말라"고 말한 후 사라진다. 갑작스러운 유령의 출현에 모두가 놀라고, 후계자를 지명하는 일은 뒤로 미루어진다. 장면이 바뀌어 이제 막 전쟁터에서 돌아온 아르사체가 등장한다.

아르사체는 바빌론에 돌아온 것을 기뻐하는 <마침내 바빌론에 다시 왔구나>와 아제마에 대한 사랑을 그리는 <아! 그 기쁘고 행복한 날을>을 부른다.

그때 아수르가 들어오 아르사체와 아제마에게 대한 사랑을 놓고 서로 언쟁을 벌인다. 그다음 장면은 인도 왕 이드레노가 아제마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사실 이드레노는 볼테르의 원작에는 없는 인물로, 오페라에서 유일한 테너이다. 아마 아름다운 테너 아리아를 들려주려고 일부러 집어넣은 것으로 보인다. 이드레노의 고백을 들은 아제마는 그에게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는 듯한 말을 하고, 그 말을 들은 이드레노는 <아! 내 라이벌이 어디 있습니까?>라는 아름다운 아리아를 부른다. 이렇게 아름다운 아리아의 향연은 세미라미데가 아르사체가 돌아온 것을 기뻐하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희망의 빛이>로 이어진다. 오페라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이다.

그 후 세미라미데는 멤피스의 전갈을 받는다. 멤피스가 보낸 두루마리에는 아르사체를 왕으로 맞으라고 쓰여 있다. 그 명령에 따라 세미라미데는 후계자를 선포하기로 한다. 세미라미데는 아르사체, 아수르, 대제사장, 아제마를 비롯한 대신들이 있는 자리에서 누구를 지명하든 자기 선택에 복종하라고 명한다. 이 대목에 나오는 멜로디는 서곡에서도 쓰였다. 

세미라미데는 왕위를 이을 후계자로 아르사체를 지목한다. 이 말에 모두 놀라는데, 바로 그 순간, 무서운 소리와 함께 죽은 왕 니누스의 유령이 나타난다. 유령 역을 맡은 베이스는 무거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아르사체! 네가 다스릴 것이다. 그러나 죄를 지은 자는 벌을 받아야

한다. 용기를 가져라. 그리고 내 무덤으로 내려오너라. 거기서 너는

내 유골에게 제물을 바쳐야 한다. 대제사장의 지혜에 따르도록 하라. 

네 아버지를 생각하라. 내 아들아. 내 아들이 해야할 임무에 너 자신을 바쳐라.

 

1막은 유령의 출현으로 공포에 떠는 등장인물들의 중창과 합창으로 끝난다.

 

출생의 비밀과 복수

 

이어지는 2막은 세미라미데와 아수르의 갈등으로 시작한다. 아수르가 아르사체를 루계자로 지명한 것을 놓고 따지자 세미라미데는 당당한 목소리로 <목숨이 아깝거든 물러가라>를 부른다. 그러자 아수르는 니누스 왕을 독살한 밤을 상기시키며 두 사람이 공범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내용적으로 보면 싸움이지만, 여기서 두 사람은 힘찬 아리아를 서로 주고 받으며 노래한다. 장면은 바뀌어 신전 안이다. 대제사장은 아르사체에게 니누스 왕이 죽어거면서 쓴 편지를 보여준다.

 

나는 죽어간다. 내 아들 니니아스가 나와 같은 운명에 처하지 않도

록 구해다오. 그래서 언젠가 나를 위해 복수하도록 해다오.  아수르와

부정한 내 아내가 배반자다.

 

편지를 읽고난 아르사체는 자기 앞에 놓인 가혹한 현실에 전율한다. 그리고 <이 가혹한 폭로로>라는 아리아를 부른다음 아수르에게 복수할 것을 맹세한다.

한편 아제마는 아르사체가 세미라미데의 남편이 된다는 사실에 괴로워 한다. 이드레노는 세미라미데가 아르사체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자리에서 이미 여왕으로부터 아제마와 결혼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아직도 아제마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이드레노는 또다시 <그것은 내 영혼의 가장 달콤한 꿈이었지요>라는 아름다운 테너 아리아를 들려준다.

이어 급박한 오케스트라 소리와 함께 세미라미데와 이르사체가 등장한다. 세미라미데는 아르사체가 자기를 피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 이유를 따져 묻는다. 결국 아르사체는 자기가 그녀의 아들 니니아스라는 사실을 밝힌다. 그 말레 세미라미데는 경악한다. 그러면서 자기를 죽여달라고 한다. 하지만 아르사체는 "진정하시오, 가엾은 여인. 당신이 내 마음을 찢어놓는군요."라고 어머니를 위로하고, 세미라미데는 "울고 있느냐? 너의 고결한 마음이 아직도 나를 불쌍히 여기는구나."라고 대답한다. 이렇게 해서 간단히 세미라미데를 용서한 아르사체는 그녀와 함께 아름다운 이중창 <공포의 날 그리고 기쁨의 날>을 부른다. 

이 장면을 보면 모든 것이 아름답게 해결되는 듯 보인다. 이제 아수르만 해치우면 끝나는 것이다. 아르사체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니누스의 무덤으로 내려온다. 이 장면의 전주곡으로 서곡 후반부에 나왔던 멜로디가 나온다. 무대 위에 펼쳐지는 장면은 으스스 하지만 음악은 가볍고 명랑하다. 그때 아르사체가 <정말로 어두운 밤이구나>를 부른다. 곧이어 아르사체를 죽이려고 아수르가 들어오고,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세미라미데가 들어온다. 세 사람이 각자의 심정을 토로하는 삼중창을 마지막으로 부른 다음, 아르사체가 대제사장의 명령에 따라 아수를 칼로 찌른다. 

하지만 그가 찌른 것은 아수르가 아닌 세미라미데, 어둠 속에서 그만 실수로 어머니인 세미라미데를 찌른 것이다. 오페라는 대제사장이 "복수가 끝났다" 하고 외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아르사체는 어머니를 용서했지만 신을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아들 손에 죽게 함으로써 세상에서 가혹하고 냉험한 방법으로 정의를 실현한 것이다.

 

<세미라미데>의 음악>

 

음악사에 로시니는 낭만주의 작곡가로 분류된다. 하지만 <세미라미데>를 듣고 있으면 이것이 과연 낭만주의 오페라인가 하는 의문을떨쳐버릴 수 없다. 낭만주의 예술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의 감정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오페라 역시 극적인 리얼리티가 있어야 한다. 줄거리가 비극이면, 이에 걸맞는 '피 끓는' 음악이 따라와야한다. 

하지만 <세미리미데>는 그렇지 않다. 이 오페라는 서곡부터 우리의 기대를 배반한다. 그 밝고 경쾌한 음악은 오페라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앞으로 비극이 전개될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후에 나오는 음악도 그렇다. 서로 반목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같은 멜로디를 공유하고, 심지어 화음을 맞추어가며 사이좋게 이중창을 부르기도 한다. 아제마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아수르와 아르사체의 피 튀기는 설전에서도 음악 그 자체는 그다지 전투적이지 않다. 죽은 왕의 유령이 등장하는 무서운 장면에서도 세미라미데는 우아하게 아리아를 부르고, 유령의 등장으로 조성되어야 할 공포 분위기는 등장인물의 심정을 드러내는 아리아의 나열로 잠시 유보된다. 음악을 위해서라면 극적인 긴장감 정도는 얼마든지 희생시키는 것이다.

<세미라미데>의 등장인물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역할에 완전히 몰입하지 않는다. 슬프거나 분노에 차 있을 때에도 품위를 지킨다. 아무리 극한 상황에 처해도 절데로 '망가지지 않고', 수많은 음표로 장식된 멜로디를 정교하고 정확하게 노래한다. 그래서 살아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능숙한 예술가의 손길로 다듬어진 조각품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극적으로 절절한 음악을 기대했던 사람은 실망할 수밖에 없다.

비록 비극이지만 그 안에 절절한 드라마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이런 불만은 다분히 낭만주의적인 시각에서 나온 것이다. 로시니가 작곡가로 활동할 당시, 이탈리아는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를 휩쓸었던 낭만주의 운동의 흐름에서 약간 벗어나 있었다. 이탈리아는 오페라의 발생지임에도 새로운 요소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비교적 소극적인 편이었다. 이것은 오래전부터 오페라에 이탈리아 사람들의 일상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페라가 너무나 일상화되어 있던 탓에 작곡가들이 청중의 주위를 끌기 위한 모험이나 새로운 시도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탈리아 오페라에는 낭만적인 요소가 점진적으로 매우 느리게 침투했고, 그 정도가 독일이나 프랑스보다 심하지 않았다. 19세게에 들어와서도 오페라세리아와 오페라부파의 구분이 상당 기간 유지 되었는데, 이 시기에 활동한 로시니도 이런 구분에 기초해서 오페라를 썼다.

 

바로크 판타지에 대한 향수

 

음악사에서는 로시니를 편의상 낭만주의 작곡가로 분류하지만, 정작 그는 자신의 음악적 이상을 바로크 오페라에 두었다. 바로크 오페라의 목표는 무대 위에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판타지를 펼치는 것이었다. 그 시대에는 오페라가 현실을 '묘사'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신, 영웅, 왕, 귀족이 아닌 장삼이사의 일상을 무대 위에 올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페라의 발생 자체가 그대 그리스 비극의 재현에서 출발했으니, 이런 현상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로시니는 자신의 오페라를 통해 바로크 오페라와 같은 판타지를 보여주고 싶어했다. 이것은 그가 오페라의 주요 배역에서 남장 여가수를 기용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세미라미데>의 주인공 아르사체 역할이 바로 그런 것이다. 아르사체는 남장을 한 알토나 메조소프라노가 부르는데 이걱을 '바지' 역할이라고 한다. 바로 여기서 로시니의 카스트라토에 대한 향수를 엿볼 수 있다. 바로크 오페라에서 신이나 영웅 같은 중요한 역할을 남성 거세 가수인 카스트라토가 맡았다. 변성기 이전에 거세를 해서 어른이 되어서도 높은 음을 낼 수 있는 카스트라토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소리를 냈다. 이런 성별의 모호함이 오페라의 '판타지'를 더욱 풍성하게 하게했다. 로시니 오페라의 바지 역할은 이런 바로크적 판타지에 대한 향수였던 것이다.

 

로시니는 음악을 다른 어떤 장르의 예술보다 우위에 놓았다. 특성상 현실을 '묘사'할 수밖에 없는 건축, 조각, 그림보다 추상 예술인 음악이 한수 위라는 것이다. 이런 로시니의 생각은 그의 오페라에서도 드러난다. 그의 오페라에 나오는 음악들은 현실을 '묘사'하지 않는다. 오늘날 낭만주의자들이 로시니의 오페라를 보며 극적 리얼리티가 떨어진다고 불평하는 걱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측면이 있다. 로시니는 음악에 극적인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추상예술로서의 음악의 품위와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로시니의 예술관은 고전비극에 대한 볼테르의 생각과 일맥 상통한다. 비극의 대사에 나오는 단어들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단어와 다르다. 예를 들어 '하늘'은 '창공' , '생각'은 '사고'와 같은 식으로 표현한다. 낭만주의의 선두주자인 빅토르 위고가 <에르나니>를 발표했을 때, 고전주의 옹호자들이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대사가 일상적인 언어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정이 다 되어간다는 말은 '시간이 그의 마지막 종착지를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가 아니고,' '곧 자정이 될겁니다'라고 평범하게 표현하는 것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로시니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오페라에서 가사나 단어의 의미를 음악으로 리얼하게 묘사하는 것은 곧 비극에 평범한 일상의 언어를 도입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가사는 노래를 얹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음악은 자기 자신의 법칙에 따라 흘러가야하고, 가사는 그저 안내해주는 정도에 그쳐야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오페라에서 가사가 슬플 수도 있고, 기쁠 수도 이;ㅆ고, 무서울 수도 있는데. 작곡가가 일일이 가사에 신경을 쓰다보면 음악의 자율성이 훼손되고, 표현력도 크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극적인 표현보다 노래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성악예술의 극단적 탐미주의를 벨칸토라고 한다. 벨칸토는 17, 18세기 이탈리아 오페라를 지배하는 개념이었는데, 정작 이 말이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벨칸토 오페라가 황혼기에 접어든 19세기 초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격조 높은 슬픔의 향연

 

볼테르의 ,세미라미스>는 1748년 작품이고, 이를 바탕으로 만든 로시니의 <세미라미데>는 그로부터 75년 후인 1823년 작품이다. 시대와 장르는 다르지만, 내용의 비일상성과 표현 방식의 전형화라는 측면에서는 비슷한 면이 있다. 두 사람 다 비극의 소재는 일상생활에서는 볼 수 없는 굉장한 것, 영웅적이고, 역사적이고, 신화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작품 속의 인물들은 준엄한 신의 심판, 잔인한 운명, 역사의 사명, 인간으로서의 도리, 금지된 사랑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행동에는 절제와 품위가 있다. 어떤 정형화된 규칙에 따라 연기하고, 노래를 부른다. 그렇게 함으로서 관객들로 하여금 무대 위에 펼쳐지는 세계가 자기들이 속한 세계와 완전히 다른 세계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관객들은 일상의 언어와 다른 억양으로 말하는 신들과 왕, 귀족들의 격조 높은 슬픔에 감탄하고, 신기에 가까운 기교로 정교하게 슬픔을 승화시키는 가수들을 경탄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 호사스런 비극의 향연은 예술이 절대로 일상의 '묘사' 가 아니라 사실을 깨유쳐준다. 

볼테르가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지난 1830년, 프랑스의 빅토르 위고는 희곡 <에르나니>를 발표하면서 낭만주의의 문을 열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시작된 낭만주의 바람은 멀리 이탈리아에까지 퍼져나갔다. 하지만 이 무렵 로시니는 오페라와 작별했다. 그는 1829년 <윌리엄 텔>을 끝으로 더 이상 오페라를 쓰지 않았다. 그리고 남은 여생을 식도락과 같은 취미 생활을 즐기며 살았다. 로시니는 왜 더 이상 오페라를 쓰지 않았던 것일까. 음악적 이상이었던 벨칸토의 쇠퇴와 함께 자신의 시대도 막을 내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상적으로나 기법적으로 낭만주의를 받아들일 엄두가 안 났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