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의 문학 오페라

자연주의를 오페라에 담다

운우(雲雨) 2022. 2. 24. 13:06

륄리와 자연주의를 오페라에 담다

장자크 루소의 오페라(마을의 점쟁이)

 

프랑스 혁명으로 단두대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은 마리 앙투아네트는 15살 때 프랑스로 시집왔다. 그리고 19살의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프랑스 궁정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그중 그녀를 가장 불편하게 한 것은 바로 사람들의 눈이었다. 프랑스 궁정에서는 모든 일상이 사람들에게 공개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옷을 입는 것도, 식사를 하는 것도, 죽는 것도, 심지어는 아이를 낳는 것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해야했다. 

사람들의 시선에 지친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궁 외곽에 자신만의 도피처를 만들었다. 루이 16세는 왕으로서의 의무를 해야했지만, 왕비는 이런 의무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 때마다 도망쳤다.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프티 트리아농 궁에 시골집을 짓고 닭과 염소, 양을 기르며, 루소의 자연주의를 몸으로 실천했다. 그리고 어린 딸에게도 소박한 삶의 행복을 가르쳤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음악을 좋아했다. 하프를 줄겨 연주했으며, 노래도 곧잘 불렀다. 오페라를 좋아해서 요즘 젊은이들이 유행가를 따라 부르듯이 오페라 아리아를 흥얼거렸다. 또 틈만 나면 베루사유에서 파리까지 오페라를 보러 가곤했다. 그러다가 자기만의 극장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트리아농의 은밀한 곳에 작은 극장을 만들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 극장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780년 6월 1일, 그때부터 그녀는 자기가 좋아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여 함께 놀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객석에 앉아 구경하는 것보다 직접 무대에 서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왕의 동생인 프로방스 백작도, 절친한 친구인 폴리냑 백작 부인도 모두 배우나 가수가 되어 무대에 섰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맑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노래도 곧잘 불렀다고 한다. 뛰어난 솜씨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음정에 맞게는 부를 줄 알았다는 것이다. 무대에서는 주로 하녀나 시골처녀같은 미천한 역을 했는데, 왕비로서의 온갖 의무와 격식에 지쳐있던 그녀에게 일종의 해방구였던 셈이다. 

트리아농의 후미진 작은 극장에서 펼쳐진 마리 앙투아네트의 '하인놀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은 장 자크 루소의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였다. <마을의 점쟁이>는 1752년 10월 18일 퐁텐불루 궁전에서 초연되었으며, 1753년 3월 팔레루아얄에서도 공연되어 크게 인기를 끌었다. 공연을 본 루이 15세는 음치였음에도 첫 장면에 나오는 콜레트의 아리아를 하루 종일 흥얼거렸다고 한다. 

1770년,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의 결혼식에서도 이 오페라가 공연 되었다. 음악의 도시 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마리 앙투아네트는 분명 당대에 유행하던 오페라를 많이 보았을 것이다. 오페라 중에서는 글루크의 작품을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루이 16세와의 결혼식에 공연된 루소의 <마을의 점쟁이>는 그녀가 이제까지 보아왔던 오페라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신이나 왕이 아닌 양치기가 주인공이었으며, 무대장치와 음악도 소박하고 단순했다. 그동안 궁정문화의 금빛 과용에 지쳐 있던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이것이 얼마나 신선한 충격이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음악가가 되기를 열망했던 루소

 

장 자크 루소(1712년 ~1778년)는 <사회계약론>, <에밀>을 쓴 계몽주의 사상가로 유명하지만, 그가 오페라를 작곡했다는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유명해지기 전은 물론, 유명해진 후에도 루소는 늘 천부적인 재능과 체계적인 훈련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 장르를 기웃거렸다. 음악에 대한 열망은 하늘로 치솟을 듯 높았으나 불행히도 환경이 이를 뒷받침해주지 못했다. 

루소는 1712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13살 때 기술을 익히려고 조각공인 아벨 뒤코맹의 견습생으로 들어갔지만, 작업장의 억압적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16살 때 도망쳤다. 그후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밑바닥 생활을 하다가 17살 때 후원자인 바랑 부인을 만나 안느 시에 정착했다. 그리고 서른 살 무렵까지 바랑 부인의 후원 아래 거의 백수 생활을 했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시작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바랑 부인은 훌륭한 목소리의 소유자로 노래를 잘 불렀으며, 하프 시코드도 연주할 줄 알았다. 루소는 그녀로부터 노래를 배웠다. 루소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당시 그의 실력은 찬송가를 겨우 부를까 말까할 정도였다고 한다. 계명창은 커녕 음표나 박자, 악상기호 같은 것도 잘 몰랐다. 그럼에도 속수무책으로 음악에 끌렸다. 바랑 부인의 주선으로 신학교 기숙사에 들어갔을 때도 그가 갖고 간 유일한 책은 음악책이었다. 당시 그가 음악에 기울인 노력은 그야말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변조가 뭔지, 장단이 뭔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피나는 연습으로 <알페와 아래튀즈>의 첫번째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를 정확히 읽고 부르게 될 정도였다.

바랑 부인은 루소가 음악에 열정과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파리 출신의 작곡가이자 성가대 학교의 악장인 르 메트르에게 보냈다. 루소는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며 음악에 푹 빠져 살던 이 시절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로 기억한다. 특히 그는 르 메트르가 자기를 위해 지어준 짤막한 독주곡을 연주하고자 리코더를 들고 단상 위 오케스트라로 자라 잡으러 갈 때의 자부심을 잊지 못했다.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정말 정말 음악가가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바랑 부인이 집에서 잠시 나와 있는 동안 루소는 음악에 대한 짧은 지식과 일천한 경험을 바탕으로 음악가 행세를 했다. 이때 '보소르드빌뇌브'라는 가명을 썼다. 스스로 고백한 대로 아주 간단한 유행가도 악보로 옮길 줄 모르면서 작곡가라고 떠벌리고 다녔으며, 심지어는 제자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바랑 부인의 집으로 들어간 후에는 완전히 음악에만 매달렸다. 이것을 루소는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한 가지 취미가 점점 커져서 이윽고 나의 모든 취미들을 흡수해버

렸다. 그것은 바로 음악이었다. 정녕 나는 이 예술을 위해 세상에 태

어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어릴 때부터 이 예술을 좋아해서 변함없이 

이 예술만을 사랑했다. 놀라운 것은 내가 이것을 위해 태어났건만 이

것을 배우는 데 그토록 힘이 들었고, 또 성과를 거두는 것도 더뎠다는 

것이다. 평생을 두고 연습했음에도 악보를 보고 그 자리에서 그것을

정확하게 부르는 경지에는 결코 이르지 못했다.

 

음악가가 되려면 천부적인 재능과 함께 어려서부터 음악적 감수성을 키우기 위한 체계적인 훈련을 받아야 한다. 특히 음에 대한 직관적 감수성은 마치 언어와 같아서 어린 시절에 형성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루소는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나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시길ㄹ 음악과 무관한 환경에서 보냈다. 청년이 되어 음악에 때 늦은 열정을 불태우며 그 시간을 만회하려고 눈물겨운 노력을 기울였으나 한계가 있었다. 음악은 노력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보법의 고안여러 지역에서 

 

루소가 음악에 대한 열정과 능력 사이의 괴리를 메욱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던 시절, 프랑스에서 가장 잘 나가는 작곡가는 장 필리프 라모(1683~1764)였다. 라모는 프랑스 국민오페라와 발례 양식을 발전시키고, 근대 호성학의 기초를 확립한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1683년, 프랑스 디종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디종 성당의 오르간 주자였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라모는 여러 지역에서 오르간 주자로 일하다가 1722년 그전까지 내려오던 음악 이론과 작곡의 실제를 하나의 통릴된 체계로 정리한 ,화성론>, <음악 이론의 신세계>라는 음악 이론서를 펴냈다. 이것을로 라모는 뛰어난 음악 이론가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1727년부터 라모는 극 음악 양식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1732년에 첫 번째 오페라 <이폴리트와 아리시>를 발표했다. 루소가 다른 모든 취미를 버리고 오로지 음악에 전념하기로 결심한 바로 그해였다. 

루소는 부족한 음악 이론 부족을 만회하려고 라모의 <화성론>을 읽었다. 하지만 라모의 화성학 이론은 루소에게 "매우 길고, 장황하고 산만해서 연구하고 정리하는 데 상당히 많으 시간이 필요한"책이었다. 

그럼에도 음악에 대한 집념만큼은 가상했다. 그는 바랑 부인을 설득해 매월 한 번씩 가정음악회를 열도록 했다. 그리고 한 달 내내오로지 음악회 준비에만 매달렸다. 연주자와 악기를 모으고, 악보를 준비했으며, 각 악기를 위한 파트 보를 만들었다. 악보 필사는 그에게 그다지 낯선 일이 아니었다. 전에도 아는 사람의 부탁으로 악보 필사를 한 적이 있고, 나중에는 이것이 생업이 되었다. 

그런데 악보 필사는 그다지 창의적인 일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일 자체는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지칫 한눈을 팔면 틀린 음을 그려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일까. 루소는 음표와 쉼표, 옥타브, 소절, 박자, 장단을 한 번에 표현할 수 있는 숫자 악보를 창안했다. 그리고 1742년 이 획기적인 기보법을 출세의 발판으로 삼으려고 바랑 부인 곁을 떠나 파리로 갔다.그리고 그해 8월에 파리 과학 아카데미에서 자신의 새로운 기보법을 발표했다. 

그런데 심사를 맡은 과학아카데미 회원들은 루소가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어설픈 논리로 이것을 새로운 발명품으로 인정하기를 거절했다. 기보법에 대해 단 한 사람만 설득력 있는 비판을 했는데, 그가 바로 프랑스 최고의 작곡가 라모였다. 라모는 루소의 숫자 악보가 매우 훌륭한 고안품이지만, 머리를 써서 이해해야하기 때문에 실제 연주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얘기했다. 전통적인 악보는 음의 높이와 길이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연주자들이 즉각 연주로 옮길 수 있지만, 루소의 숫자 악보는 머리로 '이해해야' 하므로 연주 실행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라모의 타당한 비판을 듣고 루소는 과학아카데미 회원들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학식을 쌓은 사람보다 어느 한 분야에 깊이 지식을 쌓은 사람이 훨씬 설득력 있는 논리를 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닭았다. 과학아카데미로부터 숫자 악보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루소는 이듬해인 1743년 자신의 고안을 자세하게 설명한 <프랑스 현대음악론>을 발표했다. 그리고 같은 해 베니스 주재 프랑스 대사인 몸테귀 백작의 비서 자격으로 이탈리아 베니스로 갔다. 베니스에 있는 동안 루소는 이탈리아 음악에 매료되었다. 운하를 오가는 곤돌라 뱃사공의 노래를 들으며 감탄했고, 오페라 극장에서 울려 퍼지는 달콤한 이탈리아 아리아에서 지상의 천국을 경험했다. 이때부터 루소는 이탈리아 음악의 광신도가 되었다.

 

오페라 작곡에 도전하다

 

1745년, 루소는 오페라 작곡에 도전했다. <사랑의 시신>이라는 작품이었다. 그는 이것을 음악계 최고 실세인 라모가 들어주기를 원했다. 라모는 마지못해 허락했지만, 음악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는 사람이 좋은 작품을 썼을리 없다는 말을 계속 반복했다. 서곡을 듣자마자 그는 이것이 루소의 작품이 아니라는 반응을 보였다. ㄱ리고 중간에 더러 훌륭한 대목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음악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 쓴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기복이 심한 것은 루소도 인정했다. 규칙을 벗어난 것부터 고상한 것, 아주 평범한 것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들이 뒤섞여 있었다. 오페라를 듣고 라모는 루소를 쟂도 없고 취향도 없는 보잘것 없는 표절 작가라고 매도했다. 평소 오만하고 화를 잘 냈던 라모는 살롱에서 이런 종류의 무례한 행동을 일상적으로 했다고 전해진다. 아무튼 루소가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사랑의 시신들>은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1745년, 루소는 볼테루가 대본을 쓰고 라모가 음악을 작곡한 코메디 발레 <나바르의 왕녀> 개정 작업을 맡게 되었다. 평소에 이 작품이 따분하다고 생각한 볼테르는 이것을 1막으로 줄이고 <라미르의 향연>이라는 제목으로 바꾸어 다시 공연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당시 볼테르는 롤ㄴ에서 라모와 함께 <영예의 전당>이라는 오페라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루소가 대신 그 작업을 맡게 되었다. 루소는 원작자인 볼테르에게 대본 수정을 허락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으며, 곧 볼테르로부터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답장을 받았다. 개정 작업에서 루소는 라모로부터 자기가 만든 아리아를 망쳤다는 비난을 받지 않으려고 음악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기존의 것을 그대로 놓아둔 채 서로 동떨어져 있는 곡들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주는 레치타티보를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기존에 없던 서곡도 새로 작곡했다. 이렇게 해서 루소의 손을 거친 <라미르의 향연>이 무대에 올랐는데, 루소의 말에 의하면 청중들은 라모가 작곡한 부분과 루소가 작곡한 부분을 구별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라모는 딜레탕트에 불과한 루소가 자기와 동급의 작곡가로 취급받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공연 안내 책자에는 대본을 쓴 볼테르의 이름만 싣고, 작곡가인 자기 이름과 루소의 이름은 넣지 않았다. 루소와 나란히 이름이 실리느니 차라리 안 싣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파리에서 이른바 백과전서파로 알려진 디드로, 달랑베르와 친분을 쌓게된 루소는 1749년 그들의 권유로 <백과전서>의 <음악> 항목을 집필했다. 첫 오페라 <사랑의 시신들>이 참담한 싷패로 끝난 후, 루소는 음악에 대한 열정을 음악에 관한 글을 쓰는 것으로 달랬다. 하지만 그렇다고 작곡가로서의 꿈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끝내 오페라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못했던 그는 1752년 봄 아름다운 전원 마을 파시로 들어가 여름까지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 작곡에 몰두했다. 

오페라를 작곡할 때 작곡가가 직접 대본까지 쓰는 일은 흔하지 않다. 하지만 루소는 <마을의 점쟁이> 대본을 직접 썼다. 이 오페라의 등장인물은 양치기 청년 콜랑과 양치기 처녀 콜레트, 마응 점쟁이, 그리고 마을 사람들인데, 단출한 등장인물만큼이나 줄거리도 단순하다. 서로에 대한 오해로 사이가 살짝 틀어진 콜랑과 콜레트가 마을 점쟁이의 도움을 받아 예전의 사랑을 다시 찾는다는 것이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단순하기 그지 없는 이 이야기가 당시에는 꽤 인기를 끌었던 모양이다.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나가면서 <마을의 점쟁이>가 초연된 지 불과 6개월 만에 <바스티앙과 바스티엔의 사랑>이라는 패러디가 만들어졌다. 이 패러디의 인기는 프랑스를 넘어 유럽 다른 나라까지 퍼졌다. 독일어로 번역되어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부르크테아터 궁정극장 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그 후 찰츠브르크의 트럼펫 주자 샤하트너가 이야기를 보완해서 오페라 대본을 만들었고, 1768년, 12살의 모짜르트가 이 대본에 곡을 붙였다. 이것이 바로 모짜르트의 첫 번째 징슈필 독일어 대사에 서정적인 노래를 곁들인 독일 민속 오페라<바스티앙과 바스티엔>이다.

 

부퐁 논쟁

 

루소는 자신의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를 이탈리아 오페라의 영감을 받아 탄생한 완전히 새로운 장르의 프랑스 오페라라고 선언했ㄷ. 그는 프랑스 오페라보다 이탈리아 오페라를 더 우수한 것으로 보았는데, 이런 그의 생각은 이른바 '부풍 논쟁'이라는 유명한 논쟁을 통해 서구체화되었다. 

부퐁 논쟁은 1752년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된 이탈리아 작곡가 페르골레시의 오페라 <마님이 된 하녀>를 계기로 촉발된 음악에 관한 논쟁이다. 프랑스 오페라가 지나치게 과장되고 화려하다고 생각해오던 루소는 <마님이 된 하녀>를 보고 자연스런 멜로디 위주의 이탈리아 오페라에 큰 감동을 받았다. 사실 루소는 프랑스 대사의 비서 자격으로 베니스에 있을 때 이탈리아 오페라 팬이 되었다. 그래서 <마님이 된 하녀>의 파리 공연을 계기로 이탈리아 오페라의 지지자로 나섰다. 그 후 프랑스에 있는 오페라 팬들은 프랑스 오페라를 옹호하는 사람과 이탈리아 오페라를 옹호하는 사람으로 나뉘어 논쟁을 벌였다. 이것이 바로 부퐁 논쟁이다. 전자에는 당대 프랑스 최고의 작곡가 라모와 루이 15세를 비롯한 귀족들이 있었고, 후자에는 백과전서파인 달랑베르와 루소가 있었다. 

루소는 특히 라모를 맹공격했다. 라모의 오페라 <우아한 인도의 나라들>을 "끊이지 않는 소음과 같다"라고 비난했다. 그런데 루소의 이런 비판에는 약간의 사심이 들어가 있었다. 음악가로서의 야망이 좌절된 후, 루소는 라모의 예술적, 사회적 성공을 시기했다. 그래서 그에게 더욱 가혹한 비판을 가했던 것이다. 프로 예술가에 대한 딜레탕트의 질투라고나 할까.

오페라를 작곡하면서 루소는 어떻게 하면 이탈리아의 막간극과 같은 오페라를 만들 수 있을까 고심했다. 그래서인지 루소의 <마을의 점쟁이>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프랑스 오페라와 확연히 달랐다. 말로하는 대사 대신 래치타티보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오페라코미크와도 구별되고, 낭만적인 전원풍의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코믹한 소재를 다룬 이탈리아 오페라의 막간극과도 구별되었다. 뭐니 뭐니 해도 루소가 일반적인 수법에서 탈피하려고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레치타티보였다. 그는 프랑스어의 어조에 따라 아주 새로운 방식으로 강세를 붙였다. 이 오페라의 작곡에 대해 루소는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숨겨진 원칙에 따라 작곡했는데, 그 원칙이란 화음을 중시한 라모의 

음악관에 반해 멜로디를 중시하는 원칙을 말한다. (중략) 프랑스 작

곡가들은 모르는 원칙이고,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무서워 하는

원칙이다. 뛰어난 지식을 지닌 고수의 숙련됨보다 예술에 대해 고심

한 애호가의 창의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레치타티보를 자랑할 만하

다. 프랑스 ㄹ치타티보치고는 최대한 조바꿈이 잘 되어 있고, 쉼표와

강세도 아주 적절하다. 당시 궁정에서는 감히 시도도 하지 못할 정도

로 새로운 것이다. 무엇보다 프랑스어라는 언어와 잘 맞는다. 

 

소박한 선율에 실린 양치기의 사랑 이야기

 

오페라는 짧은 서곡으로 시작한다. 서곡은 빠른 템포의 2박자, 다소 느린 템포의 부점 음표가 있는 3박자의 춤곡, 다시 3박자의 빠른 템포로 이루어져 있다. 

서곡이 끝나면 막이 열린다. 무대 한쪽에는 점쟁이의 집이, 다른 한쪽에는 나무와 샘이 있고, 뒤편으로 작은 마을이 보인다. 먼저 양치기 처녀 콜레트가 한숨을 쉬고, 앞치마로 눈물을 닦으며 <나는 행복을 잃어버렸어>를 노래한다. 그녀는 연인 콜랑의 마음이 다른 여자에게가 있는 것 같아 괴로워하고 있는 중이다. 

 

행복을 잃어버렸어.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렸어.

콜랑이 내 곁을 떠나버렸어.

아! 그가 변심하다니!

이 생각을 떨쳐버리고 싶지만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구나.

(중략)

그가 나보다 더 사랑하는 처녀는 누구일까?

아주 매력적인 여자임에 틀림없어.

불쌍한 양치기 처녀야.

너는 네가 오늘 느끼는 이 슬픔이 두렵지 않니?

콜랑아 나에게 등을 돌렸어.

이제는 내가 등을 돌릴 차례야.

(후략)

 

이렇게 애인의 변심에 고민하는 콜레트는 마을 점쟁이에게 조언을 구한다. 콜레트는 점쟁이에게 콜랑의 마음이 완전히 자기에게서 떠난 것이냐고 묻는다. 점쟁이는 자기가 콜랑의 마음을 꿰뜷어 보고 있다면서 그가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고 말해준다. 콜라의 마음을 빼앗았다고 의심되는 그 여자는 우아하기는한데 예쁘지는 않다는 것이다. 콜랑이 잠시 눈을 돌린 것은 남자로서 일종의 허세 때문인데, 이제 그 변덕스러운 남자가 콜레트에게 다시 돌아오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콜레트는 <내가 다른 남자들의 말을 들었더라면>을 노래하며 그동안 충실하지 못한 콜랑에게 마음을 준 것을 후회한다. 이 말에 점쟁이는 <사람의 마음이 불안할 때 사랑이 커지는 법>을 부르면서 콜랑의 사랑을 다시 얻고 싶으면 그를 사랑하지 않는 척하라고 충고한다. 점쟁이의 충고를 받아들여 콜레트는 콜랑을 사랑하지 않는 척하기로 한다. 

바로 이때 콜랑이 들어온다. 그는 점쟁이에게 사랑과 그의 충고가 자기를 현명하게 만들었다면서, 콜레트를 더 사랑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점쟁이는 떼가 늦었다면서, 콜레트가 이미 그를 잊었으며, 젊고 아름다운 그녀에게도 사랑을 배신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콜랑은 <아니야, 콜레트가 내 믿음을 저버릴 리가 없어>라고 노래하지만, 점쟁이는 콜레트가 이제는 양치기가 아닌 귀족 남자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콜랑은 한순간의 어리석음 때문에 콜레트를 잃게 되었다며 자책한다. 

 

사랑의 해결사

 

콜랑은 점쟁이에게 불행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다. 이어 익살맞은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점쟁이가 과장된 몸짓으로 마법을 펼친다. 주머니에서 마슬책과 작은 지팡이를 꺼내 주문을 외우면서 우스꽝스럽게 몸을 마구 흔든다. 이때 점쟁이를 만나러온 마을 처녀들이 주문을 외우며 온 몸을 떠는 점쟁이를 보고 놀라서 가져온 선물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도망친다. 콜레트에게 요술을 걸었으니 이제 그녀가 곧 이곳으로 올 것이라고 점쟁이가 말한다. 콜랑은 <사랑스런 여인을 다시 볼 수 있구나>라고 노래하면서 한동안 자신의 마음을 빼앗았던 귀족 여성에게 작별을 고하고, 콜레트가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노래를 부른다. 

 

이제 내 사랑스런 연인을 다시 볼 수 있구나.

안녕, 성들이여, 귀족 여인들이여, 부저들이여,

그대들의 화려함에 더 이상 현혹되지 않으리,

내 눈물과 귀족 여인에 대한 내 불만이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그대가 돌아오는 것을 다시 보고

잃었던 행복한 시간을 다시 찾을 수 있을텐데.

 

여인을 사랑하고 기쁘게 하는 방법을 안다면

이 세상에 더 필요한 것은 없으리.

그대 마음을 다시 돌려주오.

사랑하는 양치기 소녀여!

콜랑이 그대에 돌아왔소.

 

피리와 막대기가 내가 가진 것의 전부

내가 사랑하는 것은 콜레트.

내 보물은 그녀의 사랑.

 

얼마나 많은 지체 높은 남자들이 

그녀의 사랑을 얻으려고 했던가.

그렇게 권력과 위세를 떨친 그들도

나만큼 행복하지 못하리.

 

이때 예쁘게 차려 입은 콜레트가 들어온다. 콜랑은 반쯤 웃고, 반쯤은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을 건다.

 

내 마음이 변한 것은 아니야. 내가 너무 심한 실수를 했어. 악령에홀려서 그런 거야. 점쟁이가 그 마법을 벗겨 주었어. 그동안 한 일이 부끄럽지만 나는 여전히 콜랑이고, 너를 예전보다 더 사랑해.

 

콜랑의 고백에 콜래트는 내심 기뻐하면서도 겉으로는 냉담한 척한다. 점쟁이의 충고에 따라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입가에 미소가 절로 번지게하는 애교 섞인 사랑의 대화이다. 콜랑은 토라진 콜레트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까 망설이고, 살짝 토라진 콜레트 역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콜랑의 마음을 탐색하고 있다. 두 사람의 대화 중간 중간에 루소는 소박한 짧은 간주를 집어 넣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음악으로 사랑의 대화가 더욱 사랑스럽게 들린다. 이어지는 '너를 예전보다 더 사랑해' 대목의 멜로디는 그야말로 달콤하기 그지없다. 아름다우면서도 자연스러운 레치타티보를 듣노라면 가히 루소가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짐짓 냉정함을 가장한 콜레트의 반응에 콜랑은 당황한다. 그리고 <내 사랑은 변하지 않았어>라고 노래한다. 그리고 콜레트가 다른 남자의 연인이 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마을을 영원히 떠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다. 콜랑이 떠나려는 몸짓을 하자 콜레트가 그를 불러 세운다. 콜레트가 한숨을 쉬며 망설이는 사이 콜랑이 이때를 놓칠세라 재빨리 콜레트 앞에 쓰러지듯 무릎을 꿇는다. 그때 콜레트의 눈에 콜랑의 모자에 꽂힌 리본이 들어온다. 콜랑의 마음을 빼앗았던 귀족 처녀가 준 리본이다. 콜랑은 협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얼른 그 리본을 떼어 던져버린다. 콜레트는 그에게 자기가 직접 만든 리본을 준다. 귀족 처녀가 준 것보다 모양이 수수한 리본이다. 이렇게 해서 사랑을 다시 찾은 두 사람은 사랑의 이중창<영원히 콜랑(콜레트)에게 마음과 믿음을 지킬 것을 맹세하리를 부른다.

 

영원히 콜레트 (콜랑)에게 마음과 믿음을 맹세하리.

행복한 결혼이 그대와 나를 결합시켜줄 것이니 

우리는 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서로를 사랑하리.

사랑이 우리의 약속이 되리.

영원히 그대에게 맹세하리.

 

롤랭과 콜레트는 마법을 풀리게해 준 점쟁이에게 감사의 선물을 전한다. 점쟁이는 두 손으로 선물을 받는다. 어떻게 감사의 표시를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콜랑에게 두 사람이 행복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즐겁고 경쾌한 목소리로 <오라, 젊은 소년, 예쁜 소녀들아>를 부른다.

이렇게 모든 것이 행복하게 해결된 다음 마을 사람들이 4박자의 당당한 음악에 맞추어 입장한다.그리고 <콜랑이 양치기 소녀에게 돌아왔네를 부른다. 

 

콜랑이 양치기 소녀에게 돌아왔네.

두 사람의 화합을 축하하자.

그들의 진실한 사랑이 

늘 새로운 마법이 되기를

우리 마을 점쟁이의 위대한 능력을 찬양하자

그리고 그를 행복하게 하자.

 

이렇게 노래한 다음 2박자의 경쾌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춘다. 루소가 동경해 마지않던 평화롭고 행복한 전원의 풍경이다. 

 

오페라에 구현된 루소의 자연주의 

 

이어서 콜랑이 <내 어두운 오두막 집에서는>이라는 로망스를 부른다. 느리게 부르는 이 노래는 이 오페라의 핵심이자 루소가 주장했던 자연주의 핵심을 보여주는 노래이다.

 

이 어둠침침한 오두막 집에

늘 새로운 근심 걱정이 찾아오리

바람, 태양 매서운 날씨

힘겨운 노동과 수고

내 사랑 콜레트

만약 그대가 나에게 와서

나와 함께 한다면

짚으로 만든 이 오두막의 콜랑은 

아쉬울 것이 아무것도 없어라.

 

들에서, 초원에서

일하고 돌아오는 저녁마다 

나는 매일 그대를 보며 

더욱 더 그대를 사랑하리라.

오후의 태양보다 빠르게

들판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와

우리 사랑의 노래로

노동의 고단함을 달래리.

 

노래가 끝나면 기악곡 <팬타마임>이 이어진다. 템포와 박자가 다른 몇개의 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일 처음 곡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요 <주먹 쥐고 손을 펴서>와 비슷하게 시작한다. 팬터마임은 대사없는 몸짓 연기를 말한다.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마을 사람들이 들어오고 등장 인물들은 간단한 춤을 추거나 콜랑과 콜레트의 사랑다툼을 묘사한 연기를 하기도 한다. 

그런 다음 점쟁이와 콜랑, 콜레트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함께 <사랑의 기술은 우쾌한 것>을 노래한 후 콜레트의 아리아 <우리 사랑의 대상과 함께>와 발레가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등장 인물들과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자 즐겁게 춤을 추자>를 부르면서 끝을 맺는다.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한 반발

 

<마을의 점쟁이>는 1752년 10월 18일 퐁텐블로 궁전에서 초연되었다. 루소는 덥수룩한 수염에, 가발도 제대로 손질하지 않은 채 평상시 복장 그대로 공연장에 갔다. <사랑의 시신들>로 이미 실패의 쓴잔을 맛본 그는 청중들의 야유를 받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막이 오르고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었다. 가수들의 연기력은 약했지만 노래와 연주는 아주 훌륭했다. 공연이 진행되면서 그는 청중의 반응이 점점 호의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객석 여기저기에서 놀라움과 감탄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호의적인 반응은 특히 콜레트와 콜랑이 화해하는 장면에서 절정에 달했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다음 날 아침, 루소는 콜랑 역을 맡은 줄리요트로부터 오페라를 본 루이 15세가 형편없는 음정으로 하루 종일 콜레트의 아리아를 흥얼거렸다는 편지를 받았다. 그 후 <마을의 점쟁이>이는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오페라가 되었다. 

그렇다면 루소의 단순하기 그지없는 이 오페라가 왜 그토록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을까? 이 전 오페라에서 볼 수 없었던 단순함과 자연스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루소의 <마을의 점쟁이>를 들어보면, 이것이 륄리와 라모로 대표되는 프랑스 오페라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소재와 음악의 소박함에 놀라게 된다. 륄리와 라모의 오페라는 주로 신이나 왕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으며, 선천적으로 스펙터클한 것을 좋아하는 프랑스 궁정의 취향에 맞추어 수시로 춤과 합창, 전투, 지옥, 자연재해, 초자연적인 마법 장면 같은 것들이 나온다. 음악도 복잡하고 화려하다. 하지만 <마을의 점쟁이>에는 그런 장면이 없다. 음악도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동요처럼 소박하고 단순하다. 레치타티보는 프랑스어의 자연스러운 억양을 따르고 있다.

<마을의 점쟁이>로 루소는 '자연의 전도사'로서의 입지를 더욱 굳건히 다질 수 있었다. 여기서 루소가 그렸던 전원에서의 소박한 삶은 의심할 여지없이 루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었다. 당시 계몽주의자들이 대부분 상류층이었던 것과 달리 루소는 그 자신이 민중이었다. 그러기에 더 이상 잃을 것도, 바랄 것도 없었다. 와인을 곁들인 소박한 밥상과 자연만 있으면 그것을 그만이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가 그랬다. 

하지만 이 오페라를 좋아했던 왕이나 귀족들은 달랐다. 이들에게 <마을의 점쟁이>는 일종의 '전원 놀이', '서민 놀이' 같은 것이었다. 이런 모습은 유럽에서 한때 유행했던 전원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림 속에서 귀부인들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플밭이나 나무 그늘 아래서 한가한 오후의 여흥을 즐긴다. 더없이 평화롭고 낭만적인 풍경이지만, 사실 이것은 '전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진짜 전원은 그림의 구도 밖, 캔버스 밖에 있었다. 그곳 숲속이나 벌판에서는 민중들이 매일의 양식을 얻으려고 고통스러운 노동을 해야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전원은 민중들에게 절대로 낭만의 대상이 아니었다. 베루사유 궁전 후미진 곳에 자신의 집을 짓고 살았던 마리 앙투아네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궁전의 과도한 호화로움에 권태를 느낀 나머지 인위적인 전원을 만들고 친구들과 함께 전원놀이를 즐겼다. 무대 위에서 허름한 옷을 입고 양치기나 하녀, 농촌 처녀를 연기헀다. 그렇다면 객석에는 누가 앉아 있었을까? 바로 하인들이었다. 하인들이 객석에 앉아 무대에서 자기들을 '연기하는' 높은 분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웃지 못할 상황이 펼쳐졌다. 

상류 사회로부터 도피하려고 선택한 전원에서의 삶은 그 자체가 허구이자 유희일 뿐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이런 생활에 싫증이 나면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궁전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전원 놀이는 고기반찬에 싫증난 재벌의 시골 밥상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이 아무리 <마을의 점쟁이>를 좋아했을지언정 그것은 루소가 외치던 자연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마을의 점쟁이>의 소박한 음악은 그동안 전문가와 아마추어 사이에 놓여 있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한때 라모의 <화성론>을 읽었으나 그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루소는 자신과 같은 아마추어가 기존의 무기만으로는 도저히 라모 같은 전문가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의 '전문성'을 정신적인 내용이 없는 과도한 형식주의라고 비판했다. 그러고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명제를 내세우며 계급의 구별 없이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따라 할 수 있는 소박한 오페라를 만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과연 작곡가로서 루소의 능력이 륄리나 라모와 견줄 수 있을 만한 것이었을까. 혹시 스스로의 딜레탕티즘을 감추기 위해 자연주의라는 그럴 듯한 명제 뒤에 몸을 숨긴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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