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의 문학 오페라

음악과 연극으로 세상을 비웃다

운우(雲雨) 2022. 2. 15. 09:17

음악과 연극으로 세상을 비웃다'

   몰리에르, 륄리의 코메디 발레(서민귀족)

 

사람에게는 누구나 신분상승 욕구가 있다. <서민귀족>에 나오는 주르댕도 그런 사람이다. 돈은 많지만 교양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 무식쟁이는 자신의 재력에 맞는 품위를 갖추겠다는 일념으로 음악, 무용, 검술, 철학 선생 등을 고용해 귀족의 생활방식을 흉내 낸다. 하지만 워넉 무식한 탓에 그 과정에서 온갖 해프닝이 벌어진다. 주르댕은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자신의 행동이 주변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오로지 귀족이 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 살고 있다. 우리는 그를 통해 인간의 속물근성이 무식과 만났을 때 얼마나 참담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박장대소하며 배운다.

 

코미디 발레의 명콤비

 

<서민귀족>을 쓴 극작가 몰리에르는 1622년 프랑스 파리에서 직물상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장 바티스트 포클랭이다. 그가 9살 때 그의 아버지는 궁정의 실내 장식과 객실 하인을 관장하는 권리를 사들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6년 후에 이 권리를 자식에게 상속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는데, 이것은 장남인 몰리에르가 부친의 사후 이 권리를 물려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몰리에르가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전기 작가인 그리마레에 의하면, 몰리에르는 당시 파리에서 최고의 명성을 누리던 클레르몽 중학교에 다녔으며, 학교 친구의 가정교사인 가상디라는 사람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가상디는 매우 자유분방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었느데, 그 영향으로 몰리에르 역시 자유로운 사상에 빠지게 되었다. 그때문인지 가업을 잇든지 법률가가 되라는 아버지와 사사건건 부딪쳤다. 그래도 처음에는 아버지의 희망대로 법대에 들어갔다. 그리고 18살이던 1640년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해 5~6개월간 변호사로 일했다. 하지만 변호사로 일하는 동안에도 그의 마음은 온통 연극에 있었다. 몰리에르는 어린 시절 연극을 좋아하는 할아버지와 함께 자주 극장을 찾았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연극에 대한 감각과 열정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변호사로 일하는 중에도 극장 쪽을 기웃거리다가 마들렌 베자르라는 연상의 여배우를 만났고, 연극인들과 교류를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에게 변호사를 때려치우고 연극을 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1643년 몰리에르는 유산 문제를 정리하면서 아버지가 받았던 궁정 장식업과 하인 관리권의 상속을 포기했다. 그리고 베자르 일가를 비롯한 연극인들과 성명 극단이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이듬해인 1644년부터 몰리에르라는 예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의 극단은 파리를 중심으로 공연 활동을 했다. 하지만 거듭된 실패로 빚더미에 앉고 말았다. 몰리에는 빚을 갚지 못해 김옥에 들어갔다가 연차적으로 갚는다는 조건으로 몇 개월만에 풀려났다. 이후 그는 파리를 떠나 지방 각지를 돌며 유랑 극단 생활을 했다. 그리고 32살 때인 1654년에 처녀작인 <덤벙쟁이>를 무대에 올렸다.

몰리에르와 그의 극단이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은 1658년 무렵이다. 이때 몰리에르의 극단은 파리로 들어와 루이 14세와 궁정 대신들 앞에서 <니코메드>와 <사랑에 빠진 의사>를 공연했다. 공연이 마음에 들었던 루이 14세는 몰리에르의 극단이 프티브르봉극장을 이탈리엥 극단과 교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듬해에 이탈리엥극단이 이탈리아로 돌아가자 몰리에르의 극단이 프티브르봉극장의 정규 공연 일정을 독점할 수 있게 되었다. 

1664년 몰리에르는 <타르튀프>를 발표했다. <타르튀프>는 몰리에르의 대표작으로, 당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귀족과 성직자들을 풍자한 작품이다. 애초에 루이 14세의 후원을 받고 만들어졌지만, 성직자와 귀족들의 강력한 항의로 결국 공연이 금지되는 수난을 겪었다. 

이듬해인 1665년, 루이 14세는 공연 금지에 대한 보상으로 몰리에르의 극단을 왕실 전속 극단으로 승격시켰다. 이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몰리에르는 왕실 전속 극단 소속으로 일했다. 작품으로는 여자를 사로잡는 매력을 가진 남자를 주인공으로 한 <동 쥐앙>, 교만하지만 고결한 인격을 가진 아르세스트를 둘러싼 성격대립을 다른 <인간 협오자, 구두쇠 아르파공의 좌절을 그린 <수전노>, 과도한 건강 염려증을 가진 남자 이야기를 그린 <상상병 환자>등이 있다. 

몰리에르는 세익스피어에 비해 다양성이 부족한 작가라는 평을 들었다. 세익스피어가 산문과 운문, 비극과 희극 모두에 정통했던 것에 반해 몰리에르는 오로지 희극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당시 희극은 비극에 비해 저급한 것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었다. 몰리에르는 이런 부족함을 메우려고 희극에 음악을 끌어 들였다. 희극이 채워주지 못하는 정서적인 부분을 채우고자 막과 막 사이에 음악과 발레가 들어가는 막간극을 도입한 것이다. 음악을 위해 그는 작곡가 장 바티스트륄리와 손을 잡았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코미디 발레이다. 

몰리에르와 손잡고 코미디 발레를 만든 작곡가 륄리는 본래 이탈리아 사람으로, 1632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는 음악은 물론, 다른 분야도 거의 교육받지 못했지만, 기타와 바이올린, 춤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14살 때인 1646년, 기즈 대공의 눈에 띄어 그를 따라 프랑스로 갔으며, 거기서 루이 13세의 동생이자 루이 14세의 사촌누이인 몽파시에 부인의 요리사 보조로 일했다. 요리사 보조가 아닌 부인의 이탈리아어 가정교사였다는 설도 있다. 몽파시에 부인은 륄리가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니콜라스 메투르 밑에서 음악 이론을 배우도록 했다. 하지만 나중에 후원자를 모욕하는 상스러운 시를 쓴 것이 발각되어 해고되었다. 

20살 때인 1652년경 륄리는 프랑스 궁정과 바이올린 주자 및 무용수로 인연을 맺었다. 이듬해 그는 프랑스 왕을 위한 작곡가가 되었으며, 1661년에는 프랑스 왕실 악단의 총감독 겸 작곡가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극작가 몰리에르와 손잡고 루이 14세가 베푸는 궁정 연회를 위해 고전희극과 발레를 결합시킨 코미디 발레라는 새로운 양식을 만들었다. 두 사람은 대본을 쓰고 작곡을 하는 것은 물론, 배우로 직접 무대에 출연하기도 했다. 

<서민 귀족>을 보면 이것이 300년 전 작품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만 바뀌었을 뿐 그 내용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몰리엘는 이 작품에서 주르댕이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 본성의 근저에 깔려 있는 허영심의 가면을 여지없이 벗겨버렸다. 그리고는 마음껏 비웃어주었다. 비단 주루댕만이 아니었다. 잘난척하는 귀족, 위선적인 성직자, 인색한 수전노, 허영심 많은 처녀, 째째한 농부, 어둔한 백작 등 일단 걸리기만 하면 누구나 풍자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도 주변을 둘러보면 주루댕같은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귀족이 되고 싶은 서민

 

<서민귀족>은 먼저 <서곡>으로 시작한다. 음악은 륄리가 정립한 프랑스 서곡의 전형을 보여 준다. 프랑스 서곡은 느리고, 빠르고, 느린 ABA 형식으로 A는 느린2박자의 부점음표, B는 빠르고 경쾌한 3박자로 이루어져 있다. 중간부인 B는 대개 다성 양식으로 작곡되며, 첫 성부의 멜로디를 다른 성부가 차례로 모방하는 식으로 시작하는 것이 특징이다. <서민귀족>의 서곡이 일반적인 프랑스 서곡과는 다른 점은 A가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막이 열리면 음악 선생과 무용 선생이 등장한다. 두 사람은 구족 흉내를 내고 싶어하는 주르댕에게 음악과 춤을 가르치고 돈을 받고 있다. 그들은 주르댕이 교양 없고 멍청하며, 음악과 춤에 대한 감각이 형편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로지 돈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다. 그 생각은 음악 선생이 하는 다음과 같은 말에 잘 드러나 있다.

 

"(우리를) 칭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손에 돈을 쥐어주며 칭찬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집 주인은 그리 똑똑하지 못해서 만사에 닥치는 

대로 말하고, 칭찬하는 것도 제멋대로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돈이 그

분의 판단력을 좌우하며, 분별력 역시 돈주머니 속에 있습니다. 그분

의 칭찬은 돈으로 환산됩니다."

 

곧이어 주르댕이 등장한다. 그는 자기가 재단사에게 특별히 주문한 귀족 의상을 입어보고 이에 대한 소감을 음악 선생과 무용 선생에게 묻는다. 옷을 입은 주르댕의 모습이 아주 우스꽝스럽지만 음악 선생과 무용 선생은 입이 침이 마르게 칭찬한다. 이 말에 우쭐해진 주르댕은 자기가 전에 작곡을 의뢰한 세레나데를 들려달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소프라노가 나와 세레나데<밤이나 낮이나 나는 괴로워요>ㄹㄹ 부른다. 이 세레나데는 코믹한 극적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우아하고 서정적이다. 

 

나는 밤이나 낮이나 슬퍼요.

괴로움을 달랠 길 없어요.

그대의 아름다운 눈이 

나를 사로잡은 후부터

말해줘요. 아름다운 이리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런 식으로 대한다면.

아! 당신이 적들을 어떻게 대할지 궁금하네요.

 

하지만 주르댕에게 이토록 격조 높은 노래는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와 같은 것, 노래를 다 듣고 난 그는 노래가 '조금 슬픈 것'같다고 하며 좀 더 쾌활한 노래를 부탁한다. 그러면서 그는 얼마 전에 배운 노래 하나를 생각해낸다. 가사에 '양'이 들어가는 노래라며 잠시 기억을 더듬은 그는 형편없는 음정으로 <장통이 예쁜 만큼이나>를 부른다.

 

나는 장통이 예쁜 만큼이나 다정할 거라 생각했어요.

나는 장통이 양보다 더 순할 거라 생각했어요.

그러나 아!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숲속의 호랑이 보다 

백 배나 천 배나 더 잔인해요.

 

주르댕이 형편없는 목소리로 부르는 이 노래에는 몰리에르와 륄리의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이것은 두 사람이 은근히 시샘하고 있는 시인 피에르 페랭과 작곡가 로베르 캉베르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다. 

1659년, 페랭과 캉베르는 파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시라는 곳에서 전원극을 발표했다. 오늘날 <이시의 전원극>이라고 불리는 이 작품은 전막에 걸쳐 음악이 나오는 프랑스 최초의 작품으로 꼽힌다. 이 작품으로 인기를 얻은 페랭과 캉베르는 1669년에 루이 14세로부터 프랑스에서 공연되는 모든 오페라 공연에 대한 독점권을 따냈다. 그때가 <서민귀족>이 나오기 직전이었는데, 비슷한 업종에 종사하는 몰리에르와 륄리에게 두 사람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을 것이다. 

<서민귀족>에는 이들에 대한 견제 심리가 엿보인다. 주르댕이 부르는 노래가 단적인 예이다. 여기서 주르댕은 자기가 얼마 전에 배운 노래를 '양'이 들어가는 노래라고 얘기한다. 목동들이 나오는 전원극을 양이 들어가는 극으로 폄하한 것이다. 게다가 그 가사는 몰리에르가 쓴 것이 아니라 페랭이 쓴 전원극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것을 형편없는 음치인 주르댕이 부르게 함으로써 전원극의 페해를 풍자하고 있다. 

주르댕이 노래를 부르고 나서 음악 선생과 무용 선생 사이에 논쟁이 벌어진다. 두 사람은 각자 음악이 최고, 춤이 최고라며 싸운다. 그런 다음 노래가 나오는데, 이번에도 역시 목동의 노래이다. 이에 주르댕이 왜 만날 목동이냐고 불평을 한다. 당시 전원극이나, 전원화가 얼마나 유행했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주르댕의 말에 무용 선생이 이렇게 대답한다. 

 

"음악에 맞추어 대화를 하려면 양의 무리 속에 들어가 있어야 합니

다. 노래는 언제나 목동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왕자나 상인이 노래

로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정말 자연스럽지는 못한 일이지요.

 

그런 다음 세 명의 가수가 나와 노래를 부르는데, 이 장면 역시 페랭의 전원극을 패러디한 것이다. 

먼저 목동 처녀가 나와서 <사랑에 사로잡힌 이 마음>을 부른다. 

 

사랑에 사로잡힌 이 마음

수많은 근심 걱정이 나를 짓누르네.

사람들은 그것이 다 행복한 괴로움

행복한 한숨이라고 말하지만

남들이 뭐러고 하든 말든

자유만큼 달콤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목동 처녀는 한 목동 총각의 구애를 받고 있지만, 사랑보다는 자유룰 택하기를 원한다. 그 말에 그녀를 사랑하는 목동 총각이 <사랑만큼 달콤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노래하는데, 이 말은 바로 앞에서 목동 처녀가 노래한"자유민큼 달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의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만큼 달콤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두 사람을 같은 열망 속에 살게하지요.

사랑의 그리움이 없다면

어느 누구도 행복할 수 없어요.

인생에서 사랑을 없앤다는 것은 

삶의 줄거움을 없애는 것과 같아요.

 

목동 총각은 자유를 외치는 목동 처녀에게 그래도 사랑만이 인생 최고의 행복이라고 강변한다. 바로 이때 다른 목동이 등장해 찬물을 끼얺는 소리를 한다. 그는 <사랑의 굴레가 들어가는 것이 행복할 수도 있어요.>라고 입을 연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지조 있는 여자를 만난다는 조건이다. 그런데 그의 말에 의하면 이 세상에 그렇게 지조있는 여자는 없다는 것.

 

살랑의 굴레에 들어가는 것이

행복할 수도 있어요.

만약 정말 지조 있는 사람을 만다면 멀이지요.

그러나 아! 너무도 잔인하게도 

당신은 절대로 지조있는 여자를 만나지 못할 걸요.

지조 없는 여자는

살아갈 필요가 없지요.

그러니 영원히 사랑을 포기해야해요.

 

앞의 두 노래가 달콤하고 서정적인데 반해 마지막 노래는 낮은 음역으로 레치타티보 비슷하게 불려진다. 

이어서 세 사람이 "달콤한 열정!" "행복한 자유!" "거짓된 여인!" 이라며 각자의 상반된 생각을 표현한다. 그러다가 사랑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자고 있던 세 번째 목동이 그에게 정말 지조 있는 여인을 보여주겠다는 목동 처녀의 말에 마음을 바꾼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세 사람이 함께 조화로운 목소리로 <이토록 아름다운 열정에>를 부른다. 

이 대목은 페랭과 킹베르의 <이시의 전원극>을 패러디한 것이다. 

패랭은 사랑에 대한 진지환 토론의 시를 가사로 한 노래로 대체함으로써 설명조의 노래가 지닌 한계를 극복하려고 했다. 앞에 나오는 세 목동들은 페랭의 전원극에서 지조 없는 목동 처녀 실비스, 충직한 목동 총각 티르시스, 사랑을 거절당한 사티로스를 패러디한 것이다. 

페랭은 사랑에 대한 진지한 토론의 시를 가사로 한 노래로 대체함으로써 설명조의 노래가 지닌 한계를 극복하려고 했다. 앞에서 나오는 세 목동들은 페랭의 전원극에서 지조 없는 목동 처녀 실비스, 충직한 목동 총각 티르시스, 사랑을 거절당한 사티로스를 패러디한 것이다. 노래가 끝난 후 무용 선생의 지시에 따라 네 명의 무용수가 나와 사라방드, 부레, 갈리아드, 카나리를 춘다. 이것이 제1막간극이다.

 

음악, 춤, 검술, 철학

 

2막에서 음악 선생은 주르댕에게 매주 화요일 밤과 목요일 밤에 음악회를 열 것을 제안한다. 다른 귀족들도 모두 그렇게 한다는 말에 주르댕이 동의한다. 여기서 음악 선생은 음악회에 초대할 연주자들을 거론하는데, 이것으로 17세기 음악회가 어떤 형태를 띠고 있었는지 엿 볼 수 있다. 

 

"세 명의 가수가 필요합니다. 소프라노, 하이테너, 베이스이고, 반주

악기로는 베이스 비올과 테오르베, 통주저음 연주를 위한 하프시

코드, 그리고 리토르넬로를 연주할 바이올린 주자 두 명입니다."

 

이때 검술 선생이 들어온다. 그는 음악 선생과 무용 선생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 검술들에게 높은 존경심을 보여야합니다. 무가 음악이나 춤

같은 쓸데 없는 학문들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할 수 있지요."

 

이 말에 음악 선생과 무용 선생이 발끈하면서 세 사람 사이에 언쟁이 벌어진다. 바로 그때 철학 선생이 들어온다. 매사에 점잖은척 하는 그는 세 사람이 '모든 활동의 지배자가 되어야 하는 이성을 잃고' 싸우는 것에 놀라움을 표시한다. 그리고 자기 분야가 최고라고 주장하는 음악 선생, 무용 선생, 검술 선생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그렇다면 철학은 도대체 뭐가 되는 거지요? 내 면전에서 거만하게

떠들어대는 세 사람 모두 무례하기 짝이 없군요. 사람들이 예술이라

는 명칭으로 부르지도 않는, 검술사니 가수니 무용수니 하는 초라한 

호칭으로밖에는 이해되지 않는 그런 하찮은 직업에 학문이라는 명칭

을 붙이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요."

 

이 말에 세 사람이 동시에 화가 나서 철학 선생을 때린다. 그런 다음 서로를 때리면서 퇴장한다. 곧 철학 수업이 시작된다. 철학 선생은 주르댕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려운 말로 논리학, 도덕, 물리학에 대해 강의 한다. 하지만 주르댕은 이렇게 "소음이 많고 난잡한 지식"보다 철자법에 대해 배우기를 원한다. 철학 선생이 그에게 모음과 자음이 발음 법칙에 대해 설명해주자 주르댕은 자기가 일상적으로 하는 말 속에 이런 법칙이 있는줄 몰랐다며 흥분한다. 발음 법칙을 익힌 주르댕은 철학 선생에게 자기가 사모하는 후작부인에게 보낼 연애편지의 문구를 다듬어 달라고 부탁한다. 철학 선생이 돌아간 후, 재단사가 주문했던 옷을 가져온다. 주르댕이 옷을 입어보려고 하자 재단사는 귀족들이 음악에 맞추어 옷을 입는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 말을 곧이고곧대로 믿은 주르댕은 재단사 보조들이 추는 2박자의 우아한 음악에 맞추어 옷을 입는다. 이것이 제2 막간극이다.

 

귀족이 아니면 결혼 못해

 

3막에서 주르댕은 새로 맞춘 옷을 자랑하려고 하인을 거느리고 거리로 나가려 한다. 그런데 그때 하녀 니콜이 들어와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은 주르댕을 보고 웃음을 터트린다. 주르댕이 아무리 화를 내도 웃음을 멈추지 못한다. 곧이어 들어온 주르댕의 부인도 남편의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주르댕 부인은 남편이 벌리는 귀족놀이를 영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 하녀인 니콜 역시 매일같이 손님들을 초대해 집안을 엉망으로 만든다고 불평한다. 이 말에 주르댕은 고상한 취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아내와 하녀의 무식함을 한탄한다. 

이때 도랑트 백작이 들어온다. 그는 어리석은 주루댕을 꼬여 그에게 상당한 액수의 돈을 빌렸는데, 이번에 또 다시 돈을 빌리려고 그를 찾은 것이다. 주르댕의 성향을 잘 알고 있는 도랑트는 그를 보자마자 자기가 국왕의 집무실에 들렸던 얘기를 한다. 그때 국왕에게 주르댕에 대해 얘기했다는 것이다. 이 말에 감격한 주르댕은 도란트에게 돈을 더 빌려준다. 주르댕 부인은 남편에게 도랑트가 그를 이용하고 있다며 비난하지만, 주르댕은 국왕과 친한 도랑트에게 돈을 빌려줄 수 있어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주르댕이 도랑트에게 돈을 빌려주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후작부인 도리멘과 그를 연결시켜주는 사람이 바로 도랑트이기 때문이다. 이날도 도랑트는 주르댕의 귀에 대고 도리멘을 집으로 초대하라고 속삭인다. 그러면서 주르댕에게 그가 선물한 다이아몬드 반지에 관해서 한마디도 묻지 말라고 충고한다. 선물을 주고 생색을 내는 것은 교양 있는 귀족이 할 짓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르댕은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만, 사살 도랑트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주르댕이 도리멘에게 전해주라고 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마치 자기가 선물한 주었기 때문이다. 

도랑트 역시 도리멘을 좋아하고 있다. 그는 주르댕을 이용해 그녀의 환심을 산 다음 그녀를 자기 것으로 만들겠다는 속셈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주르댕은 그것도 모르고 그에게 속고 있다. 

주르댕 부인은 남편에게 쓸데없는 귀족 놀이만 하지 말고 딸의 결혼에 신경을 쓰라고 말한다. 두 사람의 딸 뤼실에게는 사링하는 사람이 있다. 클레옹트라는 젊은이다. 웬만큼 사는 집안의 아들이지만 귀족은 아니다. 주르댕은 클레옹트가 귀족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결혼을 반대한다. 반드시 귀족을 사위로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난관에 처한 클레옹트는 하인 코비엘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 그 말을 들은 코비엘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고 말한다. 최근에 가면을 쓰고 하는 희극 공연이 있었는데, 그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것이다. 클레옹트가 내용을 궁금해하자 코비엘은 자기에게 모든 것을 맡기라는 말만 남기고 떠난다. 

이어 도랑트가 도리멘을 데리고 주르댕의 집으로 온다 주르댕이 들어와 무용 선생에게 배운 우스꽝스러운 동작으로 귀족 인사를 한다. 곧 음식이 들어오고 요리사들이 경쾌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춘다. 이것이 제3막간극이다.

 

클레옹트와 코비엘의 계략

 

4막에서 도리멘은 테이블 가득 가득 차려진 진수성찬을 보고 크게 감동한다. 곧이어 가수들이 권주가<마셔요! 친구여, 마십시다!>를 부른다.

 

마셔요! 친구여, 마십시다!

흘러가버리는 시간이 

우리에게 마실 것을 권합니다. 

할 수 있는 만큼 인생을 즐깁시다.

지옥의 강을 건너가면 

달콤한 포도주도 

우리의 사랑도 끝이니까요.

서둘러 마십시다.

우리가 늘 술을 마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니 뭐니 하는 얘기는

바보들이나 하도록 내버려둡시다.

우리 철학은

행복을 잔에 가득 채워 넣는 것

재산도, 지식도, 명예도

근심 걱정을 없애진 못합니다.

오로지 술을 통해서만 

행복에 도달할 수 있으니

자, 마십시다. 빨리 마십시다.

술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술을 따르시오. 젊은이들이여 따르시오.

따르시오. 여하튼 따르시오.

내가 그만 따르라고 할 때까지

 

여기서 세 명의 가수들이 부르는 권주가는 아주 달콤한 멜로디로 이루어진다. 술이 주는 달짝지근한 행복을 감각적인 목소리로 노래한다.테이블 가득 놓인 산해진미와 달콤한 권주가에 도리멘은 감동한다. 그런데 바로 이때 주르댕 부인이 들어온다. 그녀는 자기를 동생 집에 보내고 여자를 초대해 잔치를 벌이는 남편을 비난한다. 도랑트가 만찬은 자기가 준비한 것이고, 주르댕은 단지 잡만 빌려준 것이라고 변명하지만 소용이 없다. 주르댕 부인은 도리멘에게 높은 신분을 이용해 남의 가정이나 깨는 부도덕한 여자라고 욕하고, 이 말에 충격을 받은 도리멘이 뛰쳐나간다. 이에 당황한 도랑트가 그녀를 따라 나간다. 

혼자 남은 주르댕이 도리멘과의 만남을 아쉬워하고 있을 때, 노인으로 변장한 코비엘이 들어온다. 그는 자기를 주르댕의 돌아가신 아버지의 친구라고 소개하면서, 그의 아버지가 교양이 있는 귀족이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주르댕이 놀라면서 자기의 아버지가 장사꾼이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자 코비엘이 펄쩍 뛴다. 

 

"그분이 장사꾼이었다고요? 그건 순전히 중상모략입니다. 절대로

아니에요. 그분은 사람들을 아주 친절하게 대했고, 도움을 많이 주

셨지요. 옷감에 대해 아는 것이 많으셔서 여기 저기 옷감을 수집하

러 다니셨고, 그것을 집으로 가져와서 친구들에게 돈을 받고 나누어

주셨습니다.

 

주르댕의 아버지가 실제로는 옷감 장사를 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사이다. 내용적으로 보면 분명 장사꾼인데 멍청한 주르댕은 상대가 자기를 그럴듯한 말로 속이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좋아 한다. 

이렇게 해서 주르댕의 환심을 산 코비엘은 놀라운 사실을 전한다. 며칠 전 이 마을에 터키 황제의 아들이 왔는데, 그가 주르댕의 딸 뤼실에게 한는에 반해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터키 왕자가 사위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에 주르댕의 귀가 번쩍 뜨인다. 코비엘은 엉터리 터키어로 주르댕을 속이면서 터키 왕자가 그를 '마마무쉬'즉 방랑기사로 봉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전한다. 이런 코비엘의 말을 철썩같이 믿은 주르댕은 터키 황제의 사돈이 되고 기사 작위까지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걱정이 있다. 클레옹트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딸이 과연 터키 왕자와의 결혼을 받아들이겠냐는 것이다. 이 말에 코비엘은 터키 왕자가 클레옹트와 거의 비슷하게 생겼으니 왕자의 얼굴을 보면 딸의 마음도 돌아설 것이라고 주르댕을 안심시킨다. 

곧 이어 터키 왕자로 변장한 클레옹트와 역시 주르댕 아버지의 친구로 변장한 코비엘이 들어온다. 이 장면은 <서민귀족> 전막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장면이다. 터키인으로 변장한 클레옹트와 코비엘은 엉터리 터키어를 주고받지만, 주르댕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클레옹트 암부사힘 오키, 아오르디나 살라말 르키

코비엘    주르댕씨. '당신의 마음이 일 년 내내 꽃피는 장미나무

            같기를'이라는 표현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매우 정중한

            표현이지요.

주르댕   소인은 터키 전하의 변변치 않은 하인입니다.

코비엘   카리가르 캄보트 우스틴 모라프

클레옹트 우스틴 요크 카타말르키 바숨 바세 알라 모란

코비엘    전하께서는 '그대에게 사자와 같은 힘과 뱀과 같은 조심

            성을 주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클레옹트 벨멘

코비엘    전하께서는 당신의 따님을 만나보고 결혼을 매듭지을

             수 있도록 서둘러서 의식을 마련해주셨으면 합니다.

주르댕    그 많은 말들을 어떻게 한 마디로 나타낼 수가 있지요?

코비엘    터키어가 원래 그렇습니다.

 

이어서 주르댕을 귀족으로 만들려는 의식이 치러진다. 제4막간극을 구성하고 있는 이 의식은 춤과 음악으로 진행되는데, 장면에서 나오는 음악이 그 유명한 <터키 의례를 위한 행진곡>이다. 중간에 난데없이터키식 의례가 나오는 것이 뜬금없는 것 같지만, 사실 <서민귀족>은 바로 이 장면을 위해 탄생한 것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1669년, 술레이만 아가라는 터키 대사가 루이 14세 궁정을 방문했다. 그런데 이때 터키 대사가 자기 나라 옷만 황제의 궁정이 태양 왕의 궁전보다 훨씬 멋지다고 거드름을 피운 것이다. 이 말에 심기가 불편해진 루이 14세는 몰리에르와 륄리에게 터키 취향을 풍자한 작품을 2주 안에 만들라고 지시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서민귀족>이다. 사람들이 모두 합심해 주르댕을 속이며 엉터리로 터키 의식을 치루는 이 장면에서 륄리는 탁월한 음악적 유머 감각을 발휘한다. 사실 그전까지 나온 륄리의 음악들은 우아하고 섬세하고 서정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박장대소하며 극을 보던 관객들은 륄리의 아름다운 정서적으로 잠시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연주되는 음악은 다르다. 몰리에르의 재치 있는 대사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유머러스하다.

터키 복장을 한 이슬람 사제와 성직자, 무용수. 가수 연주자들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행진곡이 나오는데, 이것을 듣고 있으면 음악으로도 유머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이 곡의 악보에 륄리는 "터키식으로 연주하라"라는 말을 써넣었다고 한다. 가짜 의식이지만 진짜처럼 하라는 의미인데, 짐짓 진짜를 가장한 음악의 가짜 연기가 웃음을 유발한다. 절도 있는 2박자로 이루어진 음악 그 자체는 행진곡으로 손색이 없다. 하지만 첫 박마다 들어가는 과장된 악센트 때문에 음악이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형국 되고 말았다. 

곧 이어 주르댕을 '마마무쉬'로만드는 의식이 진행된다. 의식은 외형적으로는 매우 엄숙하다. 식을 주도하는 이슬람 사제나 성직자들, 가수들 모두 엄숙한 표정이다.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의식이 진행되는데, 이때 가수들이 터키어로 추정되는 뜻 모를 가사에 단조로운 리듬과 멜로디를 얹어 부른다. 사제가 선창을 하면,나머지 사람들이 완벽한 화음으로 이에 답하기도 한다. 앞에 나온 행진곡의 경우처럼 짐짓 엄숙함을 가장한 등장인물들의 표정과 연기 그리고 륄리의 음악이 웃음을 자아낸다. 

5막에서 주르댕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마마뮈쉬가 되었다는 사실에 완전히 도취해서 현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이 기회를 이용해 클레옹트는 주르댕으로부터 결혼 허락을 받으려고 한다. 딸을 터키 왕자와 결혼시키겠다는 말에 주르댕 부인은 강력하게 반대한다. 그러자 코비엘이 살짝 다가가서 전후사정을 설명한다. 뤼실 역시 절대로 터키 왕자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다가 클레옹트를 알아보고는 단번에 마음을 바꾼다. 이에 기분이 좋아진 주르댕은 빨리 공증인을 부르자고 재촉한다. 그때 도랑트가 자기와 도리멘도 공증인 앞에서 결혼 절차를 밟겠다고 말한다. 이 말에 놀라는 주르댕에게 도랑트는 그 부인을 속이기 위한 계략이라는 말로 말로 그를 안심시킨다. 두 쌍의 결혼을 위해 공증인을 기다리는 동안 발레 공연이 펼쳐진다. 

주르댕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만, 코미디 발레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춤과 노래로 이루어진 마지막 막간극이 기다리고 있다. 무대 위에 여러나라, 여러 지방에서 온 관객들이 오늘 공연될 발레의 줄거리가 적힌 소책자를 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그들은 객석이 다 차서 앉을 자리가 없다는 등 공기가 탁하고 목이 마르다는 등 각양각색의 불평을 늘어놓는다. 이렇게 한동안 소란을 피우던 관객이 조용해지면 비로소 공연이 시작된다. 펼쳐지는 무대는 아름다운 노래와 춤의 향연이다.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의 노래와 춤이 차례로 나오고, 막바지에 등장인물들이 모두 나와 합창을 부르며 공연이 끝난다.

 

연극, 음악, 발레의 결합

 

코미디 발레는 연극과 음악, 발레가 합쳐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한 작품에 통합시킨다는 것은 ㄱ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하면 세 가지가 따로 놀 수 있기 때문이다. 몰리에르는 이것을 피하려고 막간극에 들어가는 음악과 춤이 극의 내용과 연결되도록 했다. 극 속에 등장 인물들이 자연스럽게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출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1막의 세레나데와 목동들의 노래, 제1막간극 재단사들의 춤, 제2막간극 요리사들의 춤, 3막의 권주가, 4막의 터키의례를 위한 행진곡과 합창 모두 극의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있다. 

하지만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 중에는 극의 내용과 전혀 다른 정서를 가진 것도 있다. 세레나데와 목동의 노래, 권주가 그리고 5막이 모두 끝난 후에 독립된 형태로 공연되는 막간극 <여러 나라들의 발레>에 나오는 아리아가 바로 그것이다. 이 노래들은 우아하고 세련된 프랑스 궁정 아리아의 전형을 보여준다. 가수들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감미로우며, 노래의 멜로디는 미세한 장식음으로 세련되게 다듬어져 있다. 프랑스어의 억양을 살린 리듬과 자연스럽게 흐르는 멜로디, 가끔씩 나타나는 미묘한 불협화음이 결합된 노래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탐미적이다. 앞에서 얘기했지만 이것은 정서적으로 쉬어가는 부분이다. 주르댕의 우스꽝스러운 행ㅈ동으로 포복절도하던 관객도 가수들이 노래하는 대목에서만큼은 순수한 감상자가 된다. 웃음을 잠시 멈추고 조금은 진지한 표정으로 음악을 경청한다. 몰리에르의 대본이 레치타티보라면, 륄리의 음악은 아리아이다. 전자는 산문, 후자는 운문이다. 

하지만 륄리의 음악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서민귀족>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는 것은 역시 몰리에르의 희극이다. 공연시간을 따져보아도 몰리에르의 희극이 차지하는 부분이 륄리의 음악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코미디 발레는 희극, 음악, 발레가 결합된 형태이기 때문에 각 장르를 담당한 예술가 사이의 주도권 다툼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작품마다 극, 음악, 발레의 비율이 들쭉날쭉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민귀족>을 만들면서 륄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스스로 몰리에르의 희극을 돋보이게 하려고 동원된 소수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결국 륄리는 몰리에르와 결별을 선언한다. 

더 이상 희극의 곁다리 역할을 하는 것을 거부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이 주도하는 오페라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사실 륄리는 프랑스어로 오페라를 작곡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다. 이탈리아 사람인 그는 프랑스어가 오페라, 그중에서도 특히 레치타티보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코미디 발레를 위해 음악을 쓰면서도 정작 오페라를 작곡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서민귀족>을 발표한 이듬해인 1671년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페랭과 캉베르가 손잡고 <포몬느>라는 오페라를 발표해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것이 최초의 프랑스 오페라인데, 선두를 빼앗긴 륄리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몰리에르의 조수 노릇이나 하다 적수에게 뒤통수를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고 하던가, 륄리의 귀에 페렝이 파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실 페렝이 제작한 포몬느>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무대장치에 너무 돈을 들이는 바람에 오히려 적자가 나고 말았다. 빚더미에 앉은 페렝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륄리는 궁지에 몰려 있는 페렝을 찾아갔다. 당시 페렝은 프랑스에서 공연되는 모든 오페라에 대한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륄리는 그에게 돈을 주고 이 권한을 양도받았다. 

 

코미디 발레에서 서정 비극으로

 

그런 다음 그는 본격적으로 오페라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가 가장 고심한 것은 레치타티보였다. 이탈리아 오페라와 같은 방식으로 프랑스에 레치타티보를 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그는 프랑스어에 맞는 레치타티보를 개발했다. 이 과정에서 코미디 발레를 작곡할 때 아주 잠깐씩 레치타티보를 써본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코미디 발레는 프랑스 오페라로 가기 위한 전 단계였는지도 모른다. 

륄리는 오랜 고심 끝에 기존의 프랑스 연극과 발레 음악의 전통을 계승한 독자적인 오페라 양식인 '서정비극'을 창안했다. 그리고 1673년 첫 작품으로 <카드뮈와 에르미욘느>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 작품을 프랑스 오페라의 효시로 보는 사람도 있다. 캉베르의 <포몬느>가 프랑스 최초의 오페라인 것은 맞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노래가 중심이 되는 이탈리아식 오페라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륄리의 서정비극은 이탈리아 오페라와 구별되는 최초의 프랑스 오페라라고 할 수 있다. 륄리는 첫 오페라를 내놓은 후 1686년

가지 매년 한 편의 오페랄ㄹ 꼬박꼬박 무대에 올렸다. 

한편 륄리와 결별한 몰리에르는 륄리가 첫 오페라를 내놓은 바로 그해에 작곡가 샤르팡티에와 손잡고 <상상병 환자>라는 코미디 발레를 만들었다. 몰리에르는 이 연극의 주인공으로 출연했다가 무대 위에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이와 함께 코미디 발레의 운명도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몰리에르가 죽고, 륄리 마저 서정비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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