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의 문학 오페라

음악으로 그린 욕망과 파멸의 드라마

운우(雲雨) 2022. 1. 5. 17:28

세익스피어의 비극<맥베스>

베르디의 오페라<맥베스>

 

서양문학사를 통틀어 윌리엄 세익스피어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에 비견될 만하다. 세상을 떠난 지 수백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세익스피어는 여전히 우리 삶과 예술 속에 살아 있다. 그의 작품과 관련된 연구와 저술, 공연의 규모는 실로 엄청나다. 단행본이 대략 하루에 한 권씩 나오고 있으며, 관련 논문도 매년 수천 편씩 쏟아지고 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소설, 연극, 시, 영화, 음악들이 그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했다. 특히 문학 분야에서 세익스피어의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해도 관언이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소위 문학에서 종사하는 사람 치고 그의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세익스피어는 시공을 초월해 영원히 죽지 않는 거대한 산맥 같은 존재로 우리 곁에 살아 있다.

 

언어의 연금술사

 

윌리엄 세익스피어는 엘리자베스 1세가 통치하던 1564년 영국 남부의 작은 마을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 지역에서 제법 유지 행세를 하는 장갑 제조업자였다. 하지만 세익스피어의 유년 시절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으며, 1580년대 말쯤에 런던으로 진출해서 극작가 겸 단역 배우로 활동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익스피어는 1594년에 새로 설립된 궁내장관 극단Chamberlains men의 일원이 되었으며 1599년에 극단 동료들과 함께 템스강 남단에 골로브 극장을 짓고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가 속한 극단은 1603년에 즉위한 제임스 1세의 후원을 받으며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했다. 

세익스피어는 극단의 배우로 활약하며 무대에 오를 작품을 직접 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희곡은 현재 38편이 전해지는데, 모두 무대공연이라는 실용적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쓰였다. 희곡 중에는 공연보다 작품의 문학성을 강조한 이른바 ,읽히기 위한' 희곡도 있다. 하지만 세익스피어의 희곡은 어디까지나 공연을 위한 희곡이었다. 따라서 희곡을 연극 대본 정도로만 알고 있던 당대 관객들이 세익스피어 희곡이 지닌 문학적 가치를 어느 정도 인식했는지는 의문이다. 세익스피어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그를 '표절 작가'라고 부른다. 작품의 뼈대를 이루는 줄거리 중에 기존의 전설이나 신화, 혹은 역사적 사실들을 이리저리 짜깁기 해서 만든 것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익스피어의 작품이 지닌 진정한 가치는 줄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 생생하게 숨쉬는 인간상을 창조하는 능력과 그들의 대사를 통해 구현되는 놀라운 수사에 있다. 세익스피어는 자신이 무대에 기존 연극의 진부하고 상투적인 인물 대신 입체적이고 사실적인 인물들을 등장시켰다. 그리고 그들이 겪는 갈등과 고뇌, 감정들을 주옥같은 대사로 풀어냈다. 풍성한 시적 상상력과 비유, 상징을 통해 세상사의 이치와 인간의 본성을 꿰뚫어 묘사하는 세익스피어의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그는 언어의 연금술사였으며, 자신의 작품을 통해 수많은 대명사를 남겼다.

 

세익스피어의 비극<맥베스>

 

세익스피어는 비극과 희극에 골고루 작품을 남겼다. 비극 중에서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를 묶어 4대 비극이라 부른다. 이 중 <맥베스>는 대략 1605년에서 1606년 사이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4대 비극 중 가장 후기 작품으로, 역사가 홀린셰드의 <스코틀랜드 연대기>에 나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쓰였다. 스코틀랜드의 장군 맥베스는 동료 장군 뱅코와 함께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도중 세 명의 마녀를 만난다. 이때 마녀들이 이상한 예언을 한다. 글래미스의 영주인 그가 코더의 영주가 되고, 곧 스코틀랜드의 왕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뱅코의 자손이 왕이 된다는 예언도 한다. 맥베스는 처음에 마녀들의 예언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러나 곧 전령이 와서 왕이 그를 코더의 영주로 임명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마녀들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때 맥베스의 마음속에 자신이 스코틀랜드의 왕이 될 수 있다는 야망이 싹튼다. 한편 맥베스로부터 마녀의 예언을 전해들은 맥베스 부인은 불같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망설이는 남편을 부추겨 스코틀랜드 덩컨 왕을 살해하게 만든다. 왕을 죽이고 맥베스는 자신이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뱅코의 자손이 왕이 될 것이라는 마녀들의 예언이다. 결국 그는 자객에게 뱅코와 그의 아들을 죽이라고 하지만, 자객은 뱅코만 죽이고 아들은 놓치고 만다. 그 후 맥베스는 대신들이 모두 있는 연회장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뱅코의 환영을 본다. 놀라서 소리지르는 맥베스에게 맥베스 부인은 남자답지 못하다고 나무란다. 뱅코의 아들이 달아났다는 말에 불안해진 맥베스는 다시 한번 마녀를 찾아간다. 그 자리에서 마녀들은 맥터프를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그 말을 듣고 맥베스는 맥더프를 죽이려 하지만 실패하고, 대신 그의 아내와 아이들을 죽인다. 거듭되는 살인에 맥베스는 심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초반에 그토록 강인하던 그의 부인 역시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실성해 버린다. 결국 그의 부인은 죽고, 맥베스 역시 맥더프의 칼에 찔려 죽음을 맞는다.

 

음악의 세익스피어, 베르디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 Giuscppe Fortunino Francesco Verdi 1813-1901는 세익스피어의 열렬한 팬이었다. 머리맡에 늘 그의 희곡을 두고 틈나는 대로 읽으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어떻게 이토록 훌륭한 극본을 쓸 수 있을까? 인생은 어차피 한 편의 연극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우리 인간들의 심정을 이렇게 정확하게 표현했는지 정말 대단하다."

그러니 당연히 이 피끓는 드라마를 오페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겼을 것이다. 베르디는 세익스피어의 비극 중에서 <맥베스>와 <오셀로>를 오페라로 만들었다. <리어왕>도 작곡하려고 했는데, 대본작가와의 의견 차이로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당시 세익스피어의 비극 중에서는 <햄릿>과 <줄리어스 시저>가 더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복잡한 정치적 문제를 다루고, 등장인물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심리 변화를 중시하기 때문에 오페라로 만들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구조가 간결하면서도 비극성이 강렬하게 부각되는 <맥베스>와 <오셀로>를 오페라를 만든 것이다.

로시니, 벨리니, 도니제티 같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거징들이 무대에서 사라진 후, 1840년대부터 1890년대까지 50년 동안 이탈리아 오페라 무대는 베르디의 독무대였다. 오페라의 역사에 있어서 베르디는 매우 특별한 존재로 꼽힌다. 그는 오페라에서 진정한 의미의 드라마를 도입한 사람이다. 오페라가 드라마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히지만 그전까지 이탈리아 오페라는 극적인 요소보다 성악가의 아름다운 노래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극적인 구성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그렇고 그런 줄거리에 얹힌 ,음악,을 들으려고 오페라 극장에 갔다. 

그런데 베르디가 이런 세태에 반기를 든 것이다. 베르디는 연극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집념을 가진 작곡가였다. 그는 오페라에서 노래 못지않게 극적인 요소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노래와 오케스트라를 이와 적절하게 결합시키려고 노력했다. 멜로디를 살리기 위해 극적인 흐름이나 효과를 희생시키는 일도 하지 않았다. 오페라의 극적인 요소에 대한 베르디의 신념은 확고했다. 드라마가 활기가 있으면 음악은 자동적으로 따라온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런 신념 위에서 그는 연극적 가치와 음악적 가치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오페라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를 ,음악의 세익스피어'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베르디의 오페라를 살펴보면 그가 세익스피어의 비극같이 스케일이 크고 무거운 주제를 좋아했다는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가 <라트라비아타> 같은 여성 취향의 멜로물을 작곡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오페라 작곡가로서 베르디의 개성은 역시 <맥베스>나 <오셀로>처럼 스케일이 큰 비극에서 더욱 빛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깃털처럼 가벼운 소재와 음악으로 대중의 인기를 끌었던 로시니, 아름다운 아리아의 나열에만 신경을 썼던 벨리니,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비교적 소박한 주제를 다루었던 푸치니와 구별된다. 그런 의미에서 베르디는 가히 '오페라계의 소포클레스' 라고 할 만한 인물이다. 

<맥베스>가 초연된 것은 1847년, 베르디가 오페라 작곡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초기에 해당된다. 세익스피어의 원작에는 여러 인물들이 나오지만, 베르디는 이 중에서 맥베스, 맥베스 부인, 마녀들, 이렇게 세 가지 캐릭터에만 집중했다. 극의 구조를 단순화시키고, 극적인 대비를 더욱 선명하게하기 위해서이다. 이 중에서 물론 가장 중요한 인물은 주인공인 맥베스이다. 하지만 맥베스 부인 역시 극적으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오페라의 전반부에서는 오히려 남편을 능가하는 캐릭터를 보여준다. 이 두 사람은 탐욕의 덫에 걸려 결국 파멸로 치닫고 마는 비극적인 인간상의 전형이다. 이들의 맞은편에 마녀들이 있다. 마녀들은 비록 주인공은 아니지만 비극의 단초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배역이다. 멕베스와 그의 부인은 마녀들의 농간에 놀아나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탐욕을 부추긴 마녀들의 예언

 

베르디는 오페라 첫 장면부터 마녀를 등장시킨다. 세익스피어의 원작에는 마녀가 세 명 나오지만, 오페라에서 베르디는 여러 명의 마녀들이 나와 합창을 하도록 했다. 여기서 마녀들의 합창은 나머지 부분들과 음악적으로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 비극적인 분위기를 조장하는 어둡고 무거운 색조와는 대조적으로 경박하고 무심하다. 마치 아이들이 장난을 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맥베스>에서 마녀들은 "아름다운 것은 더러운 것, 더러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대사처럼 인간 세계의 기본적인 덕목이나 규율이 없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선과 악에 대한 인식이 없다. 아무 이유 없이 재미로 인간을 조롱한다. 맥베스나 맥베스 부인도 결과적으로 보면 이드이 부린 농간의 희생양인 셈이다. 

막이 오르면 마녀들이 깃털처럼 가볍고 사악한 목소리로 장난치듯 노래를 부른다.

 

뭐하다 왔니? 말해봐 수돼지를 잡고 왔지.

너는? 뱃사공 마누라가 갑자기 생각났어.

날 보고 욕을 하지 뭐야.

그 대가로 바다에 나가 있는 그 남편을 배와 함께 빠뜨리고 말거야.

내가 북풍이 불게해줄께.

난 거센 풍랑을 일으켜주지.

나는 배를 사주로 몰고 가겠어.

 

베르디가 작곡한 마녀들의 합창을 듣고 있으면 그 내용을 몰라도 마녀들이 어떤 존재인지 감각적으로 느끼게 된다. 그들의 노래는 경박한 멜로디에 실려 허공을 날아다닌다. 짐짓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들의 악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한다. 

곧 이어 북소리가 맥베스의 등장을 알리자, 마녀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하며 앞으로 맥베스의 운명을 가지고 장난을 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맥베스와 뱅코 장군이 등장하자 마녀들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두 사람은 수염이 달린 마녀들의 기이한 모습에 놀란다. 하지만 이들이 더 놀란 것은 마녀들의 입에 나오는 말이다. 

 

글래미스의 영주 맥베스 만세!

코더의 영주 맥베스 만세!

스코틀랜드의 왕 맥베스 만세!

 

마녀들은 음산하고 기이한 목소리로 이렇게 예언한다. 세 개의 예언을 모두 같은 멜로디로 부르는데, 반복할 때마다 음역이 점차 높아진다. 이렇게 상승하는 음으로 마녀들은 맥베스 마음속에 숨어 있는 욕망을 부추긴다. 맥베스가 글래미스의 영주인 것은 사실이지만, 코더의 영주, 더 나아가 스코틀랜드의 왕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만약 이것을 사실로 만들려면 엄청난 모반을 감행해야 한다. 그것은 가슴 떨리는 위험과 엄청난 비극을 예고하는 일, 여기서 몇 개의 음으로 느릿하게 전개되는 마녀들의 기이한 노래는 맥베스 앞에 닥칠 운명의 비밀스러운 음모를 암시한다. 

맥베스가 마녀들의 엄청난 예언을 듣고 전율하는 사이, 뱅코가 마녀들에게 자신의 미래도 예언해 달라고 한다. 마녀들은 뱅코에게 "왕이 되지는 못하지만 왕의 아버지가 되실 분"이라고 예언한다. 바로 이 말 한 마디로 맥베스와 뱅코의 운명이 엇갈린다. 맥베스가 왕이 된다는 것과 뱅코의 아들이 왕이 된다는 것은 결코 동시에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동지였던 두 사람의 관계는 마녀의 이 한 마디로 순식간에 피를 부르는 관계가 되고 만다. 

맥베스와 뱅코는 마녀들의 예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마녀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장난질에 불과하다. 엄숙하고 기이한 목소리로 예언을 하고 난 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장난스럽게 "맥베스, 뱅코 만세" 하고 깔깔거리면서 사라진다. 바로 여기서 심각한척 하지만 결국 속임수를 쓰고 있는 마녀들의 이중성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맥베스는 반신반의하고 있다. 그는 의심에 가득찬 목소리로 "참으로 기이한 말이로고" 라고 중얼거린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우렁찬 팡파르 소리와 함께 군인들이 들어온다. 그들은 왕이 맥베스를 코더의 영주로 임명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마녀들의 두 번째 예언이 실현된 것이다. 

자기가 코더의 영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맥베스는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가슴 저 밑으로부터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야심을 억제하지 못한다. 이런 맥베스를 바라보는 뱅코는 비극적 결말을 걱정하는데, 이런 두 사람의 각기 다른 생각을 베르디는 교묘하게 얽힌 2중창으로표현했다. 

마녀들은 두 사람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들의 의도가 맞아떨어졌다는 것을 기뻐하며 <그들이 떠나간다!S'allontanarono!>를 부른다.

 

그들이 간다. 우리 폭풍우가 불고천둥이 칠 때 다시 모이자.

그들이 간다. 우리도 가서 비극적인 운명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리자.

우선은 맥베스가 회심의 미소를 짓겠지.

그리고 나서 우리의 예언을 들려주는 거야.

자, 도망가자. 도망가. 그래 도망가자. 도망가.

 

이 장면은 본래 세익스피어의 원작에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마녀들의 합창을 짐어 넣음으로써 관객들은 마녀들의 실체를 보다 정확하게 인식하게 된다. 마녀들은 자기들이 일을 저질러놓고 맥베스의 비극적인 운명이 실현될 때까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야욕과 의구심으로 몸을 떠는 맥베스의 어둡고 무거운 노래와는 달리 마녀들의 합창은 밝고 가볍다. 그 경쾌한 울림은 자기들이 인간의 운명을 조장하고, 그것을 즐기는 사악한 영혼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욕망의 화신 맥베스 부인

 

전쟁터의 맥베스는 집에 있는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 마녀들로부터 들은 얘기를 전한다. 남편의 편지를 읽고, 맥베스 부인은 욕망에 ㅅ로잡힌다. 베르디의 <맥베스>에서 맥베스 부인은 아주 중요한 캐릭터다. 오페라 전반부에서 남편보다 더 강렬한 욕망과 강인한 성격을 가진 철의 여인으로 나온다. 베르디가 가장 신경 쓴 배역도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욕망의 화신인 맥베스 역에 아름답고 고운 목소리의 소프라노를 기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거칠고 무겁고 강렬한 목소리여야만 이 무시무시한 배역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맥베스 부인은 후반부에서 실성한 연기도 해야하는데, 초연 때 연출을 맡은 베르디가 맥베스 부인 역을 맡은 마리아나 바르비에리에게 몽유병 환자를 보고 연기 연습을 하라고 숙제를 내주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남편의 편지를 읽은 맥베스 부인은 <빨리 돌아오세요!Vieni! t'affrct-ta!>라고 노래한다.

 

빨리 돌아오세요.차가운 당신의 가슴을 제가 뜨겁게 해드리지요.

두려워하지 않고 일을 성사시키도록 당신께 용기를 주겠어요.

예언자들이 스토틀랜드의 왕위를 약속했거늘 주저할 게 뭐 있죠?

그 선물을 받으시고 왕좌이 앉아 통치하세요.

 

그녀는 남편의 마음이 약해지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래서 자기의 강한 정신을 남편의 귓속에 퍼부어주겠다고, 황금의 왕관을 방해하는 그 모든 것들을 혀의 힘으로 쫓아버리겠다고 다짐한다. 여기서 소프라노가 부르는 강력한 아리아는 맥베스 부인의 강인한 성격, 권력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권력을 향해 올라가도록 다그치는 단순하고 강력한 리듬이 압권이다. 그녀는 왕이 되기 위해 맥베스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암시한다. 결국 맥베스는 덩컨왕을 암살한다. 하지만 나약한 그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공포에 떤다. 맥베스가 짧은 단발마적 외침으로 공포를 나타내는 반면, 맥베스 부인은 매우 복잡한 리듬을 구사하며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도 지략에 능숙함을 보여준다. 이 장면에서 그녀는 정교한 목소리로 공포에 떠는 맥베스를 질책하면서 상황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간다. 

바로 이 부분에서 베르디는 연극적인 면을 강조했다. 가수로 하여금 어둡고 공포에 싸인 목소리로 대사하는 듯 노래하도록 했다. 가수가 대사의 연극성을 완벽하게 익히도록 무려 150번이나 영습을 시켰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가수의 대사가 관객에게 정확하게 전달되도록 오케스트라도 최대한 조용히 연주하게했다고 한다. 

그다음 날 아침, 덩컨 왕이 살해되었다는 것을 안 사람들은 경악한다. 바로 이 장면에 베르디는 원작에 없는 합창의 절규를 집어 넣었다. 

 

지옥이여 입을 벌려

이 세상을 삼켜버려라. 

하늘이여, 전체를 알 수 없는 

저주 받을 살인자에게

천벌을 내리거라.

 

사람들은 덩컨 왕이 당한 처참한 운명을 애통해하며 극악무도한 미지의 살인자에게 저주를 내린다. 그 저주가 마치 지옥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다. 극적인 효과가 너무 강렬해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다. 이런 강렬한 극적 효과는 대사 위주로 전개되는 연극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오페라만의 고유한 영역이다. 

덩컨은 죽이고 맥베스는 마녀의 예언대로 스코틀랜드의 왕이 된다. 하지만 왕이 된 뒤에도 뱅코의 자손이 왕이 될 것이라는 마녀들의 예언에 불안해한다. 나약한 맥베스는 부인의 사주를 받아 뱅코와 그 아들을 살해하기로 한다. 

맥베스가 자객을 보낸 뒤, 궁궐에서는 맥베스의 즉위를 축하하는 연회가 벌어진다. 맥베스 부인은 즐거운 표정으로 축배의 노래<최고의 술로 잔을 채우자.Sicolmi il calice>를 부른다. 바로 이때 자객이 돌아와 뱅코는 죽고, 그의 아들은 달아났다는 소식을 맥베스에게 전한다. 뱅코가 죽었다는 소식에 안심한 맥베스는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뱅코가 아직 참석하지 않은 것이 유감이라는 취지의 말을 한다. 그런데 그가 의자에 앉으려는 순간 눈 앞에 피투성이가 된 뱅코의 환영이 나타난다. 소스라치게 놀란 맥베스가 공포에 질려서 소리치자 맥베스 부인이 나서서 사람들을 안심시킨다. 이 장면을 지배하는 인물은 맥베스 부인이다. 베르디는 이 장면에서 맥베스 부인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맥베스를 남자답지 못하다고 비난하고, 사람들에게 그의 정신착란이 일시적인 발작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그러면서 건배를 제의하는 노래를 아주 무관심한 표정으로 반복해서 부른다. 

여기서 맥베스 부인이 부르는 건배의 노래는 간결하면서도 강인하다. 어떠한 곤경 앞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반면에 뱅코의 환영에 놀란 맥베스의 목소리는 공포에 가득차 있다. 완전히 기진맥진해진 맥베스를 보고 하객들은 "이런 불길한 일이 있나. 이 나라가 이제 도둑의 소굴이 되었구나"라고 노래하고, 맥베스 부인은 남편에게 환영에서 벗어나 좀 더 강해질 것을 요구한다. 이 부분은 2막의 마지막 장면으로, 합창과 맥베스, 맥베스 부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음악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3막에서 전개될 참옥한 비극을 예고한다. 

 

마녀들의 두 번째 예언

 

세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마녀들은 사악함의 상징이다. 그 사악한 영혼은 인간의 탐욕을 부추겨 결국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만다. 그런 다음 희생양이 된 인간의 참옥한 운명을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그들은 욕망을 가진 인간이라면 결코 자신들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처음부터 비극적 종말을 예견하고, 일이 얼마나 드라마틱하게 흘러가는지 호기심에 가득한 눈으로 바라본다. 마녀들은 그저 재미를 위해 인간의 운명을 가지고 농간을 부리고, 인간은 탐욕이라는 스스로의 덫에 걸려 허우적거리다 결국 파멸하고 만다. 베르디는 자신의 오페라 <맥베스>에서 이런 마녀와 인간의 상반된 입장을 음악으로 날카롭게 대비시키고 있다. 여기서 마녀들의 합창은 깃털처럼 가볍다. 그렇게 가벼운 노래를 부르며 인간의 운명을 가지고 장난을 친다. 반면 탐욕스러운 맥베스 부인의 노래는 강렬하고 드라마틱하다. 그녀는 강하고 거친 목소리로 남편에게 좀 더 강해질 것을, 좀 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아내에 비해 정신이 쇠약한 맥베스는 두려움에 가득찬 표정으로 어둡고 무거운 노래를 부른다. 여기서 맥베스 역은 바리톤이 맡는다. 바리톤은 테너보다 음역이 낮고 음색도 무겁다. 고뇌하는 비극의 주인공에게 적합한 목소리다. 베르디의 비극에서 바리톤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1막과 2막에서 마녀들의 의도에 충실하게 따르는 사람은 맥베스가 아니라 맥베스 부인이다. 그녀는 잔혹한 살인을 저지르고 드려움에 떠는 남편을 질책하고 격려하면서 앞으로 더욱 잔인해질 것을 주문한다. 마녀들은 모든 일이 자신들이 의도했던 대로 굴러가자 이제 맥베스에게 미래의 일을 미리 보여줄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3막에서 마녀들은 자신들의 예언에 당황하고 두려움에 떨 맥베스의 모습을 상상하며 즐거운 노래<배란기 암고양이가 세 번 울었다Ter volte miagola>를 부른다.

 

배란기 암고양이가 세 번 울었다.

오디새가 세 번 구슬피 울었다.

바람이 불자 고슴도치가 세 번 울었다.

이제 때가 왔다.

자 모두 빨리 가마솥 짓자.

저어서 강력한 마법의 액체를 만들자.

자매들아 열심히 일하자. 

벌써 김이 나기 시작하네.

부글부글 거품이 생기기 시작한다. 

너는 독초를 먹고 자란 두꺼비를 넣고

너는 황혼녘에 캐어내어 수염을 뽑은

야생 자두나무의 뿌리를 넣으렴.

이 모든 것을 지옥의 가마솥에 잘 익히자.

넌 독사의 혀를

넌 박쥐의 털을

넌 원숭이의 피를 

넌 개의 이빨을

지옥의 수프에 모두 넣고 끓여라

넌 태어나자마자 목 졸려 죽은 어린 아이의 손가락을

넌 타타르인의 입술을 

넌 이교도의 심장을 

이 모든 것을 넣고 지옥의 스프를 끓여라.

그리고 영들이여

검고 희고 빨갛고 파란 영들이여

이 모든 것들을 다시 섞어주시오.

 

마녀들은 세상의 모든 사악한 것들을 지옥의 가마솥에 집어넣고 강력한 마법의 스프, 지옥의 스프를 끓인다. 

마녀들이 한바탕 지옥의 향연을 벌이고났을 때, 자신의 미래에 불안을 느낀 맥베스가 이들을 찾아온다. 그는 자신의 앞날을 얘기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때 세 개의 환영이 나타난다. 환영들은 차례로 맥베스에게 예언한다. 첫 번째 환영은 맥더프를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두 번째 환영은 잔인하고 대담하게 행동하라면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자는 맥베스를 해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 다음에는 왕관을 쓴 어린 아이의 환영이 나타나 버넘의 숲이 쳐들어오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그를 무찌를 수 없을 것이라 얘기한다. 세 명의 영혼이 나타나 맥베스에게 예언을 하는 이 장면은 기이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풍긴다. 베르디의 음악은 이렇게 비현실적인 상황을 반음계적 진행과 동음 반복, 어두운 화음, 적절한 강약의 조절을 통해 아주 효과작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환영들이 맥베스에게 예언하는 대목에서 베흐디의 음악은 저승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기이하고 소름끼친다. 환영들은 같은 음과 리듬으로 "오, 맥베스. 오, 맥베스. 오, 맥베스." 이렇게 세 번 부른 다음, 이승에서 들을 수 없는 음산하고 섬뜩한 음조로 그의 앞날을 예언한다. 

맥베스는 환영들의 예언에 안도의 숨을 쉬지만, 여전히 불안감을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한다. 뱅코가 왕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예언 때문이다. 결국 그는 마녀들에게 그 예언이 정말 맞느냐고 물어본다. 마녀들은 맥베스에게 뱅코의 자손이 왕이 되는 환영을 보여준다. 그것을 보고 맥베스는 두려움에 떤다.

사실 마녀들이 노리고 있던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그토록 허황된 욕망에 사로잡힌 맥베스가 결국 자신의 욕망이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뱅코와 그 자손들의 환영을 보고 맥베스는 기절한다. 기절한 맥베스를 보고 마녀들이 본색을 드러내며 좋아한다. 세익스피어의 원작에서 마녀는 이렇게 말한다. 

 

(맥베스)가 왜 저렇게 놀랬지? 자, 얘들아. 그를 즐겁게 해주고 최고로

좋은 걸 보여주자. 나는 공기로 음악을 뽑을 테니 너희는 환상적인 윤

무를 쳐봐. 

(음악, 마녀들이 춤추고 사라진다.)

 

세익스피어의 자문대로 베르디는 이 대목에 마녀들의 합창 <물의 요정과 공기의 요정들이여 Ondine e silhdi>을 집어 넣었다.

 

물의 정령과 공기의 요정들이여 

하얀 날개로 

저 창백한 이마를 부채질해주오.

부드러운 바람을 일으켜서 

그의 지친 혼과 신경을 위로해 주오.

 

쓰러진 맥베스를 보고 마녀들은 이제는 그를 위로해 주자고 노래한다. 그의 파멸을 보고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세익스피어는 이 대목에서 마녀들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도록 했다. 원작에 자문으로 제시된 음악이라는 단어가 베르디의 오페라에서 실제 음악으로 실현되었다. 이 대목에서 마녀들이 부르는 합창은 역시 가볍고 경쾌하다. 한 인간을 파멸에 빠뜨린 후, 사악한 영혼들은 이토록 가벼운 음악으로 그 통쾌함을 만끽하는 것이다. 

잠시 후 맥베스 부인이 나타난다. 깨어난 맥베스는 부인에게 마녀들이 보여주었던 환영에 대해 얘기한다. 두 사람은 왕위를 지키기 위해 맥더프도 죽이고, 뱅코의 자손도 없앨 것을 다짐한다. 바로 이 시점부터 그전까지 나약하기만 하던 맥베스가 부인 못지 않은 욕망과 배짱을 지닌 인물로 변모한다. 맥베스 부인은 이제야 남편이 예전의 용맹스러운 면모를 되찾았다고 기뻐한다. 여기서부터 탐욕스러운 배역의 무게 중심이 맥베스 부인에서 맥베스 쪽으로 옮겨간다.

 

합창 음악의 백미 <억압받는 조국이여!>

 

기존의 작품을 오페라로 만드는 경우, 원작과는 다른 장면이 들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순수한 음악을 위한 장면이다. 오페라는 어쨌든 오페라이기 때문에 음악을 위한 여지는 남겨두어야 한다. 베르디의 <맥베스>에도 역시 이런 부분이 나온다. 음악적으로 독립적인 성격이 강한 아리아나 합창이 대개 이런 성격을 갖는다. 맥터프가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르는 비탄 어린 아리아 <오! 나의 아이들! 아, 아버지의 손O! hgli, ohgli miei! Ah, lapaterna mano>이나 민중이 전쟁으로 얼룩진 조국의 운명을 애통해하며 부르는 <억압받는 조국이여!patriaoppressa!>같은 곡이 그런 것이다. 특히 세익스피어 원작에 나오는 스토틀랜드 귀족 로스의 대사를 변형한 <억압받는 조국이여!>는 베르디 합창음악의 진수를 맛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런 베르디의 음악으로 세익스피어의 비극은 더욱 비극다운 면모를 띠게 된다.

 

욕망의 끝, 비극의 종말

 

극의 전반부에서 맥베스보다 강인한 정신력으로 자신의 욕망을 불태웠던 맥베스 부인은 후반부에서는 정신병자가 되어 나타난다. 세익스피어 원작이나 베르디의 오페라나 맥베스 부인이 정신적으로 무너져가는 과정은 보여주지 않는다. 이런 것을 생략한 채 갑자기 정신병자로 전락한 모습으로 나타나 보는 사람을 당혹하게한다. 

남편을 사주해 덩컨 왕을 죽이고 뱅코를 죽인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결국 미쳐버리고 안 맥베스 부인. 그녀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직도 얼룩이 남아 있네.

제발 사라져라. 저주받은 얼룩이여.

하나둘, 때가 왔어요.

떨고 계시나요? 못 들어가시겠나요?

용사가 이렇게 겁이 많으면 어떻게 해요?

창피한 줄 아셔야죠.어서 어서 서두르세요.

그런 노인한테서 피가 이렇게 많이 나올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상상이나 했겠느냐고요.

덩컨 왕도 한 여인의 남편이자 아버지가 아니었나요?

이 손은 이제 결코 다시 깨꿋해질 수 없는 걸까요?

아직도 손에서 피비린내가 나는구나.

아라비아의 향수로도 

이 작은 손 하나 깨끗하게 하지 못하네.

잠옷을 입으세요. 어서 빨리 피를 닦아내세요.

뱅코는 죽었어요. 죽은 자는 아직 무덤에 잠들어 있답니다.

이제 침실로 가요. 이미 저지른 일 어쩔 수 없잖아요.

 

이 몽유병 장면에서 베르디의 음악은 특유의 드라마틱한 빛을 발휘한다. 그는 음악의 문맥이 연극적 문맥과 일치하도록했다. 저음부에서 같은 음형으로 반복되면서 상승하는 현악기의 절박한 움직임은 죄의식에 사로잡힌 맥베스 부인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반영한다. 

베르디는 관악기의 밝은 음색을 삭제하고, 클라리넷과 잉글리시 호른을 사용해 암울한 분위기를 만들었디. 이 장면에서는 특히 인상적인 리듬을 통한 성격 묘사가 압권이다. 숨 가쁘게 오르다가 다시 반음씩 주저앉는 멜로디가 서서히 파멸해가는 맥베스 부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생의 마지막 독백

 

맥더프의 공격에 맞서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던 맥베스에게 하인이 들어와 부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알린다. 그러나 맥베스는 왕비도 언젠가는 죽어야겠지. 그런 소식을 한 번은 들어야할 것 아니냐?"라고 한 다음, 다음과 같은 명대사를 읊는다. 

 

내릴, 또 내릴, 또 내릴

그렇게 시간은 하루하루 한 걸음씩

역사의 마지막 순간까지 치닫는다.

모든 어제들은 우매한 인간들에게 

티끌로 돌아가는 죽음의 길을 

횃불처럼 밝혀준다.

꺼져라. 꺼져, 무상한 촛불이여!

인생이란 걸어가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

자신이 등장할 때에는 

무대 위에서 거드름 피우지만 

무대 뒤에서는 누구도 말을 들어주지 않는 

처량한 배우일 뿐이다.

 

이 대산ㄴ 죽음ㅇㄹ 눈앞에 둔 맥베스가 마지막으로 하는 가장 시적인 대사이다. 세익스피어 작품의 주인공들은 비록 악인이라도 누구나 이런 인생달관의 철학적 경지에 올라 있다. 스스로의 악행에 의해 파멸하면서도 그것이 인간의 피할 수 없는 한계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처럼 명언들을 쏟아낸다. 무대 위의 배우가 죽기 직전에 멋진 유언을 남기는 것 처럼, 오페라 가수에게도 죽기 전에 감동적인 아리아를 불러야할 의무가 있다. 극적으로 보자면 바로 이 장면이 이런 아리아가 들어가기에 가장 적합한 장면이 아닐까 싶다. 베르디는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이 대목에 감동적인 아리아<연만, 존경, 사랑Pieta, rispetto, amore>을 집어넣었다.

 

연민, 존경, 사랑

그리고 말년의 위안 

어느 누구도 나처럼 늙은이에게 꽃을 바치니 않으리.

이제 무덤에 덕담 한마디 바랄 수 없게 되었구나.

오로지 가혹한 저주! 아!

저주만이 내 진혼곡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토록 절망적인 순간에도 맥베스는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치 않는다. 바로 환영들이 나타나서 이야기한 여인에게서 태어난 자는 결코 맥베스를 해칠 수 없다.No man born from a woman  will cver defear you라는 말과 버넘 숲이 공격해 오지 않는 한 그가 무사할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마녀들의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곧 밝혀진다. 맥더프의 군대는 버너 숲에 있는 나뭇가지를 꺾어 들고 맥베스를 공격한다. 정말로 버너의 숲이 그를 향해 쳐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드디어 맥더프와 맥베스가 한판 승부를 벌이는 순간이 다가왔다. 맥더프는 한칼에 맥베스를 찔러 쓰러뜨린다. 맥더프는 만삭이 되기도 전에 어머니 배를 가르고 나온 인물로 엄밀하게 따지자면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닌 것이다. 

 

마녀들이 속임수를 썼구나! 이젠 믿을 수 없다. 양다리 걸치는 아리송한 

말로 사람을 홀려 약속을 지키는척 하더니 막판에 가서 희망을 깨버리는구나!

 

맥베스는 이렇게 절규한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는 마녀들의 농간에 희생된 것이다. 맥베스는 맥더프의 칼에 쓰러지고, 오페라는 승리를 축하하는 스코틀랜드 망명객들의 힘찬 합창으로 끝을 맺는다.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게 하는 아리아

 

세익스피어의 <맥베스>는 피를 부르는 연극이다. 등장인물들의 눈에 모두 핏발이 서 있다. 맥베스와 그의 부인의 눈은 탐욕으로 이글거리고, 가족이 몰살하는 비극을 겪은 맥더프의 눈은 분노와 복수심으로 이글거린다. 처음에 소심하던 맥베스는 살인을 거듭할수록 점점 대담해지고 잔인해진다. 비극적 종말을 어느 정도 예견하고 한탄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악행을 뼈저리게 뉘우치지도 않는다. 결국 그의 아내는 미쳐서 죽고, 그 역시 맥더프의 손에 죽음을 맞는다. 탐욕스러운 인간 맥베스와 그의 아내가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죄에 합당한 벌을 받은 것이다. 해석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결론이다.

세익스피어의 원작에 비해 베르디의 오페라는 좀 더 심오한 정서적 깊이를 갖는다. 베르디는 맥베스를 그저 탐욕스러운 인간으로 그리지 않고 악행을 저질렀음에도 마음 한구석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책하는 인간, 미래에 닥칠지 모를 재앙을 생각하며 두려움에 떠는 나약한 인간으로 그렸다. 특히 그 마지막에 부르는 회한에 찬 아리아는 맥베스라는 인간에 대해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한다.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맥베스가 응징의 대상이 아니라 동정과 연민의 대상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절대로 악한 노래가 아니다. <오셀로>의 악한 이아고의 아리아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심오한 울림과 깊은 호소력을 지닌 영혼의 노래이다. 베르디는 이 아리아 한 곡으로 그동안 맥베스가 했던 온갖 악행들을 순화시켰다. 

맥베스에서 가족을 모두 잃고 절규하는 맥더프의 아리아 역시 정서적 순화 과정을 거쳤다. 여기서 맥더프는 맥베스에 대한 복수심보다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더 절실하게 드러낸다. 신에게 복수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지만, 피끓는 복수심이나 적개심을 격렬하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베르디가 오페라에서 연극적인 요소를 중요시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이탈리아 오페라의 본령인 노래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이 오페라에 나오는 감동적인 아리아와 합창들은 그가 여전히 모국인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 비극에서 아리아가 지닌 극적인 성격과 정서의 음영이 더 짙어진 것은 사실이다. 베르디는 기존 오페라 관객들이 원하는 음악을 충분히 들려주면서도, 동시에 오페라의 극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조성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기존의 이탈리아 오페라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연극적인, 그리고 바그너의 오페라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성악적인, 그런 오페라가 탄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