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선비정신이 살아 있어야 문학(文學)이 산다.

운우(雲雨) 2011. 7. 28. 01:09

 

약 6년 전이다.

한 문학지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 글을 봤는데 글속의 내 마음이 너무 맑은 사람 같아 전화를 했노라고 했다.

 

“선생님 한 번도 뵙지를 못했는데 이렇게 불쑥 전화를 드려 죄송합니다. 선생님 글을 읽어보니 마음이 너무 맑은 분

같아 무례한줄 알면서도 전화를 드렸습니다.

보통 글을 읽어보면 글을 쓴 작가의 마음을 대략은 알 수가 있어요.”

 

“전 생각하는 것처럼 마음이 그렇게 맑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글속에 그 글을 쓴 사람의 마음과 성격이 나타나 있는걸요.”

 

“허허허”

 

나는 할 말이 궁해 허허대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저를 좀 도와주세요.”

 

“뭘 어떻게 도와 달라는 겁니까?”

 

“선생님께 사실을 말씀 드릴게요. 지금 한국문단은 썩었어요. 너무 썩어 악취가 풍길 정도니까요. 예전엔 좀 덜했는데

요즘은 문학지 발행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니 너도나도 문학지 만들기에 혈안 됐어요. 문학지를 발행한다 해놓고

실력 없는 사람들을 등단시켜 준 댓가로 돈을 챙기는 겁니다. 즉 말하자면 등단 장사를 하는 거지요. 또 거기에 각종 명목

을 부쳐 여러 가지 문학상을 만들어 돈을 받고 상을 팔고 있는 거지요. 물론 실력을 떠나 돈을 주는 사람들에게 무슨

문학상이네 하며 명목을 부쳐 상을 팔아먹고 있는 겁니다. 문학지란 명목이 붙은 문단에서 쏟아져 나오는 작가가

한 달이면 얼마인지도 모를 정도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어느 정도 알려진 문학지에서 편집장을 맞고 있었던 적 있었어요.

그때 회장이란 사람이 보자고 하더군요. 여러 가지 문학상이 있으니 팔라는 지시를 하는 것이었어요. 나는 행사 때마다

그런 강요를 받았지요. 저는 더 이상 신성한 문학을 썩게 방치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문학지 대표에게

사표를 내고 과감하게 뛰쳐나왔습니다. 정말 내가 어려서 꿈꿔 왔던 아름다운 책을 만드는 문단을 만들고 싶어서였지요.

순수 문학지를 지향하는 문단을 만들었으나 모든 것은 뜻대로 되지를 않았어요. 순수 문학지를 만든다는 것은 고행의

길이었지요. 선생님 저 좀 도와주세요. 정말 좋은 문학지를 만드는 문단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돈 없고 실력 있는 사람이

등단하는 맑은 풍토를 만들고 싶어요. 선비정신이 살아 숨 쉬시는 작가들을 발굴해 한국문단을 바르게 세우고 싶습니다.”

 

나는 선비정신이 살아 있는 훌륭한 문단을 만들고 싶다는 말에 마음이 끌렸다.

선비정신이 살아 있다면 앞에 열거한 모든 말이 필요 없는 것이다.

선비정신에 모든 것이 포함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비정신이란 이런 것이다.

 

 

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이란 말이 있다.

말인즉 가난함 속에서도 바른 삶을 중히 여기며 산다는 뜻이다.

비록 살림살이가 어렵더라도 물욕에 눈이 멀어 선비의 도(道)를 벗어나지 않으며 곤궁함으로 인해 가볍게 스스로의 품격을

잃지 않을 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의 삶에서도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청빈한 삶을 살았던 선비들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요즘의 선비를 말하라 하면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선비일 것이다.

즉 말하자면 소설가, 수필가, 시인,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쓰는 사람들인 것이다.

언제인가 나는 독일인 쇼펜하우어의 문장론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어느 나라든 문학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집단이 있어 문학인의 품격을 스스로 떨어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요즈음 우리 문학 집단에도 신성해야할 문학에 돈이 개입이 되어 있음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여기저기서 썩은 악취가 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는 등단이라는 것을 할 수도 없는 자가 돈의 힘을 빌려 작가라는 명함을 들고 어깨를 들먹이며

손톱만큼도 안 되는 알량한 지식으로 자신의 적이라고 생각이 들면 무지막지하게 철 펜을 휘두르는 난폭한 짓을 서슴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이 문단에 함께 하는 한 한국문단의 앞날에 여명(黎明)이 언제 밝아 오려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우리의 문학인들이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깨끗한 문학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 문학이 그리 어둡지 만은 않다는 생각이다. 그 사람들은 지금도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 택한 선비의 길을

두려움 없이 묵묵히 걷고 있다.

거부구난(拒斧救難)은 사는데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선비는 부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 읽고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며 자연의 이치와 인간이 살아갈 길을 고민하는 것이 선비가 행할 도리다. 그리고 현실의 잘잘못을 비판하며 사는

것이 지조 높은 선비의 삶이다. 우리 문학이 더 맑아지고 발전 하려면 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의 정신이 깃든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그래야 썩은 악취가 진동을 하는 한국 문단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고 언젠가는 노벨문학상을 품에 안을 날이

자연스럽게 찾아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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