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 교수의 고구려 이야기]<10> ‘황금의 땅’ 고구려… 전쟁 나선 수만대군 갑옷도 번쩍번쩍
평양시 진파리 7호무덤에서 나온 해뚫음무늬 금동관 장식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윤석하 사진작가가 촬영한 것이다.
윤명철 교수
고구려는 무려 700여 년 동안 서북방으로는 군사대국인 북방유목종족과 서남방으로는 정치 강대국인 중국지역과 경쟁하면서 강대국으로 존재했다. 농업, 목축업, 어업이 발달하였고, 이를 뒷받침할 토목공학, 과학, 군사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했던 가장 강력한 토대가 있었으니 바로 풍부한 자원이었다. 평양시 청암리 토성에서 나온 금동관의 모습. 조선유적유물도감에 수록돼 있다.
고구려는 압록강 남쪽 운산이라는 곳에 이미 금광을 가지고 있었으나, 광개토대왕이 황금의 산지인 부여를 점령하면서 진정한 황금의 나라로 부상했다. 황금의 땅 고구려는 이민족들로 하여금 끝없이 군침을 돌게 한 매력적인 땅이었다. 그래서 수시로 침략했고 금제 유물을 찾아 무덤을 파헤치곤 했다. 중국 집안시 광개토태왕릉 구역에서 나온 말 등자.
한편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1904년에 벌어진 러일전쟁에서 해성, 요양 같은 철 광산지대에서 전투가 치열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만주를 점령해 세운 안산 제철소에서 생산된 제품들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일으켰고, 이후 중국은 1970년대까지 이곳을 경제발전의 견인차로 삼았을 정도였다. 고구려는 모피가공업이 발달해서 옷이나 무기는 물론이고 신발까지도 황색가죽신을 신을 정도였다. 이것들은 중요한 수출품이었다. 동천왕이 오나라의 손권에게, 장수왕이 남제에게 보낸 선물도 담비가죽이었다. 훗날 발해인들은 호랑이가죽 표범가죽 곰가죽 담비가죽, 심지어는 돼지가죽 다람쥐가죽까지도 주변 국가들에 수출했다. 장수왕 시대에 전해준 모피기술은 일본 숙피(熟皮)기술의 시조가 되기도 했다. 17세기 이후 러시아가 우랄 산맥을 넘어 동토의 땅인 동시베리아로 진출한 이유 중의 하나도 국가의 재정을 위해 모피, 그중에서도 담비가죽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만주의 숲과 그 안에 서식하던 많은 동식물들은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데에 또 하나의 중요한 자원이었던 것이다. 역사상의 대전쟁들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자원 확보를 놓고 벌어진다. 한국은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세계 10위의 에너지 소비 국가이다. 철, 중석, 희토류 등의 지하자원은 대부분 북한에 매장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저 바라만 보아야 하는 상황이다. 오히려 중국이 이를 실어 나르고 있다. 또 과거 고구려 영토였던 중앙아시아에는 석유, 천연가스, 우라늄 등이 엄청나게 매장되어 있는데, 혈연 언어문화가 가까운 우리는 정작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 남북통일과 중앙아시아 진출, 이는 자원부국으로 강대국의 반열에 들었던 고구려가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윤명철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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