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상고사

고구려의 삭감된 연대가 100년 이상 120년

운우(雲雨) 2014. 10. 2. 19:48

 

흔히 고구려의 역사는 기원전 27년에 고주몽에 의해 건국되어 서기 668년동안 705년동안이라고 하고 있다. 가장 오래된 역사서라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그렇게 적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구려의 연조가 실제로는 100~200여년 가량 더 있었다는 기록이 적지 않게 등장하고 있다. 이미 조선 후기 실학자들과 한말 단재 신채호에 의해 오래전부터 주장되어온 주장이다.



▲ 민족 기록화

고구려의 건국연대가 알려진 것보다 휠씬 높다는 주장의 증거를 보면

첫째, '고구려가 900년을 채우지 못한다'는 비서(秘書)가 있는데 올해(668)가 고구려가 세워진지 900년째 된다는 이세적이 당고종에게 했다는 말이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에도 실려져 있는데 이기록대로라면 고구려의 건국연대는 기원전 332년이 된다.

둘째, 신라의 문무왕이 고구려의 옹족 안승을 신라 귀족으로 책봉하면서, "공의 태조가 덕을 쌓고 공을 세워 자손이 상승하며 개척한 땅은 천리나 되고 연조는 800년"이라고 말한데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따르면 광개토호태왕이 시조 동명성제로부터 제 13대째라고 되어 있으나 광개토호태왕 비문에는 제 17대왕으로 나타나 있어 고구려 왕계에서 4대나 빠진 것이 확인되는데, 따라서 거기에 해당되는 고구려의 역년이 삭감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는 것이다.



◀ 단재 신채호

신채호는 고구려의 삭감된 연대가 100년 이상 120년에 이른다고 보았다. 그 이유로는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킨 신라가 자신의 건국이 두 나라에 뒤짐을 두려워하여 "기록상의 세대와 연조를 삭감하여 모두 신라 건구 이후의 나라로 만들었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고구려의 연조를 백몇십년이나 삭감시키고 보니 신라와 아무란 관계가 없는 동부여 · 북부여는 물론 백제 · 가야 · 옥저 등의 나라들 연대까지 삭감하게 되어 한국사의 전체적인 체계가 뒤틀렸다고 주장했다.

또 후한의 광무(光武)와 같은 시대라는 고구려 3대 대주류왕, 곧 고구려 본기의 대무신왕(大武神王)을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올리면서 그가 전한의 전성기를 이룩한 한무제를 격퇴시킨 민족의 영웅으로 부각시켰다.

무제가 침입한 조선은 둘인데, 한서(漢書) 식화지에, "무제가 즉위하고 수 년만에 팽오가 예맥조선(濊貊朝鮮)을 쳐서 창해(滄海)라는 군(君)을 설치했다"고 한 예맥조선이 그 하나요, 사기 조선열전에 "조선을 평정하여 사군을 만들었다"라고 한 조선이 또 하나이다. 뒤의 조선은 곧 조선열전으로 인하여 위씨의 조선인 것은 사람들이 다 알거니와, 앞의 조선은 식화지나 평준서에 간단히 한 구절이 기록되어 있고 다른 전기(傳記)에서도 발견되지 않아 종래의 사학자들이 어떤 조선인지를 말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신채호는 전자의 조선은 곧 동부여를 가리킨 것이라 보고, 한무제가 동부여를 저희 군현(郡縣)이라 하여 고구려와 9년동안 혈전하다가 패하여 물러난 일이 있은 것으로 생각했다.

후한서(後漢書), 예전(濊典)에, "한나라 원삭 원년에 예의 남려왕 등이 모방하여, 우거가 28만 호구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와서 항복하여, 한나라에서는 그 땅을 창해군으로 만들었다"고 하였고, 한서 본기에, "원삭 3년 봄에 창해군을 폐지하였다"고 하였으며, 사기 공손홍전에는, "공손홍이 여러 번 간하여... 창해군을 폐지하고 오로지 삭방만 받들게 하기를 청하여...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고 하였으니, 종래의 학자들은 위 세가지 책을 '예맥조선은 예 임금 날며의 나라로 지금의 강릉이니, 강릉이 당시 우거의 속국으로서 모븐하고 한에 항복햇으므로 한이 팽오를 보내어 항복을 받고 그 땅으로써 창해군을 삼았다가, 그 뒤에 땅이 너무나 멀고 비용이 ?이 듦으로 그 전쟁을 그만둔 것이다"라고 단정하였다.

하지만 신채호는 이를 비판하여

원광 원년 창해군 설치의 해는 기원전 134년이요, 원삭 3년 창해군 폐지의 해는 기원전 126년이니, 그러면 한이 동부여를 침략하여 창해군을 만들려는 전쟁이 전후 9년 동안이나 걸쳤으니, 동부여가 만일 우거의 속국이라면 우거가 가서 구원하지 안을 수 없으며, 만일 돌아와 구원하였다고 하면 사기 조선전 만전에 우거의 한에 대한 관계, 요동 동부도위의 공격이며 살해 따위를 다 기록하고서 어찌 이보다 중요한 9년 전쟁의 사실을 빼었느냐? 며 이의를 제기했다. 앞에서 말한 개정한 연대에 의하면 이때는 동부여가 고구려에게 정복된 뒤이니, 남려는 위씨의 속국이 아니라 고구려의 속국이라는 것이다.

당시 고구려의 동부여에 대한 압박이 심했기 때문에 고구려의 우너한을 가진 남려는 몰래 우거와 내통하여 고구려를 배척하려 했다가 우거가 고구려보다 미약함을 알고 우거를 버리고 한(漢)에 통하려 한 것이다.

그것을 안 무제는 동부여를 장래의 창해군으로 예정하고, 팽오를 대장으로 삼아 연제-지금의 직예 · 산동(山東) 의 군사와 양식을 동원하여, 바다를 건너 고구려와 싸워 남동부여와 남낙랑 여러 나라를 구원하다가 대무신열제가 이끄는 고구려의 반격이 뜻밖에 강하여 9년동안 혈전을 계속하였는데, 한이 여러번 패하여 창해군을 폐지한다는 말을 핑계로 삼아 군사를 거두어 전쟁을 결말 지은 것이다.

신채호는 우리 민족의 역대 제왕중 유일하게 신왕(神王)의 칭호를 받은 대무신열제를 보완한 연도를 통해 한의 최대 전성기를 구축한 한무제에 필적하는 민족 영웅 대무신열제를 탄생시키려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