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주류왕(大朱留王) 이후의 고구려
기원 1세기 이후부터 기원 3, 4세기까지에 한강 이남, 곧 남부의 조선 열국들은 아직 새로 세워진 초창기(草創期)였고, 압록강 이북. 곧 북부의 조선 열국들도 거의 다 이미 국력이 기울어지고 패망하여, 가라(加羅)나 신라나 백제나 남(南) 낙랑이나 동부여 양국들은 모두 다 특기할 만한 들이 적었다.
이런 중에 오직 고구려와 북부여가 가장 큰 나라로서 열국들 중에 그 세력을 떨쳤으나, 그러나 대주류왕(大朱留王: 大武神王) 이후의 연대가 삭감됨에 따라서 사실(事實)도 모두 탈루(脫漏)되어 그 사적(史蹟)을 논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 중국사에 의거하여 고구려가 중국과 선비(鮮卑)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관계를 가졌던 한두 사항을 적을 뿐이다.
2, 고구려의 대(對) 중국 관계
-왕망(王莽)의 흥망과 고구려의 발흥
고구려와 동(東)부여와 남(南)낙랑의 관계로 인하여 늘 한(漢)과 다투었는데, 기원 1세기경에 한(漢)의 외족(外族)에 왕망(王莽)이란 괴걸(怪傑)이 나서,
(一) 고대 사회주의인 정전법(井田法)을 실행하고,
(二) 한문화(漢文化)로 세계를 통일함으로써, 일종의 공산주의적 국가를 건설하려고 시도하였던, 중국 본국뿐만 아니라 조선 열국까지도 다소 관계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지금의 중화민국이 수립되기 이전의 수천 년 동안 중국에서는 왕조(王朝) 교체와 군웅(群雄)의 쟁탈(爭奪)이 수도 없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을의 세력으로 갑의 세력을 대체하면서 민중에게는 일시적으로 “省搖役 薄賦斂(생요역 박부렴)”(-> 요역(遙役)을 줄이고 세금 부과를 가볍게 함)이란 여섯 글자의 혜택을 베푸는 정치로써 잠시 편히 살 수 있게 해주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다시 옛 제도를 회복함으로써, 결국 폭력으로써 폭력을 대체하는 악극(惡劇)이 되풀이될 뿐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것은 의식 없는 내란(內亂)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언정 혁명(革命)이란 이름을 붙일 수는 없는 성격의 것이었다.
그러나 왕망(王莽)에 이르러서는, 실제로 토지를 고루 분배하여 빈부(貧富)의 계급(階級)을 없애려는 의견을 대담하게 실행하려고 하였으니, 이 사건은 동양 고대의 유일한 혁명(革命)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제 정전설(井田說)이 생겨난 경과와 왕망이 흥하고 망한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한다.
정전설(井田說)은 중국의 춘추(春秋)말 전국(戰國) 초(기원전 5세기경-원주)에 당신의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생겨난 것인데, 당시에는 열국(列國)들이 나란히 대치하고 있는 중에 나라마다 귀족들이 권력을 독점하여 극도로 호사(豪奢)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전쟁이 끊일 날이 없었서 부세(賦稅)는 날로 높아 갔으며,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의 토지를 겸병(兼倂)하여 인민들의 생활은 말할 수 없이 곤궁하였기 때문에, 유약(有若) 맹가(孟軻) 등 일부 학자들이 이를 구제하려고 토지평균설(土地平均說), 곧 정전설을 주창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중국의 하(夏). 상(商). 주(周) 삼대(三代)가 다 정전제를 시행하였는데, 이 제도는, 9백 묘의 전지(田地)를 한자 정(井) 자 모양으로 나누어 여덟 가구에 각 1백 묘씩 나누어주어 경작하게 하고, 가운데 있는 나머지 1백 묘는 공전(公田)이라고 하여 여덟 가구가 공동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물을 공용(公用)에 쓰며, 또 각지에서 분배된 사전(私田) 1백 묘에서 나는 수확의 10분지 1을 세금으로 바치게 하는 제도인대, 이것을 십일세(十一稅)라고 하였다.
그런데 선대(先代)의 성왕(聖王)은 다시 나오지 않고 중국이 분열하여 전국(戰國)시대가 되자, 모든 제후왕(諸候王)들은 그 인민들로부터 더 많은 부세를 거두어들이기 위하여 정전제도를 철폐하는 동시에 정전제도에 관한 문서들까지 없애버렸다고 한다.
어느 민족이든 원시공산제(原始共産制) 단계의 사회가 있었음은 오늘날의 사회학자들이 공인하는 바인데, 중국도 물론 태고에는 균전제도(均田制度)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유약(有若)과 맹자(孟子) 등-원주)이 주창한 정전제는 당시 조선의 균전제(均田制)를 목격하거나 혹은 전해 듣고 이를 모방하려고 한 것이고, 저들이 자백한 바와 같이, 중국 자체의 옛 문헌에 근거해서 말한 것은 아니다.
다만 조선의 균전제는 여덟 가구가 한 전지(田地)를 공동으로 경작하는 <八家同田(8가동전)>이 아니라, 네 가구가 한 전지를 공동으로 경작하는 <四家同田(4가동전)> 방식이었다. 이것은 지금의 평양이나 경주에 남아 있는 한자 <기(器)>자 모양의 옛 전지(田地)에 의해 충분히 증명된다.
그리고 그 세제(稅制)는 10분지 1을 취하는 <十一稅(십일세)>가 아니라 20분지 1을 취하는 <二十一稅(이십일세)>였다. <맹자)에 기록되어 있는바 “脈二十而取一(맥이십이취일)”(-> 맥국에서는 20분지 1을 세금으로 거둔다.)이라 한 것이 이를 명백히 지적하고 있다.
저들이 <四家同田(4가동전제)>제를 <八家同田制(8가동전제)로 고치고, 2십분지 1 세제를 1십분지 1세제로 고쳐서 조선과 달리하고는, 자존적 근성이 깊은 저들이 이를 조선에서 가져왔다는 사실을 숨기고, 중국 선대 성왕(聖王)의 유제(遺制)라고 거짓 칭탁(稱託)하는 동시에, 조선을 이맥(夷脈)이라 부르고, 조선의 정전제는 이맥의 제도라고 배척하여, <춘추(春秋)>의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이나 <맹자>에서 동일하게 “小乎什一者. 大貊小貊也(소호십일자. 대맥소맥야)”(-> (세금이) 10분지 1보다 적은 것은 대맥(대맥)과 소맥(소맥)의 제도이다.)라고 하였으며, 맥국에서는 오곡이 자라지 않고 단지 기장만 자란다. 백관(百官)이나 담당 관리를 부양할 일이 없으므로 20분지 1만 받아도 충분하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후한서> 부여. 옥저전 등에서 땅이 평평하고 넓게 틔었으며 토질이 비옥하여 오곡의 생산에 적합하다. 라고 하였고, <위략(魏略)>의 부여. 고구려전 등에서는 “其官有相加對盧沛者(기관유상가대로패자)”(-> 그 관직으로는 상가(相加). 대로(對盧). 패자(沛者) 등이 있었다.)라고 하였은즉, 맹자. 공양씨. 곡량씨 등이 운운한 것은 근거도 없고 논리에 부합하지도 않는 조선 배척론(排朝鮮論)임을 볼 수 있다.
조엽(趙燁)의 <오월춘추(吳越春秋)>는 “하우(夏禹)의 공전(公田)이 조선(朝鮮: 本文은 <주신(州愼)>-원주)의 것을 모방한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공정한 자백이다.
저들이 정전설(井田說)을 아무리 아무리 큰 소리로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본래 민중을 움직여서 부귀 계급을 타파하려던 운동이 아니었고 오직 군주나 귀족을 설득하여 그들의 기득(旣得)의 부귀(富貴)를 버리고 그 소유를 민중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려고 하였던 것이므로, 민간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군주나 귀족들은 바야흐르 권리의 쟁탈에 급급하여 정전설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없었다.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하여 열국을 멸하고 전 중국의 재산과 부(富)를 독점하여 아방궁(阿房宮)을 짓고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다가 2세(世)에 망하고, 8년간의 대란(大亂)을 지나 한(漢)이 흥하자, 옛날 열국들에 남아 있던 귀족과 토호(土豪)들이 많이 멸망하여 부귀계급이 훨씬 감소하였고, 인구도 전란 중에 많이 소모되어 경작지 부족의 염려가 없었으므로, 이전부터 내려왔던 사회 문제가 얼마 동안 조용해졌다.
그러나 2백년의 태평세월이 지나자 인구는 비상히 번식하였고 거농(巨農)과 대상(大商)이 생겨나서, 부자는 여러 군(郡)의 토지를 가진 이가 있는가 하면 송곳 하나 꽂을 땅조차 없는 빈민들이 있어서, 사회문제가 다시 학자나 정치가들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거리로 되었다.
그리하여 혹은 <한전제(限田制)>를 제기하여 인민의 농토 소유를 일정한 면적 이내로 제한하자고 하며, 혹은 <주례(周禮)>란 책을 써서 이것을 중국 고대에 정전제를 시행한 주공(周公)이란 성인이 쓴 책이라고 거짓 청탁(請託)하여, 당시의 제도를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한(漢)의 황실(皇室)은 그 힘이 쇠약해져서 외척(外戚) 왕씨(王氏)가 대대로 대사마(大司馬). 대장군(大將軍)의 지위를 차지하고 정권(政權)과 병권(兵權)을 전단하였다.
왕망이 대사마. 대장군이 되어서는 황제인 평제(平帝)와 그 뒤를 이은 두 살짜리 황태자 영(瓔)을 독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신(新)>으로 바꾸었다.
왕망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一) 정전제(井田制)의 실행과, (二) 한문화(漢文化)의 세계통일이란 양대 이상(理想)을 가진 자였으므로, <주례(周禮)>를 모방하여 전 중국의 토지를 한자 정(井) 자 모양으로 구획 짓는 사업에 착수하고, 또 사자를 이웃 나라에 보내어 수많은 재물로 구 군장(君長)들을 매수하여 그 나라의 인명과 지명들을 모두 중국식으로 고치게 하고, 한문(漢文)을 전파하여 배우도록 유인하였다.
이에 앞서 흉노는 남. 북 두 부(部)로 나뉘어 있었는데, 북흉노는 지금의 몽고 북부에 터를 잡고 한(漢)과 대항하였으나, 남흉노는 몽고 남부에 근거를 두고 한(漢)에 신하로 복종하였다.
이때에 왕망의 사자가 남흉노의 선우(禪于:추장) 낭아지사(囊牙知斯)를 꾀어서 말하기를, 두 자(字) 이상으로 된 이름은 중국 문법에 위반되니 <낭아지사(囊牙知斯)>란 이름을 <지(知)>로 바꾸고, 흉노(匈奴)>라는 <흉(匈)>자가 불순(不順)하니 <항노(降奴)>로 바꾸고, <선우(禪于)>라 할 때의 <선(禪. 단)>자에는 의미가 없으니 <服于中國(복우중국: 중국에 복종한다.)이란 뜻으로 <복우(服于)>라고 바꾸라고 하였다.
낭아지사가 처음에는 응하려 하지 않았으나, 왕망의 재물을 탐내어, 이에 한(漢)이 준 <흉노선우 낭아지사란 새인(璽印)을 버리고 왕망(王莽)이 새로 준 <항노복우(降奴服于 知)>란 인장(印章)을 받았다.
그러나 왕망이 또 생각하기를, 남 흉노의 관할하는 무리의 수가 너무 많으니 혹시 이것이 나중에 우환거리가 되지 않을까 하여, 그 무리를 나누어 12부(部)로 만들고 열둘의 복우(服于)를 세우라고 하였다. 이에 낭아지사가 대노(大努)하여 드디어 왕망과 항전(抗戰)하기에 이르렀다.
왕망이 여러 장수를 보내어 흉노를 치면서 요동에 조서를 내려 고구려 현(高句麗縣)의 군사를 동원하였다.
<고구려 현(高句麗縣)>이란 무엇인가. 한 무제가 고구려국(高句麗國)을 고구려현(高句麗縣)으로 만들려 하다가 전쟁에 패하여 물러가서는 소수(小水: 지금의 태자하(태자하)-원주) 부근에 하나의 현(縣)을 만들어 놓고 조선 열국의 망명자와 포로 등을 그곳에 살게 하여 <고구려현(高句麗縣)>이라 칭하면서 현토군에 소속시킨 것이다. (*<려(麗)는 원래 <가우리>의 <리> 음을 적은 것인데 한(漢)에서 이를 (麗)로 바꾸었다. <려(麗)>는 검은 말. 검다 등의 뜻으로, 고구려를 멸시하는 뜻에서 한자를 바꿔쓴 것이다.-옮긴이)
곳 현(縣)에 사는 사람들이 먼 길에 출정 나가기를 원하지 않았으므로 강제로 징발하였는데, 그곳 현 사람들이 국경 밖으로 나가서는 전쟁터로 나가지 않고 모두 도적이 되어서 약탈을 하였기 때문에, 왕망의 요서(遙西大尹) 전담(田譚)이 추격하다가 죽었다. 이에 왕망이 대장군 엄우(嚴尤)를 보냈는데, 그는 고구려의 현후(縣侯(현후: 현령) 추(騶)를 유인하여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으로 보내고 대첩(大堞)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왕망은 크게 기뻐하면서 조서(詔書)를 내려 여러 장수들을 격려하고, 동시에 고구려현을 <하구려현(下句麗縣)>이라고 바꾸었다. 그리고 승세를 타서 조선 열국과 흉노 각 부(部)를 쳐서 중국식의 제도를 도입하여 설치하도록 재촉하였다.
이에 조선 열국들, 곧 북부여. 고구려 등 나라들이 대(對) 왕망 공수동맹(攻守同盟)을 체결하여 왕망의 변경을 자주 침입하자, 이에 왕망이 대(對) 조선, 대(對) 흉노 전쟁을 위하여 세금 징수를 증가시키고 인부들을 징발하자 전 중국이 소란해졌다. 그래서 부자들만 왕망을 반대하였을 뿐 아니라 빈민들도 무리지어 일어나 왕망을 토벌하였으므로, 왕망은 마침내 패망하고 광무제(光武帝)가 한(漢)을 중흥시켰다.
<삼국사기>에는 왕망의 침입을 유류왕(儒留王) 31년의 일로 기록하고, <후 추(侯 騶)>를 <고구려장(高句麗將)>연비(延丕)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삼국사기>의 작자가, (一)고구려 고기(古記)에 연대 삭감 사실이 있음을 모르고 고기(古記)의 연대를 <한서(漢書)>의 연대와 대조하였고, (二)<한서(漢書)>의 고구려(高句麗)는 고구려국(高句麗國)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한(漢) 현토군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인 줄 모르고 이를 고구려국(高句麗國)으로 잘못 알고 한서의 본문을 그대로 초록(抄錄)하는 동시에, 다만 유류왕이 왕망의 장사(壯士)의 손에 죽어 그 머리가 한(漢)의 도성인 장안(長安)까지 갔다고 하는 것은, 저들 사대노(事大奴)가 안중에도 너무 엄청난 거짓말인 듯하므로, <고구려후 추(高句麗侯 騶)> 5자(字)를 <아장연비(我將延丕: 고구려 장수 연비)> 4자로 고친 것이다.
(*김부식(金富軾)이 비록 흐리터분한 오작(誤作)은 많으나 턱없는 위작(僞作)은 못하는 자이니, 연비(延丕)는 혹 고기(古記)의 작자가 위조한 인물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유류왕은 명백히 왕망보다 1백여 년 이전의 인물이며, (漢書)에서 운운한 고구려는 명백히 고구려 국(國)이 아니니, 설령 참으로 연비라는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도 유류왕 시대의 고구려인은 아니다,=원주)
왕망은 중국의 유사(有史)이래 첫 번째로 의식 있는 혁명을 실행하려고 했던 자이지만, 그러나 이웃 나라들을 너무 무시하여 남의 언어. 문자. 종교. 정치. 풍속. 생활상태 등의 모든 역사적 배경이 어떠한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한문화(漢文化)로써 지배하려다가 그 반감을 불러일으켜 많고 적은 민족적 전쟁이 일어나게 하여, 결과적으로 내부개혁의 진행까지 흔들리고 저지당하게 함으로써 그 패망의 첫째 원인이 되었다.
<신수두>의 교(敎)가 비록 태고의 미신(迷信)이지만, 전래되어 온 연대가 오래되었고, 유행한 지역이 광대하여 한(漢)의 유교(儒敎)로는 이를 대적할 무기(武器)가 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두문(夷讀文)은 비록 한자의 음(音)과 뜻(義)을 빌려와서 만든 것이기는 하지만 조선의 인명. 지명 등 명사(名詞: 고대에는 모두 우리말로 지었던 명사-원주)뿐만 아니라 노래든, 시(詩)든, 적바림(뒤에 들춰 보려고 간단히 글로 적어 두는 것, 또는 그 기록, 적록(摘錄), 메모- 옮긴이)이든, 기타 그 무엇이든 간에, 이때 조선인에게는 한자보다도 사용하기에 더 편리하였다. 그러므로 한자로 이두문자를 대신할 가망이 없었으니, 왕망의 한문화적(漢文化的)동침(東侵)은 한갓 망상(妄想)에 불과한 것이었다.
더구나 흉노(匈奴)의 본래 이름은 <훈>인데도 구태여 <훈>을 <匈奴)로 썼던 자는 한인(漢人)이며, <고구려>의 본명은 <가우리>이고 <고구려>는 그 이두문자임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고구려>를 <구려(句麗)> 혹은 <고구려>라고 쓰는 자도 한인이니, 한인의 하는 짓이 이미 괘씸한데, 하물며 게다가 본명과는 얼토당토 않는 문자를 가져다가 <항노(降奴)>라, <하구려(下句麗)>라 함에랴, 왕망이 패망(敗亡)한 것은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3, 선비(鮮卑)와 데(對) 고구려의 관계
고구려와 한(漢)이 충돌하는 중간에 서서 고구려를 도우면 고구려가 이기고, 한(漢)을 도우면 한이 이겨 양국의 승패를 좌우하는 자가 있었으니, 곧 선비(鮮卑)라 칭하는 종족(種族)이 그것이다. 선비가 조선의 서북. 곧 지금의 몽고 등지에 분포하였다가 흉노의 선우 모돈에게 패하여 그 본거지를 잃고 내. 외 흥안령(興安嶺)부근으로 이주하였다는 것은 이미 제2편 제3장에서 설명하였다. 그 뒤에 선비가 양분되어 하나는 계속하여 <선비(鮮卑)>라 칭하고, 다른 하나는 <오환(烏桓)>이라 칭하였다.
이 양자는 언어나 풍속이 거의 동일한데, 짐승의 고기를 먹으며 짐승의 가죽을 옷으로 해 입고 목축과 수렵(狩獵)으로 생활하는 종족으로서, 각기 부락을 나누어 사는데, 전 부족을 통솔하는 대인(大人)이 있고 각 부락마다 부대인(副大人)이 있어, 그 부족들은 다 그 대인이나 부대인의 이름 자(名字)로 성(姓)을 삼고, 싸우기를 좋아하므로 젊은이를 존대하고 늙은이를 천대하며, 문자(文字)가 없으므로 무슨 일이 있으면 목각(木刻)을 신표(信標)로 하여 부락민들을 불러 모으고, 일체의 쟁송(爭訟)은 대인에게 가져가서 판결을 받는데, 지는 자는 소나 양으로 배상(賠償)하였다.
조선이 모돈에게 패한 뒤에 선비와 오환이 다 조선에 복속하지 않고 도리어 조선 열국을 침략하므로, 고구려 초에 유류왕(儒留王)이 이를 걱정하여, 부분노(扶芬奴)의 계책을 쫓아서 군사를 두 패로 나누어 그 한 패는 왕이 직접 거느리고가서 선비국의 전면을 치고, 또 한 패는 부분노가 거느리고 몰래 샛길로 가서 선비국의 후면으로 들어갔다. 왕이 먼져 교전하다가 거짓 패하여 달아나니, 선비가 그 소굴을 버리고 다투어 추격해 왔다. 이때를 이용하여 부분노가 소굴을 몰래 습격하여 점령한 후 왕의 군사들과 함께 앞뒤로 공격하여 드디어 선비를 항복시켜 속국으로 삼았다.
오환(烏桓)은 한 무제(武帝)가 위(衛) 우거(右渠)를 멸한 뒤에 이들을 유인하여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안문(雁門). 대군(代郡)- 지금의 북경시와 산서성의 중국 서북 일대에서 거주케 하여 흉노를 정찰하는 임무를 맡게 하였다. 그 후 소제(昭帝) 때에 오환의 무리들이 나날이 구 수가 불어나므로, 당시 한의 집정자(執政者) 곽광(藿光)이 후일의 걱정거리가 될까봐, 이에 오환의 선대(先代)가 흉노의 선우 모돈과 싸우다가 패하여 죽은 참사(慘史: 비참한 역사)를 들춰내어 오환을 선동하여 모돈의 무덤을 파내어 조상의 원수를 갚게 하였다.
이에 흉노의 호연제 선우(蒿衍提禪于)가 대노하여 정예 기병 2만으로써 오환을 치자, 오환은 한(漢)에 원병(援兵)을 청하였다.
한(漢)이 3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구조(救助)한다고 칭하고는 멀리 떨어져서 관망만 하다가, 흉노가 물러갈 때를 틈타서 오환을 습격하여 무수히 많은 오환의 군사들을 학살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오환은 아주 쇠약해져서 다시는 한(漢)에 대항하지 못하였다.
왕망(王莽)의 때에 이르러서는, 오환으로 하여금흉노를 치라고 하면서 한편 그의 처자들을 각 주군(州郡)에 불모로 잡아 놓았다. 그리고 오환을 구박하여 흉노를 전멸시키기 전에는 돌아오지 못하게 하자, 오환인들은 원망하고 분해하여 한(漢)을 배반하여 도망가는 자가 많았다. 이에 왕망이 그 불모로 잡았던 처자들을 살육하였는데, 그 참옥함이 또한 매우 심하였다.
왕망이 망하고 중국이 크게 어지러워지자, 고구려 모본왕(募本王)이 이를 기회로 요동을 회복하여, 양평성(襄平城)의 이름을 고구려의 옛 이름으로 고쳐서 <오열흘(烏列紇)>이라 부르고, 선비와 오환을 규합하여 자주 중국을 쳤다. 한(漢)의 광무제(光武帝)는 한(漢)을 중흥한 뒤에 요동군을 지금의 난주로 옮기고, 고구려를 막기 위하여 장군 채동을 요동태수(遙東太守)에 임명하였다.
(*중국에서 발행된 <후한서> 책에는 채동이 아니라 제융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이 맞든 간에 역사적 사실관계를 이해하는 데는 큰 문제가 되지 않으므로, 여기서는 계속 채동으로 쓴다.=옮긴이)
그러나 채동은 전쟁에서 자주 불리하게 되자 이에 황금과 비단으로 선비족 추장 편하(偏何)에게 뇌물을 먹이어 오환족 추장 흠지분(欽志賁)을 살해하게 하였다. 이에 모본왕이 다시 선비와 오환을 타일러서 다시 공동행동을 취하였으므로, 한(漢)은 계책이 궁해져서 해마다 2억 7천만 전(錢)을 고구려. 선바. 오환 세 나라에 공납(貢納)하기로 조약을 맺고 휴전하였다.
모본왕이 한(漢)을 이기고 나서는 매우 교만하고 거만해져서, 앉을 때에는 사람을 안석(案席: 앉을 때 몸을 기대는 방석)으로 삼으며, 누울 때에는 사람을 베개 삼고, 꼼짝하면 그 사람을 참살하여, 그렇게 죽은 사람이 무수하였다. 왕을 곁에서 모시는 신하(特臣) 두로(杜魯)가 왕의 베개가 되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한 친구를 향하여 울면서 그 사정을 하소연하자, 그 친구가 말했다.
“우리를 살게 해주므로 임금을 섬기는 것이다. 우리를 죽이는 임금이야 임금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의 원수가 아니냐. 원수는 죽여도 된다.”
이에 두로가 칼을 품었다가 왕을 찔러 죽였다. 모본왕이 시해(弑害)당한 뒤에 여러 신하들이 모본왕의 태자가 불초(不肖)하다고 하여 태자에서 폐하고, 종실(宗室)에서 궁(宮)이란 이름의 한 어린아이를 맞아 왕의 자리에 앉히니, 이가 곧 태조대왕(太祖大王)이다.
(*<삼국사기>는 모본왕의 포악한 행동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왕은 날이 갈수록 포악해져서, 앉을 때는 언제나 사람을 깔고 앉았고, 누울 때에는 사람을 베고 누웠다. 그 사람이 혹시 움직이면 용서해주지 않고 죽였다. 신하 중에 잘못을 간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당겨 그를 쏘아 죽였다.-옮긴이)
고구려 본기는 대주류왕(大朱留王: 大武神王) 아후에는 확실히 연대가 삭감되었기 때문에, 모본왕(慕本王)본기부터 비로소 근거로 삼을 재료가 될 것이다. 모본왕을 대주류왕의 아들(子)이라고 한 것은 그 연대를 삭감한 흔적을 은폐하려는 거짓 기록(記錄)이니, 모본왕은 대개 대주류왕의 3세나 혹 4세가 되는 것이 맞을 것이며, 모본왕 때에 요동을 회복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태조대왕(太祖大王) 3년에 요서(遙西)에 성 10개를 쌓았으니, 요동은 그전에 이미 1차 회복하였던 것이 명백하다. 그리고 <후한서> 동이열전에 “고구려와 선비가 우북평. 어야. 상곡. 태원 등지를 침략하다가 채동(채동: 또는 제융(제융)이 은신(恩信)으로써 부르므로 다시 항복하였다.”고 하였으나, 해마다 2억 7천만전(錢)의 돈을 준 것으로 채동전에 기록 되어 있으므로, 이것은 해마다 바친 공물, 즉 세공(歲貢)이지 은신(恩信: 상호간의 은혜와 신의를 보증하기 위해서 주는 물건이라는 뜻)이 아니다.
'조선 상고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구려의 삭감된 연대가 100년 이상 120년 (0) | 2014.10.02 |
---|---|
漢字를 한국인이 만들었다고? (0) | 2014.09.13 |
[스크랩] 중국상고사의 참 모습, -죽서기년을 통해서 (0) | 2014.08.30 |
제5편(一) 고구려의 전성시대 (0) | 2014.08.16 |
제4장 계립령(鷄立嶺) 이남의 두 신국(新國) (0) | 2014.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