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상고사

제 3장 삼조선(三朝鮮) 분립 후의 불朝鮮

운우(雲雨) 2014. 6. 11. 22:34

1, 불朝鮮의 서북 변경 피탈(被奪)

 

<불朝鮮>이 <신朝鮮>과 합작(合作)하다가 연(燕)에게 패한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으므로, 여기서는 다만 그 잃은 토지가 얼마나 되는지만 말하고자 한다.

<위략(魏略)>에 “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潘汗爲界,(진개공기서방, 취지이천여리, 지만반한위계)”(->진개(秦開)가 그 서쪽을 공격하여 2천 여리의 땅을 탈취하고, 만반한(滿潘汗)을 경계로 삼았다.)라고 하였는바, 이전의 학자들이 조선과 연(燕)의 그전까지의 국경을 지금의 산해관(山海關)으로 잡고, 진개(秦開)가 탈취한 2천여 리를 산해관 이동(以東)의 2천여 리로 잡고, <만반한(滿潘汗)>을 대동강(大同江) 이남에서 찾으려 하였으나, 이는 크게 잘못된 억단(臆斷)이다.

<사기>나 <위략>을 참고해 보면, 진개가 탈취한 토지는 명백히 상곡(上谷)부터 요동(遼東)까지이므로, <만반한(滿潘汗)>을 요동 바깥에서 찾는 것은 잘못이며, <한서> 지리지에(地理志)에 의하면 요동군현 내에 문(汶). 번한(番汗)이란 두 현(縣)이 있는바, <만반한(滿潘汗)>은 곧 문(汶). 번한(蕃汗)이며, <문(汶)> 현(縣)은 비록 그 연혁이 전해지지 않으나 <번한(蕃汗)>은 지금의 개평(蓋平) 등지이므로, 문현(汶縣)도 개평현 부근일 수 있다. 따라서 <만반한(滿潘汗)>은 지금의 해성(海城). 개평 등지의 부근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이제 <만반한(滿潘汗)>을 대동강 이남에서 구하려 하는 것은 무엇에 의거한 것인가? 대개 만반한(滿潘汗)>은 진개가 쳐들어 왔을 때의 지명이 아니고 후세 진(秦) 때 혹은 한(漢) 때의 명칭인 것을 <위략>의 작자가 그 후에 생긴 이름을 가져다가 진개가 쳐들어 왔을 때의 양국의 국경을 입증하려 했던 것이며, <번한(蕃汗)>은 <불한>의 고도(故都) 부근이므로 그런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사기>의 <千餘里(천여리)>는 <신朝鮮>이 잃은 토지만을 지적한 것이고 <위략>의 <이천여리(二千餘里)>는 <신>. <불>. 두 조선이 잃은 토지를 함께 지적한 것으로서, 어양(漁陽) 상곡(上谷) 일대는 <신朝鮮>이 잃은 토지이고, 요동. 요서. 우북평 일대는 <불朝鮮>이 잃은 토지이다.

<만반한(滿潘汗)>은 한사군(漢四郡) 연혁의 문제와 매우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본절(本節)을 단단히 기억해 두기 바란다.

 

2, 불朝鮮의 진(秦). 한(漢)과의 관계

 

연왕(燕王)희(喜)가 진시황에게 패하여 요동으로 천도하였는데, <불朝鮮>이 지난날 연(燕)에 대한 숙원(宿怨)을 잊지 못하여 진(秦)과 맹약을 맺고 연(燕)을 쳐서 멸망시켰는데, 얼마 후 진시황이 몽념(蒙恬)으로 하여금 장성을 쌓도록 하여 요동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불朝鮮>이 새로 진(秦)과 국경을 정하면서 지금의 헌우락(軒芋樂) 이남의 연안(沿岸) 수백 리 땅을 양국의 중립 공지(空地)로 정하여 양국 인민들이 들어가 사는 것을 금하니, <사기>에서 말한바 “고진공지(故秦空地)”는 이것을 가리킨 것이다. <위략>에 의하면, 이때에 <불朝鮮> 왕의 이름이 <부(否)>라고 하였으나, 그러나 <위략>과 마찬가지로 관구검(串丘儉)이 실어간 고구려 문헌을 재료로 하여 쓴 <삼국지(三國志)>와 <후한서(後漢書)>의 동이열전(東夷列傳)에는 <부(否)>를 기록해 놓지 않았는데, <위략>에서 <신朝鮮> 말엽의 왕, 곧 동부여 왕인 <부루(夫婁)>를 <부(否)>로 와전(訛傳)한 것이 아닐까 하여, 여기에서는 채용하지 않는다.

기원전 2백여 년경에 기준(箕準)이 <불朝鮮> 왕이 되고 나서는, 진(秦)의 진승(陳勝). 항적(項籍). 유방(劉邦: 한 고조-원주)등이 반란을 일으켜 중국이 크게 어지러워지자, 상곡. 어양. 우북평 등지에서 살던 조선의 옛 유민들과 연(燕). 제(濟). 조(趙)의 중국인들로서 난리를 피하여 귀화하는 자가 많았다.

이에 기준(箕準)이 서방의 옛 중립공지(中立空地)에 들어와 사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한(漢) 고조 유방(劉邦)이 중국을 통일하자 기준이 다시 한과 약속을 정하여 옛 중립공지는 <불朝鮮>의 소유로 하고, 헌우락(軒芋樂)을 국경으로 삼았다. <사기> 조선전에 “漢興... 至浿水爲界)”(->한(漢)이 일어나자 ... 패수(浿水)를 경계로 정했다.)와 <위략>에 “及漢以盧琯爲燕王, 朝鮮與燕, 界於臭水,)”(-> 한(漢)이 노관(盧館)을 연왕(燕王)으로 삼자, 조선과 연(燕)은 취수(臭水)를 경계로 정하였다.)라고 한 것은 다 이것을 가리킨 것이니, 대개 <불朝鮮>과 연(燕)이 만반한(滿潘汗)으로 경계를 정하였다가, 이제 만반한 이북으로 물러난 것인즉, 두 책의 패수(浿水)는 모두 헌우락(軒芋樂)을 가리킨 것임이 명백하다.

이전 학자들이 흔히 대동강(大東江)을 패수(浿水)라고 고집한 것은 물론 큰 착오이거니와, 근래 일본인 백조고길(白鳥

 

庫吉)등이 압록강 하류를 <패수(浿水)>라고 하였는데, 이 또한 망발이다.

위의 <패수(浿水)>에 관한 논술은 앞 절의 <만반한(滿潘汗)>과 다음절의 <왕검성(王儉城)>과 대조하여 봐야 할 것이다.

 

3, 위만(衛滿)의 반란과 <불朝鮮>의 남천(南遷)

 

기원전 194년에 한(漢)의 연왕(燕王) 노관(盧琯)이 한(漢)에 반기를 들었다가 패하여 흉노로 도망가고, 노관과 같은 한 패(黨)인 위만(衛滿)이 <불朝鮮>으로 들어와서 귀화를 청하였다.

이에 <불朝鮮>의 왕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을 신임하여 그를 박사관(博士觀)에 임명하고 패수(浿水) 서쪽 변경(옛 중립공지-원주)수백 리 땅을 주어 그곳에 이주해온 조선의 옛 유민들과 연(燕). 제(濟), 조(趙) 사람들을 다스리게 하였더니, 위만이 그들로서 군사를 만들고, 더욱 조선과 중국으로부터 망명한 죄인들을 불러 모아 결사대를 만들었다. 병력이 이미 성대하게 되자, “한(漢)의 군사가 열 개 방면으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거짓 보고를 기준 왕에게 올리고, 사자를 기준 왕에게 보내어, 들어가서 왕을 모시고 지키도록 해 달라고 청하여 허가를 얻었다.

이에 위만이 정예병을 거느리고 급히 달려와서 기준 왕의 도성, 곧 왕검성(王儉城)을 습격하니, 기준 왕이 그를 맞아 싸우다가 불리해지자 좌우 궁인들을 배에 싣고 잔병(殘兵)들을 거느리고 해로(海路)를 따라 마한(馬韓)의 왕도(王都)인 월지국(月支國)으로 들어가서 이를 습격하여 깨뜨리고 그곳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마한의 여러 나라들이 같이 들고 일어나서 기준 왕을 쳐 죽였다.

<왕검성(王儉城)>은 대단군(大壇君) 제1세의 이름을 따서 이름지은 성으로, 대단군의 삼경(三京)은 지금의 하얼빈과, 지금의 평양(平壤)과, 앞에서 말한 <불한> 고도(故都)- 지금의 개평(蓋平) 동쪽의 세 곳이므로, 세 곳 모두 다 왕검성이란 이름을 가졌을 것이다.

따라서 위만이 도읍한 왕검성은 곧 개평 동북이니, <한서> 지리지의 요동군(遙東郡) 험독현(險瀆縣: <한서>의 주(註)에서 말하기를, 조선왕 위만(衛滿)이 도읍한 곳이다.“ 라고 하였다. -원주)이 그곳이다. 마한(馬韓)의 왕도는 지금의 익산(益山)이라고 하는 자들도 있으나, 이는 대개 와전(訛傳)이니, 이에 대하여는 다음 장(章)에서 논술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