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상고사

제2장 삼조선(三朝鮮) 분립 후의 신朝鮮

운우(雲雨) 2014. 6. 8. 20:47

1, 신조선의 서침(西侵)과 연(燕). 조(趙). 진(秦)의 장성(長城)

 

 

삼조선이 분립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신朝鮮>의 왕 모갑(某甲)이 영무(英武)하여 마침내 <말>. <불>. 양 조선을 다시 연합하여 지금의 동몽고 등지를 쳐서 선비(鮮卑)를 정복하고, 연(燕)을 쳐서 우북평(右北平: 지금의 영평부-원주)과 어양(漁陽: 지금의 북경 부근- 원주)과 상곡(上谷: 지금의 산서성 대동부(大同府)-원주) 등지를 다 차지하여 불리지(弗離支)의 옛 땅을 회복하니, 연왕(燕王)이 크게 두려워하여 해마다 <신조선>에 조공을 바치고 신하라 칭하며 태자(太子)를 인질로 보냈는데, 모갑(某甲)이 죽고 모을(某乙)이 왕이 되어서는, 연 태자가 돌아가 진왕(秦王)이 되고 장군 진개(秦開)를 왕자라고 속여서 인질로 보냈다.

 

모을(某乙)이 그 속임수를 깨닫지 못하고 진개(秦開)가 총명하고 지혜로운 것을 사랑하여 늘 자기 곁에 두었는데, 진개가 모든 군국(軍國)의 비밀들을 탐지하고 나서는 도망쳐 돌아갔다. 그리고는 연(燕)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신조선>을 습격하여 <신. 말. 불> 삼국의 수병(守兵)을 돌파하고 서북의 변경, 곧 전자의 <신조선> 왕 모갑(某甲)이 점령하였던 상곡. 어양. 우북평 등지를 탈취하고, 더욱 앞으로 나아가 <불조선>의 변경을 습격하여, 요서(遙西: 지금의 노룡현(盧龍縣)- 원주)와 요동(遙東: 지금의 요양(遙陽) 부근- 원주)을 함락시켜서 상곡. 어양. 우북편. 요서. 요동 등 5개 군(郡)을 설치하고, 2천여 리의 장성(長城)을 쌓아서 조선을 막았다. 사기 조선열전의 “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전연시, 상략속진번조선)”(-> 연(燕)의 전성기에 일찍이 진(眞). 번(番)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켰다.)이란 기사와, 흉노열전의(연(燕)의 현장(賢將)진개(秦開)를 호(胡)에 인질로 보냈는데, 호왕(胡王)은 그를 매우 신임하였다. 그가 도망쳐 돌아간 후 동호(東胡)를 습격하여 파하자, 동호는 1천여 리나 뒤로 물러갔다. 연(燕) 또한 장성을 쌓아서, 조양(造陽)에서부터 양평(養平)에 이르는 사이에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등 다섯 개의 군(郡)을 설치하였다.)이란 기사와, <위략(魏略)>의 “연(燕)은 이에 장군 진개(秦開)를 보내어 그 서쪽을 공격하게 하여 2천여 리의 땅을 탈취하여, 만반한(滿潘汗)에까지 이르렀다.”이란 기사들은 모두 이일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진개(秦開)가 인질로 갔던 조선은 <신조선>이지 <불조선>이 아니었으며, 만반한(滿潘汗)은 <불조선>이지 <신조선>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기>에는 이를 흉노전과 조선전으로 나누어 적었던 것이다. 그러나 <위략>에는, 비록 조선전에 기재하였으나, 진게(秦開)가 인질이 되었던 사실은 기록하지 않았다.

<만반한(滿潘汗)은 조선의 역사 지리상 큰 문제인바, 이는 본편 제 3장에서 설명할 것이다.

 

이때 중국 북방의 나라들 가운데 조선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장성(長城)을 쌓은 나라가 연(燕) 하나뿐이 아니었다. 趙(조: 지금의 북경시 서쪽과 하남성 북단과 산서성-원주) 무령왕(武靈王)의 장성(지금의 산서성 북쪽-원주)또한 조선과 조선의 속민(屬民)인 담림(澹林) 누번(樓煩) 등 때문에 쌓은 것이고, 秦(진: 지금의 섬서성(陝西省)-원주)소왕(昭王)의 장성은 의거(義渠)를 멸망시킨 후 흉노를 막기 위하여 쌓은 것이다.

<의거(義渠)>는 본래 조선의 한 종족(朝鮮種)으로서 지금의 감숙성(甘肅省)으로 이주하여 성곽과 궁실을 건축하고 농업도 발달하여 상당한 문화가 있었던 나라이다. <의거>가 그 병력으로 진(秦)을 압박하자, 절세의 미인이었던 진(秦)의 선태후(宣太后: 진시황의 고조모-원주)는 <의거>가 진을 멸망시킬까봐 두려워서, <의거>의 왕을 유혹하여 그와 간통하여 두 아들까지 낳고, 마침내 <의거>의 왕을 진으로 끌어들여 쳐서 죽이고 그 두 아들까지 죽였다. 그리고는 <의거>를 습격하여 멸망시켰던 것이다.(*이상의 이야기는 <사기> 흉노열전과 <한서> 흉노열전에 나오는 것으로, <한서>는 <사기>의 것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옮긴이)

 

2, 창해역사(滄海力士)의 철추(鐵椎)와 진시황의 만리장성

 

<신조선>이 연(燕). 조(趙)와 격전하는 동안에 진(秦)이 강성하여 마침내 한(漢). 위(魏). 조(趙). 연(燕). 제(濟). 초(楚) 등 중국의 열국들을 다 멸망시켰다.

한인(韓人) 장량(張良)이 망국의 한을 품고 조선에 들어와 구원을 청하였는데, 왕 모병(某丙)이 역사(力士) 여씨(黎氏)를 소개해 주어 진시황의 순행(巡幸)을 기회로 무게가 1백2십 근인 철추를 가지고 양무현(陽武縣) 박랑사(博浪沙)에서 그를 노리고 있다가 저격하였으나, 잘못하여 뒤따르는 차(副車)만 부수고 성공하지 못하였다.

<사기(史記)>에서 장량이 창해군(倉海君)을 만나서 역사(力士)를 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하였는데, 혹자는 ,창해(倉海)>는 강릉(江陵)이고, <창해군(倉海君)>은 강릉의 군장(君長)이고, 역사 여씨(黎氏)는 강릉 출생이라고 하였으나, 그러나 <창해(倉海)>는 동부여의 별명이며, 동부여 양국은, (一)북갈사(北葛思: 지금의 훈춘-원주) (이)남갈사(南葛思: 지금의 함흥-원주)에 도읍하였던 것이므로, 창해는 위의 두 곳 중의 하나이고, 강릉 <창해>라는 것은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다.

(* 참고로 장량(張良)의 진시황 암살 미수사건에 관한 중국 사서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옮긴이)

 

얼마 후 진시황이 동북의 조선과 서북의 흉노의 침노를 걱정하여 옛 연(燕). 조(趙). 진(秦)의 장성을 연결하여 쌓았는데, 전 중국의 인민을 동원하여 성 쌓는 요역(僚役)에 종사시키고, 장군 몽념(蒙恬)으로 하여금 3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장성 쌓는 일을 감독하도록 하여, 동양 역사상 유명한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210년에 진시황이 죽고 2세가 즉위하자, 그 다음해에 진승(陳勝). 항적(項籍). 유방(劉邦) 등 혁명 군운(群雄)들이 봉기하여 진을 멸망시켰다.

이두산(李斗山)은 이 일을 평하여 말하기를, “진(秦)의 위력이 자고(自古)이래로 그 짝이 없응 정도로 팽창하여 천하 만민들이 바야흐로 시황(始皇)을 천신(天神)으로 우러러보고 있을 때, 난데없는 벽력(霹靂) 같은 하나의 철추가 시황의 혼백(魂魄)을 빼앗고 6국 유민들의 적개심을 고취하였으므로, 시황의 시체가 땅속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진 타도(亡秦)의 깃발들이 사방에 날렸으니, 이는 창해역사(倉海力士)의 공이 아닐 수 없다.” 고 하였다.

 

3, 흉노 모돈(冒頓)과 신조선의 위축

 

중국의 항적(項籍). 유방(劉邦) 등에 의해 8년간 동란이 계속되는 사이에 <신조선>의 왕 모정(某丁)이 서방으로 출병하여 상곡(上谷). 어양(漁陽) 등지를 회복하고 지금의 동몽고 일대의 선비(鮮卑)를 항복시켜 국위가 다시 떨쳤는데, 그 자손의 대(代)에 마침내 흉노 모돈(冒頓)의 난을 만나 국세가 드디어 쇠약해지고 말았다.

흉노는, 제 1편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조선과 그 어계(語系)가 같고 조선과 같이 <수두>를 믿고 의지하여 조선의 속민이 되었던 종족인데, 지금의 몽고 등지에 흩어져서 목축과 어렵에 종사하였으며, 천성이 침략을 즐겨서 자주 중국 북부를 유린하였다. <신조선>에 대해서도 배반했다 붙었다 하기를 되풀이하였다.

그러다가 기원전 2백년 경에 두만(頭曼)이 흉노의 선우(蟬于: 흉노의 대추장(大酋長)을 일컫는 칭호-원주)가 되어 첫째 아들인 모돈(冒頓)을 미워하 고 작은 아들을 사랑하였는데, 마침내 모돈이 그를 살해하고 선우(蟬于)가 되었다.(모돈(冒頓)이 부친인 두만(頭曼)의 미움을 사서 월씨국(月氏國)에 인질로 가 있다가 도망쳐 나와 자기 부친을 살해하고 추장이 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와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사기> 흉노열전에 자세히 나온다.-옮긴이)

 

이에 <신조선>의 왕이 모돈의 성질이 흉측하고 사납다는 것을 모르고, 그가 자기 아비를 죽이고 대신 선우(蟬于)가 되었다는 사실을 듣고는 그것을 약점으로 잡고 여러 가지 요구를 번번히 하였다. 그러나 모돈은 짐짓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신조선> 왕이 천리마(千里馬)를 요구하자 자기 애마(愛馬)를 주었고, <신조선> 왕이 미인(美人)을 요구하자 자기의 알씨(閼씨: 선우의 처첩(妻妾)을 일컫는 칭호, 우리말 <아씨>와 같은 어원이다.-원주)를 내어주었다. <신조선> 왕은 더욱 모돈을 믿고는 사자를 보내어 양국 중간에 있는 1천 여리의 땅<구탈>을 <신조선>의 소유로 달라고 하였다.

<구탈>은 당시 중립지대인 공지(空地)를 가라킨 것인데, 모돈이 이 요구를 받고는 크게 화를 내며 말하기를 , “토지는 나라의 근본인데, 어찌 이것을 달라고 하느냐.”하고는, 드디어 그 사자를 죽이고 흉노의 전 기병을 총동원하여 <신조선>의 서방(지금의 동몽고-원주)등지를 습격하여 그곳 거민들을 유린하고 다수의 선비족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이에 <신조선>이 퇴각하여 장성(長城) 이외의 수천리 땅을 버리고, 선비의 나머지 무리들은 선비산(鮮卑山: 지금의 내외 흥안령(興安領) 부근 -원주) 으로 도주하니, 이로부터 <신조선>이 쇠약해져서 오랫동안 이웃 종족들과 겨루지 못하였다.

 

엄복(嚴復: 淸末의 학자-원주)이 이르기를 “흉노는 물과 풀을 따라 옮겨다니는 야만족인데, 어찌 ‘토지는 나라의 근본’이란 말을 하였겠는가. 이는 한갓 근거 없이 과장한 문필(文筆)일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기>. <한서> 등을 참고하면, 흉노가 음산(陰山)의 험한 요해지를 빼앗긴 뒤에는 그 지방을 지나는 자는 반드시 통곡한다고 하였으며, 연지(嚥脂)가 산출되는 언지산(焉支山)을 빼앗긴 뒤에는 비가(非歌)를 지어 부르면서 서로 위로했다고 하였으니, 흉노의 토지 수요가 비록 문화민족의 그것과는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토지에 대한 관념이 아주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