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상고사

제 1장 삼조선(三朝鮮) 총론

운우(雲雨) 2014. 6. 3. 09:16

1, 삼조선(三朝鮮)이란 명칭의 유래

 

지금까지의 각 사서에서는 삼조선(三朝鮮) 분립 사실이 빠졌을 뿐만 아니라, <삼조선(三朝鮮)>이란 명사(名詞)까지도 <단군(壇君)>. <기자(箕子)>. <위만(衛滿)>의 세 왕대(王代)라고 잘못 이해하였다. 삼조선(三朝鮮)은 <신. 말. 불> 세<한>이 분립한 것으로, <신한>은 대왕(大王)이고, <말>과 <불>의 양 <한>은 부왕(副王)이니, 세 <한>이 삼경(三京)에 나뉘어 주재(駐在)하면서 조선을 통합하였음은 이미 제2편에서 설명하였거니와, 삼조선(三朝鮮)은 곧 세 <한>이 분립한 뒤에 서로 구별하기 위하여 <신한>이 통치하는 지역은 <신조선>이라 하였고, <말한>이 통치하는 지역은 <말조선>이라 하였으며, <불한>이 통치하는 지역은 <불조선>이라 하였던 것이다.

<신. 말. 불> 세 <한>은 이두문 <辰(진)>. <馬(마)>. <卞(변)> 삼한(三韓)이라고 기록한 것이고, <신. 말. 불> 세 조선(朝鮮)은 이두문으로 <眞(진>. <莫(막)>. <番(번)>. 조선(朝鮮)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동일한 <신. 말. 불>의 번역이 무슨 이유로 하나는 <辰(진)>. <馬(마)>. <卞(변)>이라 하고 다른 하나는 <鎭(진)>. 莫(막)>. <番(번)>이라 하여 두 가지 번역이 서로 같지 않은가. 이는 남북이 사용하는 이두문자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거나, 혹은 중국인의 한자 음역(音譯)이 조선에서 사용하는 이두문자와 달랐기 때문이다.

조선에는 고전(古典)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삼조선의 유래를 찾을 곳이 없으나 중국사에는 가끔 보인다.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에 나오는 “진번조선(眞番朝鮮)”은 <신. 불> 두 조선을 함께 들고 있는 것으로서, 주(註)에서 <번일작막(番一作莫)>(->번은 막으로 쓰기도 한다.)이라고 하였는데, <번(番)>을 <막(莫)>으로 대체하면 <진막조선(眞莫朝鮮)>이 된다. 진막조선(眞莫朝鮮)은 <신. 말> 두 조선을 함께 든 것이다.

그러면 왜 <진막번조선(眞莫番朝鮮)> 혹은 <진번막조선(眞番莫朝鮮)>이라고 써서 <신. 말. 불> 세 조선을 나란히 같이 들지 않고, 혹은 <막(莫)>자를 빼고 <진번조선(眞番朝鮮)이라 하거나 혹은 <번(番)>를 빼고 <진번조선(眞番朝鮮)>이라고 적었을까?

이것은 중국인들이 외국의 인명. 지명 등 명사(名詞)를 쓸 때에는 항상 문장의 흐름을 평탄하고 순조롭게 하기 위하여 축자(縮字)를 쓰는 관례에 따라서 썼기 때문이다.

<목천자전(穆天子傳: 목천자는 주(周) 목왕(穆王)을 말함- 옮긴이)의 <覡韓(격한)>은 <신한>을 가리킨 것이며, <관자(管子)>의 <발조선(發朝鮮)>과 <대대례(大戴禮)>의 <발식신(發息愼)>은 <불朝鮮(불조선)>을 가리킨 것이다. 다만 <말朝鮮(말조선)>은 중국과 좀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사기> 이외의 다른 책에서는 보이지 않고 있다.

 

2, 삼조선(三朝鮮)의 위치와 범위

 

그러면 한(韓)은 나라 이름이 아니라 왕(王)이란 뜻이니, 삼한(三韓)은 삼조선(三朝鮮)을 나누어 통치하였던 3대왕(大王)이며, <삼조선(三朝鮮)>은 삼한(三韓) 곧 세 왕이 나누어 통치하였던 3대 지방임은 물론이며, 따라서 그 세 도읍지의 위치와 강역의 범위도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세 한(韓)의 도읍지는,

(1) 제1편에서 서술한 <으스라>, 곧 하얼빈과,

(2) <아리티>, 곧 지금의 개편현(蓋平縣) 동북의 안시(安市) 고허(古墟)와,

(3) <펴라>, 곧 지금의 평양(平壤>이 그것이다.

삼조선(三朝鮮)이 분립하기 이전에는 <신한>이 전 조선을 통치하는 대왕(大王)이 되고 <말>. <불>. 양 <한>은 그 부왕(副王)이었으므로, <신한>이 <으스라>에 주재할 때에는 <말>. <불>. 양 <한>의 둘 중 하나는 <펴라>에, 또 다른 두 서울(京)에 나뉘어 머물러 있으면서 지켰다. 그러나 삼조선(三朝鮮)이 분립한 뒤에는 세 <한>이 각기 삼경(三京)의 하나씩을 차지하고 조선을 삼분(三分)하여 통치하였다. 이때 세 <한>이 각기 가졌던 부분을 살펴보면,

<만주원류고(滿州原流考)>에서 이르기를, “<한서(漢書)> 지리지(地理誌)에, 요동의 번안현(番汗縣), 곧 지금의 개평(蓋平) 등지가 변한(卞韓)의 고도(故都)”라고 하였는바, <번한(番韓)>과 <변한(卞韓)>은 동음(同音)이므로, 개평 동북의 <아리티>가 <불한>의 고도일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마한(馬韓)은 평양의 마읍산(馬邑山)으로 인하여 이름을 얻은 것”이라고 하였으나, 마한(馬韓)으로 인하여 마읍산(馬邑山)이 이름을 얻은 것이지 마읍산으로 인하여 마한이 이름을 얻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한이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후에 남으로 옮겨온 것은 사실이므로, 평양 곧 <펴라>가 <말한>의 고도일 것이다.

<신한>은 비록 상고(相考)할 수 있는 곳이 없으나, <아리티>와 <펴라>의 양경(兩京)이 <말>. <불> 양 <한>에 의해 나늬어 점거된바 되었으므로, <신한>이 하얼빈, 즉 <으스라>에 도읍하였을 것이 틀림없다.

이로부터 강역(疆域)의 윤곽도 대강 그릴 수 있으니,

지금 봉천성(奉天省)의 서북(西北)과 동북(東北: 개원(開原) 이북 흥경(興京)이동-원주), 즉 지금의 길림. 흑룡 두 성(省)과 지금의 연해주(沿海州)의 남단은 <신朝鮮>의 소유였으며,

요동반도(개원 이남 흥경 이서- 원주)는 <불朝鮮>의 소유였으며,

압록강 이남은 <말朝鮮>의 소유였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세상에서 고정된 강역은 없으므로, 시세를 따라서 삼조선(三朝鮮)의 국토가 수축과 팽창을 거듭하였을 것이다.

3, 기록상 삼조선(三朝鮮)의 구별 조건

이제 역사를 읽는 독자들이 귀에 익지 않은 <신조선> <불조선> <말조선>이란 소리만 들어도 벌써 대부분 깜짝 놀랄 터인데, 하물며 이전 역사에서 아무런 구별도 없이 쓴 <조선(朝鮮)이란 명사를 가져다가 구별을 가하여,

(一)甲에 쓰인 조선을 <신朝鮮>이라 하고, (二)乙에 쓰인 조선을 <불朝鮮>이라 하며, (三)丙에 쓰인 조선을 <말朝鮮>이라 하면, 믿을 자가 누구 있겠느냐.

그러나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고구려본기에 동북 양 부여(扶餘)를 구별하지 않고 다만 부여(扶餘)라고 썼으며, 신라 본기에 크고 작은 다섯 가야(加倻)를 구별하지 않고 다만 가야(加倻)라고 썼다. 만약 이전 역사서에서 구별하지 않은 것이라고 여전히 구별하지 않는다면 남북 두 부여사(扶餘史)나 다서 가야사(加倻史)의 본래 면목을 회복할 날이 없을 것 아닌가.

하물며 삼조선의 분립은 조선 상고사(上古史)에 있어서 유일한 큰 사건인데, 이를 구별하지 못하면 그 이전에 대단군 왕검이 조선을 건국한 사건에 관한 결론(結論)도 얻지 못할 것이며, 그 이후에 동북 부여. 고구려. 신라. 백제 등의 문화적 발전의 서론(緖論)도 얻지 못할 것이니, 어찌 과거의 생각에 젖어 있는 자의 두뇌에 맞추기 위하여 삼조선의 사적(事跡)을 구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삼조선(三朝鮮)의 사적(事跡) 재료는 오직 <사기(史記)>. <위략(魏略)>. <삼국지>등뿐이지만, 저 중국 역사의 작자들에게는 유전되어 오는 저들 특유의 교만병(驕慢病)이 있어서, 첫째, 조선을 서술할 때에는 조선 자체를 위하여 조선을 계통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오직 중국과 정치적으로 관계되는 조선만을 서술하였는데, 그것마져도 왕왕 피차의 성패(成敗)와 시비(是非)를 전도하였다.

둘째, 조선의 국명. 지명 등을 적을 때에 흔히 조선인이 지은 본래의 명사(名詞)를 그대로 쓰지 않고 저들 임의로 다른 명사를 지어서 동부여(東扶餘)를 <불내예>라 하고, 오열흘(烏列忽)을 <요동성(遙東城)>이라 한 것과 같은 종류의 필법이 많다.

셋째, 조선은 특수한 문화를 가지고 특수하게 발달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문화 발달의 공은 언제나 기자(箕子)나 진(秦)의 유민(逾民)에게 돌리기 위하여 수많은 위증(僞證)들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마천(司馬遷)이 <사기>를 지을 때에는 연(燕)이 멸망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연(燕)과 삼조선(三朝鮮)이 관계된 사실들에 대하여 참고할 재료가 적지 않았을 것이고, 또 한(漢) 무제(武帝)가 조선의 일부분이자 삼경(三京)의 하나인 <아리티>의 문화 고도(故都)를 점령하여 예부터 전해오는 전설과 기록이 적지 않았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사기>의 조선전(朝鮮傳)은 조선의 문화적. 정치적 사실을 하나도 쓰지 않고 오직 위만(衛滿)이 동으로 달려온 사실과 한군(漢軍)의 동침(東侵)에 관한 것만 썼을 뿐이니, 이는 조선전(朝鮮傳)이 아니라 위만(衛滿의 소전(小傳)이며, 한(漢)의 동방침략의 약사(略史)이며, <위략>. <삼국지> 등의 책들은 관구검(串丘儉)이 실어간 고구려의 서적을 재료로 삼았으나 또한 그 폐습(弊習)의 심리(心理)를 가지고 쓴 책들임에는 마찬가지이다.

(*위(魏)의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에 쳐들어와서 고구려의 수도 환도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고구려 인민들을 도륙하고 약탈한 것은 동천왕 20년(기원 246)의 일이다. 이 일이 있고 난 다음해(기원 247)에 평양성을 쌓고 도읍을 옮겼다.- 옮긴이)

그러면 무엇에 근거하여, 저들의 기록에 보이는 조선(朝鮮)들을 가지고 이것이 <신朝鮮>이니 <말朝鮮>이니 <불朝鮮>이니 하는 구별을 하는가?

<사기> 조선전에는, 위만이 차지한 <불조선>만을 <조선>이라 쓰고, <신조선>은 <동호>라 칭하여 흉노전에 넣으니, 이제 <사기> 흉노전에서 <신조선>의 유사(遺事)를, 조선전에서 <불조선>의 유사를 주워오고, <위략>이나 <삼국지>의 동이열전(東夷列傳)의 기록을 교정(校正)하여 이를 보충하고, <말조선>은 중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중국사의 붓 끝에 오른 적은 적으나 마한(馬韓.) 백제의 선대(先代)는 곧 <말조선> 말엽의 왕조이니, 이로써 <삼조선(三朝鮮)>이 나뉘어 갈라진 역사의 대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4, 삼조선(三朝鮮) 분립의 시작

 

대단군(大壇君)이 정한 제도에서는, 비록 세 <한>이 있어서 삼경(三京)이 나뉘어 주재하였으나, <신한>은 곧 대단군이니 제사장(祭司長)겸 정치상의 원수(元首)가 되고, <말> <불> 두 <한>은 <신한>을 보좌하는 두 부왕(副王)에 불과하였다. 이런 모습으로 나라의 체제를 확립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삼조선(三朝鮮)이란 명칭이 없었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설명한 것처럼, 삼 <한>이 분립한 뒤에 삼조선(三朝鮮)이란 명사가 생겨났다.

그렇다면 삼 <한>은 어느 시대에 분립하였는가?

<사기>에 보이는 진(眞). 막(莫). 번(番) 세 조선은 “전연시(全燕時)”, 곧 연(燕)의 전성시대라 하였는데, 연(燕)의 전성시대는 중국 전국(戰國) 시기의 초이며, “發朝鮮(발조선)”이 기록되어 있는 <관자(管子)>는 관중(管仲)이 지은 책이 아니라 전국(戰國)시대의 위서(僞書)이며, “발숙신(發肅愼)”이 기록되어 있는 <대대례(大戴禮)>는, 비록 한인(漢人) 대승(戴勝)이 쓴 것이기는 하나, “발식신(發息愼)”운운한 것은 제(濟)나라 사람 추연(鄒衍)이 전한 것이고, 추연은 전국시대의 인물이니, <신. 말. 불> 세 조선의 명사가 이처럼 중국 전국시대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것으로 보아 삼조선의 분립은 곧 중국 전국시대의 일이며, 중국 전국시대는 기원전 4세기경이니, 그렇다면 기원전 4세기경에 <신. 말. 불> 삼조선이 분립한 것이다.

<신조선>은 성(性)이 해씨(解氏)이니, 대단군(大壇君) 왕검(王儉)의 자손이라 불리는 자이며,

<불조선>은 성(性)이 기씨(箕氏)이니, 기자(箕子)의 자손이라 불리는 자이며,

<말조선>은 성(性)이 한씨(韓氏)이니, 그 선대(先代)의 연원은 알 수 없으나, 왕부(王符)가 쓴 <잠부론(潛夫論)>에 “韓西亦姓韓, 僞衛滿所伐, 遷居海中.(한서역성한, 위위만소벌, 천거해중)”(->한서(韓西) 역시 그 성은 한씨(韓氏)인데, 위만의 침벌을 받아서 바다 가운데(朝鮮)로 옮겨가 살았다)이라고 하였는바, <한서(韓西>)는 대게 <말조선>의 족속이니, <말조선>은 성씨가 한씨(韓氏)인가 한다.

<위략(위략)>에서,(옛날 기자의 후손인 조선후(朝鮮候)가, 주(周)왕실이 쇠약해지자 연(燕)이 스스로를 높여서 왕이라 하면서 동쪽 땅을 침략하려고 하는 것을 보고, 조선후(朝鮮侯)도 스스로 왕(王)이라 칭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연(燕)을 맞아 침으로써 주 왕실을 높이려고 하였다. 이때 그 대부(大夫) 예(禮)가 간하므로 이에 군사 동원을 중지하고 대부 예(禮)를 서쪽의 연(燕)에 사신으로 보내어 침략을 중지하도록 설득하고, 공격하지 않았다.) 고하였다.

<위략(魏略)>은 서양의 백인종인 대진(大秦:로마)까지도 중국인의 자손이라고 적고 있는바, 중국식의 병적인 자존심리를 가장 잘 발휘한 글이므로, 그 글 전부를 맹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신한>. <말한>. <불한>을 당시 조선에서는 <진한(辰韓)>. <마한(馬韓)>. <변한(卞韓)>으로 음역(音譯)한 이외에, <신한>은 혹은 의역(義譯)하여 <진왕(辰王)>. <태왕(太王)>. <대왕(大王)>이라고 하였는데(단, 진왕(辰王)의 진(辰)은 음역(音譯)-원주)

<신한>을 한자로 쓰면 <조선왕(朝鮮王)>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말한> <불한>은 의역(義譯)하여 <좌보(左補)>. <우보(右補)>라 하였는데, 이를 한자로 쓰면 <조선후(朝鮮侯)>가 될 것이다. 그리고 기자(箕子)는 이때에 <불한>의 지위에 있었던 자이므로 <조선후(朝鮮侯)>라 할 수도 있다.

<불한> <조선후(朝鮮侯)>인 기씨(箕氏)가 <신한> <조선왕(朝鮮王)>인 해씨(解氏)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나 스스로 <신한(=王)>이라 칭함으로써 삼조선(三朝鮮)의 분립 국면을 개시하였던 것인데, <불한>이 <신한(=王)>을 칭한 것은 연(燕)이 친왕(稱王)한 뒤이며, 연(燕)의 칭왕은 <사기> 주(周) 신정왕 46년, 즉 기원전 323년이므로, <신. 불. 말> 세 조선의 분립은 기원전 4세기경이라는 확증이 성립한다.

대부(大夫) 예(禮)는 대개 <불한>의 참모 중의 모사(謀士)로서 <불한>에게 <신한>에 반기를 들고 스스로 <신한(=王)>을 칭하도록 권하고, 연(燕)과 결탁하여 동. 서 두 신왕국(新王國)이 동맹을 맺도록 한 자가 곧 대부 예(禮)이니, 대부 예(禮)는 삼조선의 분립을 주동한 중심인물일 것이다.

삼조선의 분립 이전에는 <신한>이 하나였으나 삼조선이 분립된 이후에는 <신한>이 셋이 되었는데, <신朝鮮>의 신한이 그 하나이고, <말朝鮮>의 <신한>이 그 둘이며, <불朝鮮>의 <신한>이 그 셋이니, 곧 삼대왕(三大王)이 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