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상고사

역사서의 개조에 대한 소견(所見)

운우(雲雨) 2014. 5. 1. 19:21

역사 재료에 대하여 그 사라진 것(亡)을 찾아서 기워 넣고(補), 빠진 것(缺)을 채우며, 사실이 아닌 것(僞)은 빼버리고, 거짓 기록을 판별하여 완비(完備)를 추구하는 방법의 대략을 이미 말하였거니와, 편찬하고 정리하는 절차에 이르러서도 옛날 역사서(舊史)의 투를 고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근래에 가끔 새로운 체제로 역사서를 저술하였다는 한두 가지 새로운 저서가 없지 않으나, 다만 <신라사>라 <고려사>라 하던 왕조별로 나누던 이전의 방식을 고쳐서 <상세(上世)> . <중세(中世)> . <근세(近世代)>라 하고, <권지일(卷之一)> . 권지이(券芝二)>라고 하던 <통감(通監)>의 편분류(分編) 명칭을 고쳐서 <제 1편> <제 2편>이라고 하며, 그 내용을 보면 <재기(才技)> . <이단(異端)>이라고 하던 것을 <예술(藝術)> . <학술(學術)>이라고 하여 그 귀천(貴賤)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이고, 근왕(勤王) <한외(悍外)>라 하던 것을 애국(愛國) <민족적 자각>이라 하여 그 신구(新舊)의 명사만 다를 뿐이니, 털어놓고 말하자면, 한장책(韓裝冊)을 양장책(洋裝冊)으로 고친 것에 불과하다. 이제 나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개조할 방법의 대강(大綱)을 말해보고자 한다.

 

(一) 그 계통(系統)을 구해야 한다.

 

구사(舊史)에서는 甲大王(갑대왕)이 을대왕(을대왕)의 父(부)요 정대왕(丁大王)이 병대왕(丙大王)의 제(弟)이니 하여, 왕실의 계통을 구하는 외에는 다른 곳에서 거의 계통을 구하지 않았으므로, 무슨 사건이든지 중천(中天)에서 거인(巨人)이 내려오고 평지에서 신산(神山)이 솟아오른 듯하여, 한편(編)의 신괴록(神怪錄)을 읽는 것 같았다.

역사는 인과관계(因果關係)를 찾으려는 것인데, 만일 이와 같은 인과(因果) 이외의 일이 있다면 역사는 공부하여 무엇하겠는가마는, 그러나 이는 역사를 쓴 사람의 부주의 때문이지 역사 본래의 실질이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구사(舊史)에서는 그 계통을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를 찾을 수 있으니, <삼국사기> 신라사에 적힌 신라의 <국선(國仙)>은 진흥대왕(眞興大王) 때부터 문무대왕(文武大王) 때까지가 전성기로서, 사다함(査多含)같은 이는 겨우 15 ~ 6세의 소년으로 그 제자의 수가 중국의 대성(大聖)인 공구(孔丘)와 겨룰 정도가 되었으며, 이밖에 현상(賢相), 양장(良將), 충신(忠臣), 용사(勇士)가 모두 이 가운데서 났다(<삼국사기>에서 인용한 김대문(金大問)의 설-원주)고 하였으나, 그 기간이 수십 년에 불과하여 소식(蕭息)이 완전히 끊어져 국선(國仙) 이전의 그 조상(祖)도 볼 수 없고 국선 이후의 그 자손(孫)도 볼 수 없으며, 돌연히 왔다가 돌연히 가버린 국선이니, 이것이 이 신라의 신괴록(神怪錄)이 아니고 무엇이냐.

많은 고기(古記)에서 <왕검(王儉)>이 국선의 시조(始祖)됨을 찾고, 고구려사에서 <조의선인(助衣先人)>등이 국선과 하나임을 찾으며, 이로부터 국선의 내원(來原)을 알게 되고, 고려사에서 이지백(李知白)이 "화랑을 중흥시키자" 고 한 논쟁과, 예종(譽宗)의 "사선(四仙)의 유적(遺跡)을 더욱 영예롭게 하라" 고 한 조서(詔書)와, 의종(毅宗)의 국선들이 관리로 등용될 길을 더욱 넓게 열어라" 고 한 조서 등을 보면 고려 때까지도 오히려 국선의 전통이 남아 있었음을 볼 수 있으니, 이것을 계통을 구하는 방법의 한 예로서 드는 바이다.

 

(二) 그 회통(會通)을 구해야 한다.

 

회통(會通)이란 전후(前後)로 피차(彼此) 간의 관계를 유취한다는 말이니, 구사(瞿史)에서도 회통(會通)이란 명칭은 있었으나 오직 예지(禮志) . 과목지(科目志) . 등  - 이도 회통의 방법이 완미(完美)하지 못하지만 - 이외에는 이 명칭이 응용된 곳이 없다. 그러므로 구사(舊史)에서는 무슨 사건이든지 홀연히 모였다가 흩어지는 채색 구름과도 같고, 갑자기 불다가 그치는 회오리바람과도 같아서, 도저히 그 전모를 포착할 수가 없다.

 

<고려사 묘청전(妙淸傳)을 보면, 묘청이 일개 서경(西京)의 승려로서 평양에 천도하여 금(金)나라를 치자고 주창하자, 일시에 군왕(君王) 이하 다수 신민(臣民)들의 동지를 얻어서 기세가 혁혁하다가, 마침내 평양에 터를 잡고 국호(國號)를 <대위(大爲)>라 하고, 원년(元年)을 <천개(天開)>라 하고, 인종(仁宗)에게 대위국(大爲國)황제의 자리에 오르라고 협박장 비슷한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반대당의 수령인 유생(儒生) 김부식(金富軾)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그 죄를 묻자 묘청은 한 번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부하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묘청을 미치광이라고 한 사평(史評)도 있지만, 당시에 묘청을 이와 같이 신앙한 자들이 많았던 것은 무슨 까닭이며, 묘청이 하루아침에 이와 같이 갑자기 패배하고 만 것은 무슨 까닭인가?

 

<고려사>의 세기(世記)와 열전(列傳)을 참고해 보면, 태조 왕건(王建)이 거란(堯)과 절교하고 북방의 고구려 옛 영토를 회복하려고 하다가 거사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그 후예인 제왕(帝王)으로서 광종(光宗) . 숙종(肅宗) 같은 이들은 모두 그 유지(遺志)를 성취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신하들 가운데도 이지백(李知白) 곽원(郭元) 왕가도(王可道) 같은 이들이 열렬히 북벌을 주장하였으나 다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예종(譽宗)과 윤관(尹瓘)이 군신(君臣)이 한마음이 되어 두만강 이북을 경영하기 위한 전쟁을 조금 벌였으나, 반대자가 너무 많아서 이미 획득하였던 토지인 아홉 성(城)까지 금(金)나라 태조(太祖)에게 다시 양보하고 돌려주고 말았다. 이는 당시의 무사(武士)들이 천고(千古)의 한(恨)으로 여기는 일이다.

그 뒤에 금(金) 태조가 요(堯)를 멸망시키고 중국 북방을 차지하여 황제라 칭하면서 천하를 호시탐탐 노렸는데, 금(金)은 원래 백두산 동북 지역의 여진(女眞) 부락으로서 우리에게 복역(服役)하던 노민(奴民: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여진노사고려(女眞奴事高麗)" (-> 여진은 고려를 노예가 주인을 섬기듯이 섬겼다.) 라고 하였고, <고려사>에 실린 김경조(김경조)의 국서(國書)에도 "여진이고려위부모지방(女眞以高麗爲父母芝邦"(-> 여진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여겼다.)이라 하였다.- 원주)으로서, 하루아침에 강성하여 형제의 위치가 뒤바뀌었다. 이에 나라 사람들 중에서 조금이라도 혈기가 있는 자라면 국치(國恥)에 눈물을 줄줄 흘릴 일이었다.

묘청이 이틈을 타서 고려 초엽부터 전해오는 "정도평양, 삼십육국래조(定都平壤, 三十六國來朝)"(-> 평양에 도읍을 정하면 36개 나라가 찾아와서 인사를 할 것이다.)라고 한 도참(圖讒)의 말을 인용하여 부르짖자, 사대주의(事大主義)자인 김부식 등 약간의 사람들 외에는 모두 묘청의 주장에 호응하여 대문호(大文豪)인 정지상(鄭知常), 무장(武將)인 최봉심(崔蓬深), 문무를 겸비한 윤언이(尹彦苡: 윤관(윤관의 아들- 원주 ) 등이 일치하여 북벌론을 주창하였으므로, 묘청의 세력은 일시에 성대해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묘청의 행동거지가 마치 미치광이처럼 바뀌어 평양에서 왕명(王命)도 없이 국호(國號)를 고치고 전 조정을 협박하니, 이에 정지상은 왕의 좌우에 있으면서 묘청의 행동을 반대하였고, 윤언이는 도리어 그 주의(主義)가 다른 김부식과 같이 묘청 토벌의 선봉에 나서게 되니, 이것이 묘청이 실패한 원인이다.

그러나 김부식은 출정하기 전에 정지상을 죽이고, 묘청을 토평(討平)한 후에는 또 윤언이까지 축출하여 북벌론자의 뿌리를 뽑아버렸다. 김부식은 성공하였으나 조선이 쇠약해진 터전은 이로부터 잡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참고하여 보면, 묘청이 성공하고 실패한 원인과 그가 패한 뒤에 생긴 결과가 분명해지지 않는가? 이로써 회통(會通)을 구하는 한 가지 예를 들어보았을 뿐이다.

 

(三) 감정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모년(某年: 연도를 잊어버렸으므로 뒤에 말하기로 한다.-원주)의 영국 해군성 보고서에, "세계 철갑선(鐵甲船)의 비조(鼻祖)는 1592년경 조선 해군대장 이순신(李舜臣)" 이라고 한 기록이 영국사에 올랐는데, 일본인들은 모두 당시 일본의 배가 철갑(鐵甲)이고 이순신의 것은 철갑이 아니라고 하면서(일본이 이 말을 하면서 든 각종 조선사의 그 책 이름들을 잊었고, <이조 오백년사<李朝五百年史>에도 이 말이 나와 있으나 그 저작자의 성명을 잊었으므로, 나중에 다른 글에서 밝히기로 한다. -원주> 그 보고서가 틀렸다고 반박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집필자들은 이를 과장하기 위하여 그 보고서를 그대로 인용함으로써 조선과 일본 중 어느 나라가 먼저 철갑선을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 암암리에 논쟁거리가 되었다. 

일본인의 말은 아무런 분명한 증거도 없는 거짓 주장인지라 반박할 가치조차 못 되거니와,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서 설명한 거북선의 제도를 보면, 배를 목판(木板)으로 덮었지철판으로 덮었던 것은 아닌 듯하므로, 이순신을 장갑선(裝甲船)의 비조(鼻祖)라고 할 수는 있어도 철갑선(鐵甲船)의 비조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철갑선(鐵甲船)의 창제자(創製者)라고 하는 것이 장갑선(裝甲船)의 창제자라고 하는 것보다 더 명예로운 것이기는 하지만, 창제하지 않은 것을 창제하였다고 하면, 이것은 진화(進化)의 단계를 어지럽힐 뿐이다.

가령, 모호한 기록 중에서 부여(扶餘)의 어떤 학자가 물리학(物理學)을 발명하였다든지, 고려의 어떤 명장(名匠)이 증기선(蒸氣船)을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문자가 발견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신용할 수 없는 것은, 남들을 속일 수 없으므로 그럴 뿐만 아니라, 곧 스스로를 속여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四) 본색(本色)을 보존해야 한다.

 

<대동운옥(大同韻玉)>에는, 국선(國仙), 구산(瞿山)이 사냥을 나갔다가 짐승들 중에 알을 품고 있는 놈들이나 새끼 가진 놈들까지 마구 죽였는데, 저녁이 되어 주막에 들자 그 집 주인이 저녁 밥상에 자기 다리의 살을 베어 놓고 "공(公)은 어진 사람이 아니니 사람의 고기도 먹어 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대개 신라 당시에 술랑(述郞), 영랑(永郞), 등의 학설(學說)이 사회에 물들어 국선오계(國仙五戒의 한 조(條)인 "살상유택(殺傷有擇)"(-> 살생을 함에 있어서는 가려서 해야한다.)을 사람들마다 받들어 행하던 때이므로, 이를 위반하는 자는 사람의 고기도 먹을 것이라는 반감으로 시골 주점의 객주(客主)가 이처럼 참혹하게 무안을 준 것이니, 그것이 수십 자(字)에 지나지 않는 기록이지만, 신라 화랑사(花郞史)의 일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미천왕기(美川王記)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봉상왕(烽上王)이 그 아우인 돌고가 딴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해서 죽이니, 돌고의 아들인 을불(乙佛: 미천왕의 이름-원주)이 겁이 나서 달아나 수실촌(水室村) 사람인 음모(陰牟: 당시 부호의 성명인 듯함-원주)의 집에서 품을 팔고 있었는데, 음모가 밤마다 집 옆에 있는 못에 기와나 돌을 던져서 그곳의 개구리들이 울지 못하도록 하고, 낮이면 나무를 하도록 시키고 잠시도 쉬지 못하게 하였다.

1년만에 도망을 쳐서 동촌(東村) 사람 재모(再牟)와 같이 소금장수가 되어 압록강에 이르러 소금 짐을 강동 사수촌(思收村)의 인가(人家)에 부려 놓았더니, 한 노파가 외상으로 소금을 달라고 하므로 한 말쯤 주었다. 그 후에 또 달라고 하기에 거절하고 주지 않았더니, 그 노파가 앙심을 품고 가만히 짚신 한 켤레를 소금 짐 속에 묻어 놓았다가, 그들이 길을 떠난 후에 쫓아와서 도적이라고 압록재(鴨綠宰)에게 고발하여, 짚신 한 켤레의 값으로 소금 한 짐을 다 빼앗고 곤장까지 친 후에 내보냈다.

 

이것도 불과 몇 줄 되지 않는 기록이지만, 또한 봉상왕(烽上王)시대에 부호(富豪)들의 포악함과 서민과 수령들의 사악한 행위를 그린 약도(略圖)이니, 봉상왕 시대 풍속사(風俗史)의 한 점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서들은 <모왕즉위(某王卽位)> . <모대신졸(某大臣卒)> 등의 연월이나 사실을 적은 것들이고, 위의 두 예문(例文)과 같이 시대의 본색을 쓰고, 보기 싫은 <견사모국(遣使某國)> (-> 어느 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모국래보(某國來報)> (-> 어느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보고하였다.) 등의 사실을 적은 것들이고, 위의 두 예문(例文)과 같이 시대의 본색을 그린 문자는 보기 어렵다. 이는 유교도의 춘추필법과 외교주의(外交主義)가 편견을 드러내어 전래하는 고기(古記)의 문자를 마음대로 덧칠하거나 고쳐서 각 시대별로 그 시대에 해당하는 사상을 흐리게 한 까닭이다.

 

옛날 서양의 어떤 역사가가, 이웃집에서 갑(甲)과 을(乙) 두 사람이 논쟁하는 말을 분명하게 들었다. 그러나 그 이틑날 남들이 전하는 갑과 을의 시비(是非)가 자기가 들은 것과는 전부 달랐다. 이에 "옛날부터의 역사가 모두 갑과 을 두 사람의 시비(是非)와처럼 잘못 전한 것을 적은 것은 아닌가?" 하고는 자기가 쓴 역사서를 모두 불에 던져버렸다.

취재기자가 취재하고 편집자가 교정하고 그 다음에 또 오자(誤字)를 교정보는 신문잡지의 기사도 오히려 그 진상과 크게 다른 것이 허다할 뿐 아니라 갑의 신문에서 이렇다 하면 을의 신문에서는 저렇다 하여 믿을 수 없는 일이 많은데, 하물며 고대의 한두 사가(史家)가 자기의 호오(好惡)에 따라 아무 책임감 없이 지은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마지막 왕 우(禑)의 목을 베고 그 자리를 빼앗을 때, 후세인이 자기에게 <以臣弑君(이신시군)>(->신하가 자기 임금을 죽이다.)의 죄를 줄까 염려하여 백방으로 "우(禑)는 원래 왕씨(王氏)의 왕통(王統)을 잊지 못할 요승(妖僧) 신돈(辛旽)의 천첩 반야(般若)의 소생(所生)이라고 하면서, "경효왕(敬孝王)이 신돈의 집에서 어떻게 우(禑)를 데려왔다. 그의 생모 반야(般若)가 우(禑)의 친모를 궁인 한(韓氏)로 정하는 것을 보고는 원통하여 한 차레 호곡(號哭)하자, 궁궐 대문도 그 원통함을 알고 무너졌다." 고 하여, 어떻게든 우(禑)가 신신씨(辛氏)임을 교묘하게 증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송도의 일부 유신(遺臣)들이 바위굴 속에 숨어서까지 우(禑)가 무함당하였음을 절규하였으므로, 오늘날 역사를 읽는 사람들은, 비록 확증은 없으나, 우(禑)가 왕씨이지 신씨(辛氏: 신돈의 아들)가 아니라고 믿는이들도 있다.

 

왕건(王建)궁예(弓裔)의 여러 장수들 중 하나로서 궁예의 은총을 받아 대병(大兵) 맡게 되자 , 드디어 궁예를 쫓아내어 객사(客死)케 하고, 또한 <이신시군(以臣弑郡)>의 죄를 싫어하여, 전력을 기울여 궁예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될 죄를 만들어 냈다.

"궁예는 신라 헌안왕(憲安王)의 자식으로서, 왕이 그의 생일이 5월 5일 임을 미워하여 내다 버렸더니, 궁예가 이를 원망하여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쳐서 멸망시키려 하였는데, 어느 절에서 벽에 그려져 있는 헌안왕의 초상화까지 칼로 쳤다." 고 하였다.

그리고는 더욱 확실한 증거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궁예가 난 뒤에 헌안왕이 엄히 명령을 내려 궁예를 죽이라고 하였는데, 한 궁녀가 누대 위에서 누대 아래로 궁예를 던지니, 아래에서 유모가 받다가 그만 잘못하여 손가락이 그의 한쪽 눈을 찔러 눈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유모가 비밀히 그를 길렀는데, 그가 10여 세가 되어 장난이 심하였다. 이에 그 유모가 울면서 말했다.

"왕이 너를 버리신 것을 내가 차마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몰래 길렀는데, 이제 네가 미친 듯이 멋대로 행동함이 이와 같으니, 만일 남이 알면 너와 나는 다 죽을 것이다." 고 하니 궁예가 듣고 울며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 뒤에 신라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군사만 모으면 큰 뜻을 성취할 수 잇겠다고 생각하고는 신라의 장수 기훤(其萱)에게 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신라의 장수 양길(梁吉)에게 갔더니 그를 잘 대우해 주었다. 그리하여 그의 군사를 나누어 동쪽으로 나와서 한 지방을 경략(經略)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가령 위에서 말한 것이 다 참말이라 한다면, 이는 궁예와 유모가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할 비밀인데, 그 비밀의 말을 듣고 전한 자가 누구이며, 가령 궁예가 왕이 되어 신라의 형법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게 된 뒤에 스스로 발표한 말이라 한다면, 그 말한 날짜나 장소는 기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말을 누구에게 하였는지 그 데리고 말한 사람을 어찌 기록하지 않았느냐.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부모를 부모라 하는 것은 나를 낳아준 은혜 때문인데, 만일 나를 살리려는 생각이 없고 나를 죽이려는 생각만 있는 부모라면 그가 무슨 부모이겠는가. 궁예가 비록 헌안왕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만약 사관(史官)의 말과 같다면, 그가 태어난 날 누대 위에서 죽으라고 던진 날부터 이미 부모(父)라는 명의(名義)가 끊어진 것이니, 궁예가 헌안왕의 몸에 직접 칼질을 하더라도 시부(弑父)의 죄가 될 수 없고, 신라의 왕릉과 도읍을 유린하더라도 조상들을 욕보인 죄를 논할 수 없을터인데, 하물며 왕의 등신(等身: 초상화)을 칼로 치고 문란한 신라를 혁명하려고 한 것이 무슨 큰 죄가 되겠는가.

그렇지만 고대의 좁은 윤리관으로는 그 두 가지 일 - 헌안왕의 초상화를 칼로 친 일과 신라국에 대한 불공 - 만으로도 궁예는 죽고도 남을 죄가 있는 것이니, 죽어도 남을 죄가 있는 궁예를 죽이는데 안 될 게 무엇이랴.

이리하여 왕건은 살아서 고려의 통치권을 가지고, 죽어서 태조 문성(太祖文聖)의 시호를 받았더라도 추호도 부끄러울 게 없게 된 것이니, 이것이 고려 사관이 구태여 세달사(世達寺)의 일개 걸승(乞僧)이던 궁예를 가져다가 고귀한 신라 황궁의 왕자를 만든 이유일 것으로 생각한다.

제왕(帝王)이라 하고 역적(逆賊)이라고 하는 것은 성공과 실패(成敗)의 다른 이름(別名)일 뿐이며, 정론(正論)이라 하고 사론(邪論)이라고 하는 것은 진실의 많고 적음의 차이일 뿐인데, 거기다가 보고 들은 것이 틀리고 잘못 전해지거나 집필자의 좋아함과 싫어함(好惡)까지 섞여있지 않은가. 사실도 흘러가는 물결과 같이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나니, 이미 지나간 사실을 그리는 역사의 저자(著史者)도 치인(癡人)이거니와 그 그림을 가지고 앉아서 시비(是非)와 곡직(曲直)을 가리려는 역사가는 더욱 치인이 아닌가? 아니다. 아니다.

 

역사는 개인을 표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표준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禑)의 성이 왕(王)인가 신(辛)인가를 조사하고 비교하기 보다는 다만 당시 중국에 대하여 전쟁을 선언하고 요동 옛 땅을 회복하려고 한 것이 성공할 수 있었을 일일까. 실패할 일이었을까.성공하든 실패하든간에, 그 결과가 이로운 것일까 해로운 것일까 하는 것부터 먼저 정한 후에, 이를 주장한 우(禑)와 반대한 이성계(李成桂)의 시비(是非)를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궁예의 성이 궁(弓)인가 김(金)인가를 변론하기보다, 신라 이래존승(존승)하던 불교를 개혁하여 조선에 새로운 불교를 성립시키려 한 것이 궁예 패망의 도화선이니, 만일 왕건이 아니었더라면 궁예의 그 계획이 성취되었을까?  성취되었다면 그 결과를 확인한 뒤에야 이를 계획하였던 궁예와 그에 적대한 왕건의 사(邪)와 정(正)을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개인이 사회를 만드느냐 사회가 개인을 만드느냐, 이는 고대부터 역사학자들이 논쟁해 온 문제이다.

이조 전반기(前半期)의 사상계는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사상으로 지배되었고, 후반기의 사상계는 퇴계산인(退溪山人)의 사상으로 지배되었다. 그렇다면 이조 오백년간의 사회는 세종 . 퇴계산인이 만든 바 아닌가.

신라 하대(下代)부터 고려 중엽까지의 6백년 동안은 영랑(永郞) . 원효(元曉)가 각기 사상계의 한 벙면을 차지하여, 영랑의 사상이 성하는 때에는 원효의 사상이 물러가고, 원효의 사상이 성하는 때에는 영랑의 사상이 물러가서 일진일퇴(一進一退), 일왕일래(一往一來)로 번갈아가면서 사상계의 패왕(覇王)이 되었으니, 6백년 동안의 사회는 그 양가(兩家)가 만든 바 아닌가.

백제의 정치제도(政治制度)는 온조대왕(溫祚大王)이 마련하여 고이대왕(古爾大王)이 완성하였으며, 발해(渤海)의 정치제도는 고제(高帝)가 마련하여 선제(宣帝)가 완성하였으니, 만일 온조와 고이왕이 아니었다면 백제의 정치가 무슨 형식으로 되었을는지, 또한 모를 일이다. 삼경(三京) . 오부(吳部)의 제도가 왕검(王儉)과 부루(夫婁)로부터 수천 년 동안 정치의 모형(模型)이 되었으니, 왕검과 부루가 아니었다면 조선의 국가사회가 어떻게 되었을는지 모를 것이니, 이로써 보면, 일개 위대한 인격자의 손 끝에서 사회라는 것이 만들어지는 것이고 사회의 자성(自性: 그 자체의 본성이나 성질)이란 것은 없는 게 아닌가?

 

그러나 다시 다른 한 면을 보자. 고려 말엽 불교의 불교의 부패가 극도에 달하여 원효종(元曉宗)은 이미 쇠미(衰微)해지고, 임제종(臨濟宗)에도 또한 뛰어난 인물이 없고 다만 십만 인의 반승회(飯僧會)와 백만 인의 팔관회(八關會)가 재물과 양식을 마구 소비하여 국민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사회는 벌써 불교 밖에서 새로운 생명을 찾기에 급급하였으므로, 안유(安裕)나 우탁(禹倬)이나 정몽주(鄭夢周)들이 유교(儒敎)의 목탁(木鐸)을 들고 나와서 두드린 지가 오래 되었다. 그 밑에서 세종(世宗)이 나오고 퇴계(退溪)가 나왔던 것이니, 그러면 세종이 세종으로 되고, 퇴계가 퇴계로 된 것은 세종이나 퇴계 자신이 아니라 사회가 만든 것이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삼국 말엽 그 수백 년간 찬란하게 발달한 문학과 미술의 영향을 받아서 소도(蘇途) 천군(天君)의 미신이나 율종(律宗) 소승(小乘)의 하품(下品) 불교로는 더 이상 영계(靈界)의 위안을 줄 수가 없어서 사회가 그 새로운 생명을 찾은 지가 또한 오래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의 진흥대왕(眞興大王)이나 고구려의 (淵蓋蘇文)은 이런저런 여러 종교를 다 통일 하려는 새로운 안(案)을 세우려고 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럴 때에 영랑(永郞)이 도령(徒領)의 노래를 불렀고, 원효(元曉)가 화엄(華嚴)의 자리를 펼쳤으며, 최치원(崔致遠)이 유교와 불교와 선교(仙敎)를 약간씩 모아서 섞는 신통한 재주를 보이자, 이에 각계가 갈채하여 이들 세 사람을 맞이하였던 것이니, 그렇다면 영랑이나 원효 . 최치원이 모두 본인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사회가 그들을 만든 것이 아닌가?

 

이로부터 한 가지 의문이 생겨난다.

원효는 신라 그때에 났기 때문에 원효가 된 것이고, 퇴계는 이조 그때에 났기 때문에 퇴계가 된 것이니, 만일 그들이 희랍의 강단(講檀)에서 태어났더라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되지 않았을까? 프랑스나 독일의 형대에 태어났더라면 베르그송(Bergson)이나 오이켄(Euken)이 되지 않았을까? 나폴레옹의 뛰어난 재주와 위대한 전략으로도 도포 입고 <대학(大學)을 읽던 도산서원(陶山書院) 부근에서 태어났더라면 물러나 송시열(宋時烈)이 되었거나 나아가 홍경래(洪景來)가 되었을 따름이지 않았을까? 크고 작음의 분량(分量)에 차이가 있어서 그와 똑같이 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 면목(面目)이 아주 달라졌을 것임은 단언할 수 있다.

 

논조(論調)가 이곳까지 미쳤으나, 개인은 사회라는 풀무에서 만들어질 뿐이니, 그렇다면 개인의 자성(自性)은 어디에 있는가? 개인도 자성이 없고 사회도 자성이 없다면 역사의 원동력(原動力)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이것을 보면서, 개인이나 사회의 자성은 없으나 환경과 시대를 따라서 자성(自性)이 성립(成立)한다고 생각한다.

조선이나 만주나 몽고 . 터키 . 헝가리나 핀란드가 3천 년 이전에는 적확(的確)히 하나의 혈족(血族)이었다. 그러나 혹은 아시아에 그대로 머물러 살고, 혹은 구라파로 이주함으로써 그 사는 주(州)가 동과 서로 달라졌으며, 혹은 반도로 혹은 대륙으로, 혹은 사막 혹은 비옥한 땅, 혹은 온대나 한대 등지로 분포(分布)함으로써 그 사는 땅의 멀고 가까움이 달라졌으며, 목축과 농업, 침략과 보수 등 생활과 습속이 해와 달을 지내면서 더욱 현격하게 달라져서 각자의 자성(自性)을 가지게 되었는 바, 이것이 즉 환경에 따라서 성립한 민족성(民族性)이라 할 것이다.

 

같은 조선이라 하더라도 이조시대는 고려시대와 다르고, 고려시대는 또 동북국(東北國: 渤海) 시대와 다르고, 동북국 시대는 삼국시대와 같지 않으며, 왕검(王檢) . 부루(夫蔞)시대와도 같지 아니하여, 멀게는 천년의 전후(前後)가 다르고, 가깝게는 백년 전후가 다르니, 지금 이후로는 문명의 진보가 더욱 빠른 속도로 이루어져서 10년 이전이 태고(太古)되고, 1년 이전이 먼 옛날로 될는지도 모르는 바, 이것이 이른바 시대를 따라서 성립한 사회성(社會性)이다.

 

원효와 퇴계가 시대와 경우를 바꾸어 태어났더라면, 원효는 유자(儒者)가 되고 퇴계는 불자(佛者)가 되었을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생기발랄한 원효더러 주자(朱子)의 규구(規矩: 규칙과 법도)만을 엄숙히 지키는 퇴계가 되라고 한다면 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충실하고 용졸(庸拙)한 퇴계더러 불가(佛家)의 별종(別宗)을 수립하는 원효가 되라고 한다면 이 또한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왜냐 하면, 시대와 경우가 인물을 산출하는 원료로 된다는 점은 같으나, 인물이 시대와 환경을 이용하는 능력은 다르기 때문이다. 민족도 개인과 같이, 어느 때 어느 땅에서 갑(甲)민족이 올린 성적이 이러이러 하였으니, 그때 그곳에 을(乙)민족이 갔더라도 꼭 이만한 성적을 올렸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너무 성급한 판단이다.

 

대개 개인이나 민족에게는 두 가지 속성(性)이 있으니, (一)은 항성(恒性: 시대와 환경이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성질이고, (二)는 변성(變性: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변하는 성질)이다. 항성(恒性)은 제1의 자성(自性)이고 변성(變性)은 제2의 자성(自性)이다. 항성이 많고 변성이 적으면 환경에 순응하지 못하여 멸절(滅絶)할 것이며, 항성은 적고 변성이 많으면 항성이 더 우수한 자의 정복을 받아 열패(劣敗)할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두 가지 자성(自性)의 많고 적음을 조절하고 무겁고 가벼움을 고르게 하여 그 생명을 천지(天池)와 같이 장구하게 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오직 민족적 반성(反省) 여하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것이 근거하여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하여 두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으니, (一) 사회가 이미 결정된 국면에서는 개인이 힘을 쓰기가 매우 곤란하고, (二) 사회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국면에서는 개인이 힘을 쓰기가 아주 쉽다는 것이다. 정여립(鄭汝立)이 "충신(忠臣)은 두 임금(二君)을 섬기지 않으며, 열녀(烈女)는 두 지아비(二夫)를 바꾸지 않는다." 고 한 유가(儒家)의 윤리관을 일필(一筆)로 말살하고, "인민에게 해가 되는 임금은 죽여도 되며, 의(義)를 행하지 않는 지아비는 버려도 된다." 고 하면서, "하늘의 뜻과 사람들의 마음(人心)이 이미 주(周)나라에서 떠나갔는데도 주나라를 존중해야 한다니, 이 무슨 말이며, 사람의 무리들과 땅이 벌써 조조(曺操)와 사마(司馬懿)에게로 돌아갔는데도 구차하게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유현덕(劉玄德)이 정통이라니, 이게 다 무슨 말이냐!" 고 하면서 공구(孔丘)와 주자(朱子)의 역사 필법(筆法)을 반대하였다.

 

그의 제자 신극성(辛克成) 등은 "이는 참으로 앞의 성현들이 말한 적이 없는 말씀이다." 고 하였고, 당시의 재상과 학자들도 그의 재기(才氣)와 학식에 기우는 자들이 많았으나, 세종대왕이 심어놓은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사상이 벌써 터를 잡고 있었고, 퇴계 선생의 존군무성(尊君慕聖: 임금을 받들고 성현의 말씀을 흠모함)의 주의(主義)가 이미 집을 지어서 전 사회가 안정되고 정돈된 지 오래이니, 이처럼 어디서 갑자기 날어온 듯한 혁명적 학자를 어찌 용납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애매한 한 장의 고변장(告變裝)에 그의 머리가 잘려 나가고 온 집안이 폐허가 되었으며, 평생의 저술들이 모두 불태워지고 말았던 것이니, 이는 곧 (一)사회가 이미 결정된 국면에서는 개인이 힘을 쓰기가 매우 곤란하다는 것의 한 사례이다.

 

최치원(崔致遠)이 중국 유학생으로 떠나갈 때 그의 아비가 "10년이 되어도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 아니다." 고 하면서 일개 한문 졸업생(漢文卒業生)되기를 바랐을 뿐이었다.그리고 최치원 자신도 돌아와서 "巫峽重峰之處, 絲入中原, 銀河列宿三年, 錦還東國(무협중봉지처, 사입중원, 은하열숙삼년, 금환동국)" (->산천 험한 나라에서 넓은 중원(중원)으로 한 올 실처럼 들어가서 3년이 지난 후에 동국 신라로 금의환양(금의환양)하였다.)이라고 노래하여 그가 일개 한문 졸업생 된 것을 남에게 자랑하였다.

그는 모든 사상은 한(漢)이나 당(唐)에만 있는 줄 알았지 신라에 있는 줄은 몰랐으며, 학식은 유서(儒書)나 불전(佛典)을 관통하였으나 본국의 고기(古記)한 편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주의는 조선을 가져다가 순전히 중국화 하려는 것뿐이었고, 그의 예술이란 기껏해야 대구(對句)를 지으면서 청천(靑天)으로 백일(白日)을 대(對)하고, 황화(黃花)로써 녹죽(綠竹)을 대(對)하는 식의 사륙문(四六文)에 능한 것 뿐이었다.

당시 영랑(永郞)과 원효(元曉) 양파가 다 노후하여 사회의 중심이 되는 힘을 잃고 새로운 인물에 대한 수요가 마치 굶주린 자가 밥을 구하는 것과 같았으므로, 일개 한문 졸업생에게 대선생(大先生)이란 휘호(徽號)가 단번에 돌아갔으며, 이어서 천추혈식(千秋血食): 동국문묘(동국문묘)에 그 이름이 올라 오래도록 제사를 받고 존숭되었음을 말한다, - 옮긴이)의 예(禮)까지 그에게 바쳐져서, 고려에 들어와서는 영랑과 원효의 양파 인사들과 마주 앉게 되었는바. "때를 잘 만나면 더벅머리 총각도 성공한다." 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이것은 (二)사회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국면에서는 개인이 힘을 쓰기가 아주 쉽다는 것의 한 사례이다.

 

이런 일이 어디 학계뿐이랴. 모든 사업이 다 그러하니, 기훤(其萱)과 양길(梁吉)이 일시에 웅대하게 그 세력을 펼친 것은 신라 말의 정해지지 않은 국면에서 일어난 일이고, 이징옥(李澄玉)이나 홍경래(洪景來)가 뜻밖에 패망한 것은 이조의 이미 결정된 국면에서였기 때문이다.

임백호(林白湖)가 말하기를 "나도 중국의 육조(六朝) 오계(五季)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돌림 천자(天子) 하나는 얻어 하였겠다."고 하였다. 임백호 같은 시인에게 육조 . 오계 시대의 유유(劉裕)나 주전충(朱全忠) 등처럼 반란군의 괴수가 될 능력이 있어서 돌림 천자나마 차지할 위력이 있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러나 중국의 천자가 되려면 한(漢) 당(唐)의 치세(治世)보다 육조 . 오게의 난세(亂世)가 더욱 쉬울 것이란 점은 자연스러운 이치일 것이다.

 

이미 결정된 사회의 인물은 늘 앞 사람의 필법을 배워서 이것을 부연하여 확장할 뿐이니, 인물 되기는 쉬우나 그 공이나 죄가 크지 못하다. 반면에 혁명성을 가진 인물(정여립과 같은 사람-원주)은 매양 실패로 마칠 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그를 원망하고 질투하여 그의 언론(言論)이나 행사(行事)의 종적까지 지워 없애기 때문에 후세에 끼치는 영향이 거의 제로가 되고, 오직 3백년이나 5백년 뒤에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하나 둘 있어서 그 유음(遺音)을 감상할 뿐이다.

그리고 아직 결정되지 못한 사회의 인물은 반드시 창조적 . 혁명적 남아(男兒)라야 될 것 같으나 어떤 때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작은 칼(小刀)로 세공(細工)하는 하품(下品)의 재주꾼 (최치원과 같은 부류- 원주)으로 외국인의 입술을 모방하여 말하고, 웃고 노래하고, 우는 모습이 그들과 꼭 닮아서 사람들을 감동시킬 만하면 슬그머니 인물(人物)로서의 지위를 얻기도 하지만, 결국은 인격적 자성(自性)의 표현은 없이 노예적 습성만 발휘되어 전 민족의 항성(恒性)을 매몰시키고 변성(變性)만 조장하는 나쁜 기계가 되고 만다. 이는 사회를 위하여 우려되는 바이므로, 인물이 되려는 뜻을 가진 자가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바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