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상고사

3, 구사(舊史)의 종류와 그 득실(得失)의 간략한 평가

운우(雲雨) 2014. 4. 20. 12:44

조선의 역사에 관한 서류(書類)를 손꼽자면 우선 <신지(神志)>부터 비롯하는데, <신지(神志)>는 권람(權擥)이 응제시(應制詩)에서 단군(檀君)시대의 사관(史官)이라고 한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보건대, 단군은 곧 수두 임금이고, 신지(神志)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곧 <수두 임금>의 우두머리 신하(首佐)인 관직 이름 신치(臣智)이니 (수두와 신치에 상세한 설명은 사상사(思想史)에서 보임 - 원주), 역대의 신치(神志)들이 매년 10월 <수두> 대제(大祭)에 우주의 창조와 조선의 건설과 산천지리의 명승(名勝)과 후인이 거울삼아 경계할 일을 들어 노래하였는데, 후세의 문사(文士)들이 그 노래를 혹 이두문(史讀文)으로 이를 편집하고, 혹은 한자의 오언시(五言詩)로 이를 번역하여 적어서 왕궁에 비장(秘藏)하였으므로 <신지비사(神志秘詞)> 혹 <해동비록(海東秘錄)> 등의 명칭이 있게 되었다.

 

그 적힌 바가 사실(事實)보다 잠언(箴言)이 많아서 옛 사람들이 왕왕 예언(預言)과 같은 종류로 보았으나, 이조 태종(太宗)이 유학을 중심으로 삼고 그 밖의 일체를 배척하여 이단(異端)으로 간주되는 문자들을 모두 불살라 버렸는데, <신지(神志)>도 그때 액운(厄運)을 면치 못하여 겨우 <고려사(高麗史)> 김위제전(金謂提傳)에 적힌 "여창추극기, 칭간부소량, 추자오덕지, 극기백아강, 조강칠십국, 뢰덕호신정, 수미균평위, 홍방보태평, 약폐삼유지, 왕업유쇠경)" (-> 마치 저울 몸(대), 저울 달림(鍾), 저울 머리(판)와 같은데, 저울대는 <부소량(扶疎樑))>, 저울추는 <오덕지(五德地)>, 저울판은<百牙岡)>에 해당한다. 찾아오고 항복해온 나라가 70개국이니, 그 덕에 의지하여 단군의 정신(精神)을 지켜나갔다. 우두머리와 말미가 같은 위치에서 균형을 이루니, 나라가 흥성하여 태평을 누렸다. 그러나 만약 이들 삼경(三京)중 하나라도 폐한다면 왕업은 쇠하여 기울어질 것이다.)이라고 한 10구절(句節)만 전해졌다. 만일 그 전부가 다 남아 있다면 우리의 고사(故事) 연구에 얼마나 큰 힘이 되겠는가.

 

북부여(北扶餘)는 왕검(王儉) 이후 그 자손들이 서로 그 간수해온 보물(寶物)을 지켜서 태평함과, 많은 인구와, 부유함을 자랑하여 <진서(晉書)>부여전에, (-> 그 나라는 백성의 수가 많고 부유하여 선대 이래 나라가 파괴던 적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원주) 볼만한 사료가 많았으나, 모용외(慕容猥)의 전란에그 나라 이름과 함께 망실(亡失)하였다. 또한 고구려는 동명성제(東明聖帝), 대무신왕(大武神王)의 대(代)에 사관이 조선 상고부터 고구려 초엽까지의 정치상의 사실들을 기재한 <유기(留記)> 1백 권이 있었는데,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串丘儉)의 난리 때 빼앗겨 버렸다. 단군 왕검의 이름과 삼한(三韓),부여의 간략한 역사가 <위서에 모두 적혀 있는 것은 위나라 사람들이 <留記>에서 주워간 것들을 근거로 기록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 뒤에 백제 중엽에 고흥(高興) 박사가 <서기(書記)>를 지었고, 고구려 말엽에 이문진(李文眞) 박사가 <신집(新集)>을 지었으며, 신라는 진흥대왕(眞興大王) 전성시대에 거칠부(居柒夫)가 신라 고사(故事)를 저술하여 삼국이 다 한 세대의 전고(典古)를 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 한 마디 말이나 글자도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 이는 천하만국에 없는 일인지라, 역사에 영혼이 있다면 처참해서 눈물을 뿌릴 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것은 모두 다 일종의 정치사이지만,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후에 신라는 무(武)를 중단하고 문(文)을 닦음으로써 상당한 역사서들이 저술되었는데, 무명씨(無名氏)의 <선사(仙史)>는 종교사로 볼 것이고, 위홍(魏弘)의 <향가집(鄕歌集)>은 문학사로 볼 것이며, 김대문(金大文)의 <고승전(高僧傳)>과 <화랑세기(花浪世記)>는 학술사로 볼 것이니, 사학(史學)이 어느 정도 발전하였다고 할 수도 있으나, 이것들도 모두 글자가 지워져버린 비석이 되어 버렸다.

고려에 와서는 작자의 성명을 알 수 없는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사기(海東古記)>, <삼국사(三國史)> 등과 김부식(金富軾)의 <三國史記>와 일연(一然)의 (三國遺史)가 있었으나, 지금까지 전하는 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뿐이다.

 

그 전해오거나 전해오지 않게 된 원인을 생각해 보면, 김부식과 일연 두 사람의 저작이 다른 것에 비해 뛰어나서 이것들만 전해오는 것이 아니라, 대개 고려 초엽부터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아가 북부의 옛 영토를 회복하지고 주장하는 화랑의 무사들이 한 파(派)가 되고 사대(事大)를 국시(國是)로 삼아 압록강 이남 한 구석에서 편안히 살자고 주장하는 유교도(儒敎徒)가 또 또 한 파가 되어, 두 파가 논리의 창을 갈아 수백 년 동안 서로 대치해 왔다.

그때 불자(佛子) 묘청(妙淸)이 화랑의 사상에다가 음양가(陰陽家)의 미신을 보태어 평양에서 거병하여 북벌(北伐)을 실행하려다가 유교도인 김부식에게 패망하고, 김부식이 이에 사대주의를 근본으로 하여 <삼국사기>를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동, 북 양 부여를 빼버려 조선 문화의 근원을 진흙 속에 묻어 버리고, 발해(渤海)를 버려서 삼국 이래 결정된 문명을 짚더미에 내던져 버리고, 이두문과 한역(漢譯)을 구별할 줄 몰라서 한 사람이 여러 사람으로 되고, 한 곳의 지명이 여러 곳으,로 된 것이 많으며, 국내 역사서와 외국 서적을 취사 선택하는 데 흐려서 전후가 서로 모순되고 사건이 중복된 것들이 많아서 거의 역사적 가치가 없다고 할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이도 그 뒤 얼마 안 가서 고려가 몽고에 패하여 홀필렬(忽必烈: 원 나라 황제 쿠빌라이 - 원주) 의 위풍(威風)이 전국을 뒤흔들게 되자 <황경(皇京)> 제궁(帝宮) 등의 명사가 철폐되고, 해동천자(海東天子)의 팔관약부(八關樂府)가 금지되고, 전해오던 문헌에 만일 독립자존(獨立自尊)에 관한 것이 있으면 일체 금지되고 기피되었다. 이러한 때에 허다한 역사 저술들 중에서 유일하게 사대사상을 고취한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그에 딸려 붙은 <삼국유사>만이 남아서 전해올 수 있게 된 것이다.

 

고대 당대의 사기(史記)를 말하면, 고려 말세에 군신(君臣)들은 고종(高宗) 이전 나라 힘이 강성했던 때의 기록들 때문에 자칫 몽고의 기피함과 미워함을 사게 될까봐 두려워서 깎아 버리거나 혹은 덧칠하여 고치고, 오직 비사(卑肆: 말을 낮추어 겸손하게 함) 와 후폐(厚弊: 많은 예물) 로써 북방 강국 등에게 복종하여 섬기던 사실들을 부연하거나 혹은 위조하여 민간에 전하여 퍼뜨렸는데, 이런 기록들이 곧 이조(李朝)의 정인지(鄭隣趾)가 찬술한 <고려사(高麗史)의 기초 사료가 되었다.

 

이조(李朝) 때 세종(世宗)이 사책(史冊)에 비상히 유의하였으나, 다만 그 할아버지인 태조(太祖)와 아버지인 태종(太宗)이 호두(虎頭)재상인 (崔瑩)의 북벌군 내에서 반란을 일으켜 사대(事大)의 기치를 들고 혁명의 기초를 세웠기 때문에, 자신이 권근(權近) . 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조선사략(朝鮮史略)> <고려사> <고려사 절요(節要) 등을 편찬할 때 몽고의 압박을 받던 고려 말엽 이전의 각종 실기(實記)에 근거하여 역사를 짓지 못하고, 몽고의 압박을 받은 이후 외국에게 아첨하던 문자(상대를 大國, 조선을 小國이라 적는 등의 역사 기록 방법을 말한다. - 옮기이)위조한 고사(故事)근거하여 역사를 지어 구차스럽게 그 사업을 끝마치고, 정작 전대의 실록(實錄)은 세상에 전포(傳布)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규장각 안에 비장(批藏)해 두었다가 임진왜란의 병화(兵火)에 불타 없어져 버렸다.

 

그 뒤에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의 왕위를 찬탈하고 만주 침략의 꿈을 품고 강계(江界)에 군을 주둔(屯兵)시켰으나,

1) 그것이 태조(太祖)의 존명건국(尊明建國): 나라를 세움에 있어 명나라를 존중함 - 옮긴이)의 국시(國是)와 충돌하게 되자 여러 신하들의 간쟁(諫爭)이 끊어지지 않았으며,

2) 중국 대륙에 용맹하고 무예가 뛰어나고 음험하고 사나우며 명석한 황제 성조(成祖)가 있어서 조선에 대한 정찰이 엄밀하였으며,

3) 마침 명나라 사신 장녕(張寧)이 군대 주둔(屯兵)의 이유를 엄중히 힐책하였으므로, 세조는 그 무예를 숭상하고 공 세우기를 좋아하던 마음이 구름처럼 사라지고 조선의 문헌(文獻)들을 정리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그리하여 불경(佛經)을 인쇄하고 유학(儒學)을 장려하는 한편 사료(史料)의 수집에도 전력하여 조선 역대 전쟁사인 <동국병감(東國兵監)>과 조선의 풍토사인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편찬하고, 그 외에도 허다한 서적을 간행하였으니, 비록 다대(多大)한 공헌은 없으나 미소한 공적은 있다고 할 것이다.

 

선조(宣祖) 인조(仁祖) 이후에는 유교계에 철학 . 문학의 큰 인물들이 배출되고 역사계도 차차 진보하기 시작하였다. 허목(許穆)의 단군(檀君) . 신라 등은 각 세기(世記)가 너무 간략하기는 하나 가끔 독특한 견해가 있고, 유형원(柳馨遠)은 비록 역사에 관한 전문적인 저서는 없지만 역대 정치제도를 농술한 <반계수록>이 있는데, 이 또한 역사학계에 도움됨이 적지 않다.

 

한백겸(韓百謙)의 <동국지리설(東國地理說)>이 비록 수십 행(行)에 불과한 간단한 논문이긴 하나 일반 사학계에 큰 광명을 열어, 그 후로 정약용(丁若鏞)의 <疆域考>나 한진서(韓鎭書)의 지리서(地理書)나,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동사강목)에 부록으로 실려있는 강역론(疆域論)이나, 그 외에 각가(各家)의 조선 역사 . 지리를 설명하는 자들은 모두 한(韓) 선생의 그 간단한 지리설을 부연 설명하였을 뿐이다.

나로서 보건대, 그 지리설 중에 삼한(三韓)과 조선을 나눈 것은 범엽( 范曄: <후한서(後漢書)>의 저자-옮긴이) 이 전한 동이열전(東夷列傳)의 지리(地理)를 설명하기에는 충분하나, 이로써 조선 고대 3천년간의 지리를 단정하여 "東國, 自古, 漢江以南爲三韓, 韓江以北爲朝鮮, (동국, 자고, 한강이남위삼한, 한강이북위조선)."(-> 동국은 예로부터 한강 이남은 삼한이 되고, 한강이북은 조선이 되었다.)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은 너무 맹목적(盲目的)이고 무단적(武斷的)이라 할 것이다.

이는 선생이 三神(삼신), 三京(삼경), 三韓(삼한), 三朝鮮(삼조선),이 서로 연결된 관계와 발조선(發朝鮮), 발숙신(發肅愼), 扶餘朝鮮(부여조선), 濊貊朝鮮(예맥조선), 辰國(진국), 진번조선(眞番朝鮮), 진한(辰韓), 마립간(麻立干), 마한(馬韓), 모한(慕韓) 등이 모두 동음이역(同音異譯: 그 본래 음(音)은 같으나 서로 다른 한자로 번역됨- 옮긴이)임을 몰랐기 때문에 이와 같은 큰 착오가 있게된 것이지만, 그러나 동이열전(東夷列傳)에 나오는 삼한(三韓)의 위치는 선생으로부터 비로소 간단명료하게 분석되고 해석되어, 이때까지 역사 기록만 있고 역사 연구는 없었다고 할만한 조선의 사학계에서 선생이 처음으로 사학(史學)의 단서를 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정복(安鼎福) 선생은 평생 동안 역사 한 분야만 연구해온 5백년 이래 유일한 사학(史學) 전문가라 할 수 있으나, 그러나 다만 초야의 가난한 선바로서 서적의 열람이 부족하여 <삼국사기> 같은 것도 그의 만년에야 겨우 다른 사람이 손으로 베낀 오자(誤字) 많은 것을 얻어 보았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가 저술한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궁예(宮裔)의 국호를 마진기(摩震起)라고 쓰는 웃음거리를 남겼고, 중국 서적 중에서도 참고에 필요한 <위략(魏略)>이나 남제서(南濟書)>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몰라서 고루한 말들이 적지 않다. 게다가 시대에 유행하는 공자의 춘추(春秋)주희(朱熹)의 <강목(綱目)>의 함정에 빠져서 기자본기(箕子本記)에서는 단군과 부여를 그 부용국(附庸國: 속국)이라 하였으며, 신라가 망한 다음에 궁예와 왕건을 참주(僭主)라고 한 망발도 있고, 너무 황실 중심주의를 고수하여 정작 민족 자체의 활동을 무시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연구의 정밀함은 선생 이상 갈 사람이 없으므로, 지지(地志)의 틀리고 잘못된 부분을 교정하고 사실의 모순을 변증(辨證)한 점에 있어서는 선생의 공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혜풍(柳惠風)의 <발해고(渤海考)>는 대씨(大氏) 3백년 간의 문치(文治)와 무공(武功)의 사업을 수록하여 1천여 년 동안 사가(史家)들이 압록강 이북을 빼버린 결실(缺失)을 뒤늦게 보완하였다.

이종휘(李鐘徽)의 <수산집(修山集)>은 단군 이래 조선 고유의 독립적 문화를 노래하여 김부식 이후 사가들의 노예사상을 갈파(喝破)함으로써, 비록 특유한 발명(發明)과 채집(採集)은 없다고 하더라도, 다만 이 한 가지만으로도 또한 불후의 업적이 될 것이다.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海東繹史)>는 오직 중국과 일본 등의 서적들 가운데 보인 본국 역사에 관한 문자를 수집하여 그대로 많은 권수의 책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삼국사기>에 빠진 부여, 발해, 가락(駕洛) . 숙신(肅愼) 등도 모두 각기 한 편(編)씩 세기(世記)가 있으며, <동국통통감>에 없는 저근(姐瑾) . 사법명(沙法名) . 혜자(慧慈) . 왕인(王仁) 등도 각기 여러 줄(茁)의 전기가 있으며, 궁중용어(宮語) . 문자(文字) . 풍속(風俗)등의 부분이 있고, 게다가 그 조카 진서(鎭書) 씨의 <속 지리(地理續)>가 포함되어 있어서 후세인들의 고증(考證)의 수고를 덜어줄 뿐만 아니라 또한 사학에 뛰어난 두뇌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다만,

1) 너무 자구(字句) 사이에서 조선에 관한 사실을 찾다가 민족 대세의 상호관계를 잃어버렸는바, 곧 부루(夫縷)와 하우(夏禹)의 국제적 교제관계로 보아야 할 <吳越春秋(오월춘추)>의 州愼(주신)의 倉水使者(창수사자)와, 2천년 간 흉노(匈奴)와 연(然)과 삼조선(三朝鮮)과 혹 화친하고 혹 싸웠던 전후의 큰 일들을 다 빠뜨렸으며,

2) 유교의 위력에 눌리어 고죽국(孤竹國)이 조선족에서 갈려 나간 분계(分係)임을 발경하지 못하는 동시에 백이(伯夷) . 숙제(淑濟)의 성명을 빠뜨렸으며,

3) 서적 선택에 있어서 정밀하지 못하였는바, <진서(晉書)> 속석전(束晳傳)을 예로 들어 보면, "우살백이, 태갑살이윤" (禹殺伯益, 太甲殺伊尹)" (->우(禹)가 백익(伯益)을 죽였고, 태갑(太甲)은, 이윤(伊尹)을 죽였다.) 등을 기록한 <죽서기년(竹書紀年)>이 진본(眞本)이고현존하는 <竹書起年>은 위서(僞書)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 위서를 아무런 논박 없이 그대로 기재하였으며,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무릉서(茂陵書)>는 당(唐)나라 사람이 위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믿고 사용하였으며, 이밖에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이 없는 사적(事蹟)을 만들어내어 우리나라를 속이고 욕보인 것들을 많이 그대로 수입한 것이 이 책의 결함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조(李朝) 일대(一代)의 일들을 적은 역사로 말하면, 내가 일찍이 정종(正宗) 때에 기록된 <수서(修書)>라는 승두세자(繩頭細字): 파리 머리만한 작은 글자.- 옮긴이)로 쓰인 2백 권의 거질(巨帙)을 보았었다. 만일 관(官)에서 쓴 <국조보감(國朝寶監)> <조야첨재(朝野僉載)>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개인 저술의 사서(史書)까지 합친다면 수백 대의 수레에다가득 싣고도 남을 분량이다.

나는 일찍이 고려 이전 역사에 대하여 쌓인 의문부터 해결하려고 하여, 이 태조(李太祖) 이후의 사실을 적은 역사로는 <조야집요(朝野輯要)> <연려실기술(然黎室紀述)> 등 몇몇 책들을 대강 흩어본 이외에는 자세히 읽어본 것이 없으므로 아직 그 장단(長短)과 득실(得失)을 말하지 못하거니와, 대개 십중 칠팔이 사색당쟁사(四色黨爭史)임은 단언할 수 있으니, 아, 슬프다. 이조 이래 수백 년간의 조선인의 문화사업은 이것으로 그쳤도다.

 

이상에서 열거한 역사 서책들은 재론하자면, 대개가 정치사들이고 문화사에 상당하는 것은 몇 개 되지 못한다는 것이 그 첫째 유감이고, 정치사 중에서도 <동국통감> <동사강목> 이외에는 고금을 두루 관통한 저작(著作)이 없고 모두 한 왕조가 흥하고 망하게 된 전말(顫末)로써 글의 시작과 끝을 삼았음이 그 두 번째 유감이며,

공자의 춘추(春秋)를 역사의 극칙(極則 : 절대적인 준칙- 옮긴이)으로 알고 그 의레(義例)를 흉내 내어 존군억신(尊君抑臣 : 군왕을 높이고 신하를 억누름- 옮긴이)을 주장하다가 민족의 존재를 잊어버렸고, 숭화양이(崇華樣夷 : 중국을 숭상하고 오랑캐를 물리침 - 옮긴이)를 주장하다가 끝에 가서는 자기 나라까지 배격하는 벽론(僻論 : 편벽된 주장이나 논리)에 이르게 된 것이 그 세 번째 유감이며,

역사를 자기 국민들이 비추어 볼 거울로서 제공하려 하기보다는 외국인에게 아첨하고 잘 보이려고 한 뜻이 더 많아서 자기 나라의 강토를 조금씩 잘라서 양보함으로써 끝에 가서는 건국 시대의 수도(首都)까지 모르게 하였음이 네 번째 유감이다.

 

우리의 사학계가 이와 같이 소경, 귀머거리, 절뚝발이, 앉은뱅이의 각 병들을 모두 가져서 정당한 발달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너무 빈번한 내란과 외환(비교적 오랫동안 평안하였던 이조 한 대(代)는 제외하고- 원주) 등 천연, 재화와 관계된 것은 그만두고라도, 인위적 장애가 된 것들만 들어보더라도 다음과 같다.

1) 신지(神志) 이래 역사를 비장하던 버릇이 역사의 고질병이 되어, 이조에서도 중엽 이전에는 <동국통감> <고려사> 등 몇 종의 관(官)에서 발행한 사서(官行本) 이외에는 개인의 역사 저술이나 소장을 금지하였으므로, 이수광(李睡光)은 내각(內閣 : 규장각 - 원주) 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고려 이전의 비사(秘史)를 많이 볼 수 있었고, 이언적(李彦迪)은 <沙伐國傳>을 썼으나 친구에게 보이기를 꺼려하였다.

현 왕조의 득실(득실)을 기록하지 못하게 한 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간혹 있는 일이지만, 지나간 고대 역사를 개인이 쓰지 못하게 하거나 개인이 보는 것까지 금지한 것은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일이다. 그리하여 역사를 읽는 이가 없게된 것이다.

2) 송도(松都)를 지나다가 만월대(滿月臺)를 쳐다보라. 반쪽자리 기와인들 남아있더냐. 초석 돌 하나가 남아있더냐. 넓은 밭에 이름만 만월대라 할 뿐 아니더냐. 아, 슬프다. 만월대는 이조(李朝)의 부항(父行 : 아버지 항렬)으로 멀지 않은 고려조(高麗朝)의 궁궐인데, 무슨 병화(兵火)에 탔다는 전설도 없는데 어찌 이 같이 무정한 유허만 남았느냐. 이와 같은 예로서 부여에서 백제의 찾을 수 없고, 평양에서 고구려의 구형(舊型)을 볼 수 없는 실정이다.

이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후에 일어난 왕조가 앞 왕조를 미워하여 역사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은 무엇이든 파괴하고 불살라 없애 버리기를 위주로 하므로, 신라가 흥하자 고구려 . 백제 두 나라의 역사가 볼 것 없게 되었으며, 고려가 일어나자 신라의 역사가 볼 것 없게 되었으며, 이조가 일어나자 고려의 역사가 볼 것 없게 되어, 언제나 현재로써 과거를 계속하려 하지 않고 말살하려고만 하였다. 그리하여 역사에 쓰일 재료가 빈약하게 된 것이다.

 

3) 현종(顯宗)이 자기 "조총(鳥銃)의 길이가 얼마나 되느냐?" 고 묻자, 유혁연(柳赫然)이 두 손을 들어 "요만하다." 고 하면서 그것을 형용하였다. 기록하는 관리(注書)가 그 문답의 정형(情形)을 받아쓰지 못하여 붓방아만 찧고 있자 유혁연이 돌아보며, (임금께서 유혁연에게 조총의 길이를 묻자, 혁연이 두 손을 한 자 남짓 들고 대답하기를, 이와 같습니다. 라고 하였다) 라고 쓰지 못하느냐." 라고 힐책하였다. 숙종(肅宗)이 (朴泰補)를 국문하면서 "이리 저리 잔뜩 결박하고 몽우리 돌로 때려라." 고 하였는데 주서(注書) (高司直)이 서슴없이 "必字形薄之, 無隅石擊之(필자형박지, 무우석격지)" (-한자 '必' 모양로 묶고 모나지 않은 돌로 때려라.) 라고 썼다. 그래서 크게 숙종의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들은 궁정의 가화(佳話)로 전해오는 이야기들이지만, 반면에, 남의 글을 가지고 내 역사를 기술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볼 수 있는 예들이다.

국문(國文)이 태어나기도 늦게 태어났지만, 태어난 뒤에도 한문(漢文)저술의 역사만 있는 것이 또한 기괴한 일이다. 이것은 역사를 기록하여 전할 기구(器具)가 적합하지 못했음이다.

 

4) 회재(晦齋)나 퇴계(退溪)에게 원효(元曉)나 의상(義相)의 학술사에서의 위치를 물으면 한 마디 대답도 하지 못할 것이며, 원효와 의상에게 소도(蘇途)나 나을(奈乙)의 신앙적 가치를 말하면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와 비례하여, 이조(李朝)의 인사들은 고려시대 생활의 취미를 모르고, 고려나 삼국의 인사들은 또 삼한 이전 생활의 취미를 모를 만큼 의식(衣食), (居處), 신앙(信仰), 교육 등 일반사회의 형식과 정신이 모두 격변함으로써 오늘은 아메리카 사람이다가 내일은 러시아 사람이 되는 것과 같은 현격함이 있으니, 이는 역사 사상(思想)의 맥락이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연구할 동기가 생기겠는가. 위에서 말한 여러 원인으로 사학(史學)이 발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3백년 간 사색(四色)당쟁이 국가에 거대한 해를 끼쳤다고 하나, 당론이 극렬할수록 각자 자기편은 옳고 상대편은 틀렸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자기편의 기술(記述)이 성행하였으며, 당(黨)의 시비(是非)가 언제나 국정(國政)과 관계되므로, 따라서 조정의 잘잘못(得失)을 논술하게 되어 부지중에 역사의 사사로운 저술 금지가 타파되었는데, 마침내 한백겸(韓伯謙), 안정복(安鼎福), 이종휘(李鐘徽), 한치윤(韓致奫) 등 사학계에 몇몇 인물들이 나오게 된 것도 다 이런 결과다. 혹자는 "사색(四色) 당쟁 이후의 역사는 피차(被此)의 기록이 서로 모순되어 그 시비(是非)를 분석할 수 없으므로 역사 연구에 가장 큰 난관이 된다." 고 하나. 그러나 저들의 시비가 무엇이냐 하면, 모당(某黨)이 이조의 충신이니 역적이니, 모 선생이 주자학의 정통(正統)이니 위통(爲統)이니 하는 문제들 뿐이니,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보면, 칼날을 휘둘러 군왕의 시체를 두 동강 낸 연개소문(淵蓋蘇文)을 쾌남이라 할 것이며, 자기 견해를 주장하여 명륜당(明倫堂) 기둥에 공자를 비난하는 글제를 붙인 윤백호(尹白湖)를 걸물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냉정한 머리로써 회재(晦齋), 화담(徐花潭), 퇴계, 율곡(栗谷)의 학술상의 공헌이 많은지 적은지에 대해서나 알고자 하고 주자학의 정통인지 아닌지는 다만 농담거리로 여길 뿐이며, 노론(老論), 소론(小論), 남인(南人), 북인(北人)의 다툼이 정치상 미친 영향이 좋았는지 나빴는지에 대해서만 묻고자 하고 그들이 이조의 충복(忠僕)이었는지 아닌지는 잠꼬대 같은 소리로 치부하고 말 것이다.

 

심지어 개인행동의 결점을 지적하여 남의 명예를 더럽히고 혹은 애매한 사실로써 남을 모함에 빠뜨려 죽인 수많은 의심스런 사건들은, 반대로 당시 사회의 경쟁과 불화의 악습(惡習)이 백성들과 나라를 어떻게 해쳤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통탄스런 사료가 될 뿐이라. 만일 시어미의 역정과 며느리의 푸닥거리와 같은 종류의 일에 일일이 재판관을 불러와서 그 곡직(曲直)을 판단하려 한다면, 이는 <스펜서>의 말처럼 "이웃집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다는 보고" 와도 같아서, 도리어 이로써 사학계(史學界)의 다른 중대한 문제를 놓쳐버릴 염려가 있으니 내버려 두는 것이 옳다. 그리고 빨리 지리(地理) 관계나, 사상계의 변동이나, 국민 생활과 관련된 것이나, 민족의 성쇠소장(盛衰消長) 등 큰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잘못을 바로잡고 진실을 구하여 조선사학(朝鮮史學)의 표준(標準)을 세우는 것이 급무(急務) 중의 급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