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상고사

2 역사의 삼대 원소(元素)와 조선 구사(舊史)의 결점

운우(雲雨) 2014. 4. 18. 19:50

역사는 역사를 위하여 역사를 쓰는 것이고, 역사 이외에 무슨 다른 목적을 위하여 쓰는 것이 아니다. 자세히 말하자면, 사회의 유동상태(流動狀態)와 거기서 발생한 사실(事實)을 객관적으로 그대로 쓴 것이 역사이지, 저작자(著作者)의 목적에 따라 그 사실을 좌지우지하거나 덧보태거나 혹은 바꾸고 고치라는 것이 아니다. 화가가 사람의 얼굴을 그릴 때, 연개소문(淵蓋蘇文)을 그리려면 얼굴 모습이 크고 준수하게 생긴 연개소문을 그려야 하고, 강감찬(姜邯贊)을 그리려면 몸집이 작고 못생긴 강감찬을 그려야 한다. 만약 한 쪽을 드러내고 한 쪽을 억누르려는 마음으로 조금이라도 서로 바꾸면, 화가의 직분을 어길 뿐만 아니라 본인의 얼굴도 아닌 것으로 되어버린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국의 역사를 쓰면 영국사(英國史)가 되어야 하고, 러시아 역사를 쓰면 러시아사가 되어야 하며, 조선의 역사를 쓰면 조선사(朝鮮史)가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조선에 조선사라 할만한 조선사가 있었는가 하면,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어렵다.

 

안정복이 <동사강목>을 쓰다가 빈번한 내란과 외구(외부로부터 쳐들어온 도적)의 출몰이 동국(東國)의 고대 역사를 다 없애버리고 파괴하였다고 분하게 여기고 슬퍼서 탄식하였으나, 내가 보건대,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구의 병화(兵火)에서보다도 조선사를 저작(著作)하던 그 사람들의 손에서 더 많이 없어지고 파괴되어 버린 것 같다. 어찌하여 그런가 하면, 서두(序頭)에서 한 말과 같이, 역사란 시간적으로 계속되고 공간적으로 발전해 가는 사회활동 상태의 기록이기 때문에 때, 땅, 사람 이 세 가지는 역사를 구성하는 삼대 원소가 된다.

한예를 들자면, 신라가 신라로 되는 것은 박(朴), 석(昔), 김(金)세 성(性)과 돌산고허(突山高墟) 등 육부(六部)의 사람으로서 뿐만 아니라, 또한 경상도라는 그 <땅(地)>과, 고구려 . 백제와 동시대인 그 <때(時)>로써 신라가 되는 것이니, 만일 그보다 더 올라가서 2천년 이전의 왕검(王儉)과 같은 연대이거나 더 내려와서 2천년 이후 오늘날의 우리와 같은 시국(時局)이라면 비록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성지(聖智)와 육부(六部) 사람들의 질박하고 곧은 성품에 계림 지역의 땅을 가지더라도, 당시에 되었던 신라와 꼭 같은 신라가 될 수 없으며, 또 신라의 위치가 그라파에 놓였거나 아프리카에 있었더라도 또한 다른 모습의 나라는 될 수 있었을지언정 신라는 되지 않았을 것이니, 이는 지극히 명백한 이치이거늘, 이전의 조선의 사가(史家)들은 언제나 그 쓰는바 역사를 자기가 목적하는 바를 위하여 희생시켰다.

 

그 결과 도깨비도 뜨지 못한다는 <땅 뜨는 재주>를 부리어, 졸본(卒本)을 떠다가 성천(成川) 혹은 영변(寧邊)에 갖다 놓고, 안시성(安市城)을 떠다가 용강(龍綱) 혹은 안주(安州)에 갖다 놓으며, 아사산(阿斯山)을 떠다가 황해도의 구월산(九月山)을 만들며, 가슬라(迦瑟羅)를 떠다가 강원도의 강릉군(江陵郡)을 만들었다. 이와 같이 신뢰할만한 지적이 없는 허다한 <땅(地)>의 역사를 써서, 더 크지도 말고 더 작지도 말라고 하는 식으로, 압록강 이내에 이상적 강역(疆域):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말하기를, "不大不小"->크지도 작지도 않다)"이라고 하였다.- 원주>을 구획지어 확정하려고 하였다.

 

무극(無極) 일언(一焉) 등 불자(佛子)들이 지은 사책(史冊): <삼국유사>에는 불법(佛法)이 한 자도 들어오지 않은 왕검(王儉)시대부터 인도의 범어(梵語)로 만든 지명과 인명이 가득 차 있고,

김부식 등 유가(儒家)들이 쓴 문자에는 공자, 맹자의 학설인 인의(仁義)를 우습게 아는 삼국의 무사(武士)들의 입에서 경전(經典)의 말들이 일상 쓰는 말처럼 읊어지고 전해지며,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는 수백 년간 전 조선인의 마음을 지배하였던 영랑(永浪), 술랑(述浪), 안랑(安浪), 남랑(南浪) 등 네 대성(大聖)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없고, 중국에 유학하고 돌아온 학생인 최치원(崔致遠)만 시시콜콜하게 서술하였다.

 

<역사제강(歷史提鋼)에는 원효(元曉) . 의상(義想)등 여러 거철(巨哲)들의 불학(佛學)에 영향을 받은 고려 일대의 사상계가 어떠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볼 수 없고, 태조 왕건(王太祖)이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에 죽은 최응(崔凝)이 삼국통일 이후에 올렸다는 간불소(諫佛蔬)만 적혀 있는바, 이와 같은 허다한 "때(時)"의 구속을 받지 않는 역사서를 지어 자기의 편벽한 신앙의 주관적 심리에 부합하려 하였다.

 

심할 경우에는 <사람(人)에 관해서까지 거짓말을 하여 신라의 김왕(金王)을 인도의 "찰제리종(刹帝利種)"->(크샤트리아 인종: <삼국유사>-원주)이라 하였고, 고구려의 추모왕(鄒牟王)을 "고신씨 후(高辛氏 後)"(-> 고신씨의 후예: <삼국사기>- 원주)라 하였으며, 게다가 조선민족 전체를 "진한유민(秦漢遺民)"(-> 진과 한에서 건너온 사람들: <동국통감> <삼국사기> 등 - 원주) 혹은 "韓人之東來者(한인지동래자)"(-> 한인으로서 동쪽으로 온 자: 동사강목(東史綱目)- 원주)라 하기까지 하였다. 이조(李朝) 태종(太宗)에 이르러서는 더욱 이들 맹목파(盲目派)의 선봉이 되어 조선 사상의 근원이 되는 서운관(書雲觀)에 보관되어 있던 문서들을 공자(孔子)의 도(道)에 위배된다고 해서 불태워 버렸다.

이두형(李斗馨) (이조 정조(正祖) 때의 인물? - 원주)이 말하기를, "요즘 어느 행장과 묘지명을 보든지 간에 그 글 속에 나오는 주인공은 반드시 용모는 단정하고 엄숙하며, 그 덕성은 충후(忠厚)하고, 그 학문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본받고, 문장은 한유(중국 당대(唐代)의 문장가 - 옮긴이)와 유종원( 柳宗元): 중국 당대(唐代)의 문장가 - 옮긴이)을 숭상하여 거의 천편일률이니, 이는 그 사람을 속일 뿐만 아니라 그 글도 가치가 없다." 고 하였다.

이는 개인 전기(전기)가 사실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음에 개탄일 뿐이지만, 이제 군왕을 높이고 백성을 천히 여기는 춘추(春秋)의 부월(斧鉞: '春秋의 斧鉞'이란 춘추필법으로 기록한 역사라는 뜻이다. - 옮긴이) 밑에서 자라난 후세 사람들이 그 마음에 익숙한 바로써 삼국의 풍속을 이야기 하고, 문약(文弱)하고 치우치고 작음을 스스로 편안해 하는 이조(李朝) 당대의 인사들이 자기들의 주관(主觀)대로 상고의 지리(地理)를 그림에 있어서, 조선 (朝鮮: 단군 -원주)이나 부여(扶餘)나 삼국(三國)이나 동북국(東北國: 발해)이나 고려나 이조(李朝) - 즉, 5천년 이래의 전 조선을 거의 하나의 도가니로 부어낸 것같이 똑같이 그려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영토(地面)의 확장과 줄어듦에 따라서 민족의 활동이 왕성해지기도 하고 위축되기도 하였던 사실이나, 시대의 고금(古今)을 따라서 국민들의 사상이 변해온 자취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크롬웰은 화가가 자기의 초상화를 그릴 때 그의 왼쪽 눈위에 혹을 빼고 그리려고 하자 이를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나를 그리려면 나의 본래 모습대로 그려라."고 하였다. 이 말은 화가가 그에게 잘 뵈려고 아첨하는 것만 야단친 것이 아니라 곧 자기의 진상(眞像)을 잃어버리게 될까봐 염려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사(朝鮮史)를 쓴 이전의 조선의 사가(史家)들은 언제나 조선의 혹을 떼어버리고 조선사를 쓰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들이 쓴 안경이 너무 블록렌즈였기 때문에 조선의 눈이나 귀나 코나 머리 같은 것을 혹이라 하여 베어 버리고는 어디에선가 무수한 혹들을 가져와서 붙였다. 혹을 붙인 조선사도 이전에는 읽는 이가 너무 없다가, 세계가 하나로 크게 통하면서 외국인들이 왕왕 조선인을 만나서 조선사를 물으면, 어떤 이는 조선인 보다 조선사를 더 많이 알고 있으므로, 창피를 당한 끝에 돌아와서 조선사를 읽는 이도 있다. 그러나 조선인이 읽는 조선사나 외국인이 아는 조선사는 모두 혹이 붙어 있는 조선사이지 옳은 조선사가 아니었다.

 

이왕에 있는 기록들이 이와 같이 다 틀렸으면 무엇에 근거하여 바른 조선사를 쓰겠느냐, 사금(沙金)을 이는 자는 한 말(斗)의 모래를 일면 한 알의 금을 얻거나 혹 얻지 못하거나 하는바, 우리에게 있는 서적(書籍)에서 사료를 구하는 일은 이와 같이 어려운 일이다.

혹자는 조선사를 연구하려면 우선 조선과 만주 등지의 땅 속을 발굴하여 허다한 발견이 있어야 하고, 금석학(金石學), 고전학(古錢學), 지리학, 미술학, 계보학(係譜學) 등의 학자가 쏟아져 나와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도 그러하지만 현재로서는 우선 급한 대로 존재하고 있는 사책(史冊)들을 가지고 그 득실(得失)을 평가하고 진위(眞僞)를 가려내어 조선사의 앞길을 개척하는 것이 급선무(急先務)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