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상고사

4, 사료의 수집과 선택에 관한 참고

운우(雲雨) 2014. 4. 23. 07:29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디에서, 어떻게 우리의 역사를 연구해야 하느냐 하면, 그 대답은 매우 곤란하지만, 나의 경험부터 말해보자 한다. 지금부터 16년 전에 국치(國恥 : 1906년의 을사보호조약)발분(發賁)하여 비로소 <동국통감>을 읽으면서 역사 평론체(史評體)가까운 (讀史新論)을 써서 <대한매일신보> 지상에 발표하였고, 이어서 수십명의 학생들의 요청에 응하여 중국식 연의(演義)를 본받은 역사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대동사천년사(大東四千年史)>란 것을 쓰다가 사고 때문에 두 가지 일을 다 중단하고 말았었다. 그 논평이 독단적이었고 그 행동이 대담한 것이었음을 지금까지도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 이후 어느 정도 열심히 노력한 적도 없지 않으나, 그러나 진척된 것이 촌보(寸步)도 되지 못한 원인을 오늘의 국내 일반 독사계(讀史界)를 향하여 앙소(仰訴)하고자 한다.

 

(一) 옛 비석(古碑)의 참조에 대하여

 

일찍이 <서곽잡록(西郭雜錄)>에 (신립(申砬)이 선춘령(先春領) 밑에 고구려의 옛 비석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사람을 몰래 보내어 두만강을 건너가서 베껴오도록 하였는데, 식별할 수 있는 것은 3백여 자에 불과하였다. 거기에서 황제(皇帝)라 한 것은 고구려 왕이 스스로를 일컫는 말이며, 거기에서 상가(相加)라 한 것은 고구려의 대신을 일컫는 말이다, 라는 한 구절이 있음을 보고 크게 기뻐서, 만주 깊은 산속에 천고(千古), 고사(故史)의 빠진 부분을 보충해줄 만한 깨어진 비석들이 이것 하나뿐이 아닐거라고 생각하고, 해외에 나오던 날부터 고구려와 발해의 옛 강역(疆域)을 답사하리라는 회포가 매우 깊었었다.

그러나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크)에서는 하바로프스크를 왕래하는 선객들로부터 그 해로(海路) 중에서 전설로 내려오는 석혁산악(錫赫山嶽)에 우뚝 선 윤관(尹館: 혹은 연개소문(淵蓋蘇文)-원주)의 기공비(紀功碑)를 보았다는 말을 들었고, 봉천성성(奉天省城)에서는 이통주(伊通州)를 유람하고 왔다는 사람들로부터 그곳 읍 동편 70리에 남아 있는 해부루(解夫蔞)의 송덕비(頌德碑)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들었고, 발해(渤海)고도 (古都)로부터 온 친구로부터 폭 30리나 되는 경박호(鏡泊湖: 고사에서는 홀한해(忽汗海)=원주)의 전면에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와 겨룰만한 만장비폭(萬丈泌爆)이 있어 그것을 구경하였다는 말을 들었으며, (海龍縣)으로 나오는 과객(過客)으로부터는, '죽어서 용이 되어 일본의 세 섬(島)을 함몰시키겠노라." 고 한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유묘(遺廟)를 바라보고 절을 하였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나로서는 귀로 들은 경험만 있었고 내 눈으로 짖접 볼 기회는 없었다. 한번은 친구 넷댓 명과 동행하여 압록강상의 집안현(緝安縣), 곧 제2 환도성(丸都城)을 언뜻 돌아본 것이 나의 일생에서 기념할만한 장관(壯觀)이라 할 수 있으나, 그러나 여비가 모자라서 능묘(陵墓)가 모두 몇 개인지 헤아려 볼 여가도 없어서 다만 능으로 인정할 것이 수백 개이고 묘가 1만개 내외라는 억단(臆斷)을 하였을 뿐이다.

 

촌 사람이 주운, 대나무 잎을 그려 넣은 쇠자(金尺)와, 그곳에 거주하는 일인(日人)이 탁본해서 파는 광개토비문(廣開土碑文)을 가격만 물어보았으며, 잔파(殘破)된(지상에 나와 있는 부분만 -원주) 수백개의 왕릉들 가운데 천행으로 남아있는 8층 석탑 사면 각형(四面角形)의 광개토왕릉과 그 오른쪽에 있는 제천단(祭天壇)을 붓으로 대강 묘사하여 사진을 대신하고, 그 왕릉의 넓이와 높이를 발로 밟아 몸으로써 재어 보는 것으로 측척(測尺)을 대신하였을 뿐이다.(높이는 10장 가량이고, 하층의 주위는 80발이니, 다른 왕릉은 상층이 잔파하여 그 높이는 알 수 없으나 그 하층의 주위는 대개 광개토왕의 능과 동일하였다. -원주.) 왕릉의 상층에 올라가 돌기둥(石柱)이 섰던 자취와, 그 위를 덮었던 기와의 남은 파편과, 드문드문 서 있는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보고 <후한서(後漢書)>에서 "高句麗...金銀財幣盡於厚葬, 積石爲封, 亦種松栢(고구려...금은재패진어후장, 적석위봉, 역종송백)."(-> 고구려는...금은과 재물과 돈을 후장(厚葬) 하는데 다 썼다.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또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심었다.)이라고 한 간단하기 짝이 없는 문구를 비로소 충분히 해석할 수 있게 되었고, "수백 원이 있으면 묘 한 개를 파 볼 수 있고, 수천 원 혹 수만 원만 있으면 능 한 개를 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면 수천 년 전 고구려인들이 생활한 모습에 대한 살아있는 사진을 볼 수 있을텐데..." 하는 꿈만 꾸었다.

 

아, 슬프다.이와 같이 하늘이 감추어둔 비사(秘史)의 보고(寶庫)를 만나서 나의 소득은 무엇이었는가. 인재(人材)와 물력(物力)이 없으면 재료가 있어도 나의 소유가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하루 동안 그 외부에 대한 조잡하고 얕은 관찰밖에 못하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고구려의 종교, 예술, 경제력 등이 어떠하였는지가 눈앞에 훤히 되살아나서 "당지에 가서 집안현(緝安縣)을 한번 본 것이 김부식이 고구려사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 는 단안을 내리게 되었다.

 

후에 항주(杭州)의 도서관에서 우리나러 금석학자 김정희(金正喜: 秋史)가 발견한 유적을 가져다가 중국인이 간행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을 보니, 신라 말 고려 초의 사조(思潮)와 풍속 연구에 참고가 될 것들이 많았으며, 한성(漢城)의 한 친구가 보내준 총독부 발행의 <조선고적도보(朝鮮古籍圖譜)>도 그 조사한 동기의 여하나 주해(註解)에서 견강부회한 몇 부분을 제외하면, 또한 우리 고대사 연구에 도움될 것이 많았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우리 가난한 서생(書生)들의 손으로는 도저히 성취하지 못할 사료임을 자각하였다.

 

(二) 각 서적들의 상호 증명(證明)에 대하여

 

(甲) 일찍이 <고려사> 최영전(崔瑩전)을 보았더니, 최영이 이르기를 "당(唐)이 30만 군사로 고구려를 침입하므로 고구려 승군(僧軍) 3만명을 보내어 이를 대파하였다." 고 하였다. 그러나 <삼국사기> 50권 중에 어느 곳의 기록에서도 이 사실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승군(僧軍)>이 무엇인가 하면,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 중국인인 저자가 사신으로 고구려에 와서 보고 들은 고구려의 풍속을 쓴 책-옮긴이)>에서 말하기를, "재가화상(在家和尙)은 가사(架裟)도 입지 않고, 계율(戒律)도 행하지 않고, 검은 명주로 허리를 동여매고 맨발로 걸으며, 처(妻)를 취하여 자식을 기르며, 기물(器物) 등을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운반하고, 길을 소제하고, 도랑을 파고, 성과 궁실을 수축(修築)하는 등 공사(公事)에 종사하며, 변경에 적이 쳐들어 왔다는 경보가 있으면 스스로 뭉쳐서 싸우러 나가는데, 중간에 거란도 이들에게 패하였다. 사실은 형(刑)을 살고 나온 죄수들인데, 그들이 수염과 머리카락을 깎았으므로 동이족(東夷族) 사람들이 화상(和尙: 중)이라 이름한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이로부터 승군의 면목을 대강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내력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이로부터 나아가 <통전(通典)>, <신당서(新唐書)> 등 각 역사책에서 보면, <조의 선인(先人)이란 관직명이 있고, 고구려사에서 명림답부(明臨答夫)를 연나조의(撚那助依)라 하였고, <후한서(後漢書)>에서는 조의선인(조의先人)을 예속선인(예속先人)이라 하였으니, "선인(先人)" . 선인(仙人)"은 모두 다 국어(國語)의 선인<선인>인데 이를 한자로 음역(音譯)한 것이며, <조의> 혹은 <帛衣>라 한 것은 도경(圖經)이 말한바 <조백(검은 명주)> 으로 허리를 동여매었으므로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니, <선인(仙人)>은 신라 고사(故史)의 국선(國仙)과 같은 종교적 무사단(武士團)의 단장(團長)이며, <승군(僧軍)>은 국선(國仙)의 수하에 속한

단병(團兵)이며, 승군을 <재가화상(在家和尙)>이라 한 것은 후세 사람들이 별명이니, 서긍이 외국의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이들을 보고 그 단체의 행동을 서술 할 때 그 근원을 모르므로 "형을 살고 나온 죄수" 라고 멋대로 추측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로써 <고려사>를 통하여 <삼국사기>에 빠진 <僧軍>을 알게 되고, <고려도경>을 통하여 <고려사>에서 자세하지 않은 <僧軍>의 성격을 알게 되며, <통전>, <신당서>, <후한서>, <신라고사> 등을 통하여 <승군>과 <선인(先人)> 과 <재가화상>이 동일한 단체의 당도(黨徒)임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하면, 당(唐)나라가 30만의 대군으로 침입하였으나 고구려의 종교적 무사단인 선인군(先人軍)에게 대패하였다>는 몇 십 자의 간략한 역사를 6, 7종 서적 수십 권을 섭렵한 결과 비로소 이끌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乙) 당 태종이 고구려에 쳐들어왔다가 안시성에(安市城)서 화살에 맞아 눈을 다쳤다는 전설이 있어서 후세 사람들이 언제나 역사에 올리고, 이색(李穡)의 <정관음(貞觀吟: 정관은 당태종의 연호-원주)에도 "那知玄花(目), 落白羽()(나지현화(목), 낙락백우(시)"(-> 흰 깃(화살)에 현화(눈)가 떨어질줄 어찌 알았으랴.)라고 하여 그것이 실제로 있었던 일임을 증명하였으나, 그러나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중국인의 신 . 구 <당서>에는 보이지 않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만일 사실의 진위(眞僞)를 불문하고 하나는 취하고 하나는 버리다가는 역사상의 위증죄(僞證罪)를 범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만 "당태종의 눈 다친 사실을 중국의 사관이 국치(국치)에 속하는 일이므로 감추기 위하여 <당서>에서 빼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그 해답을 구해보았다.

명나라 사람 진정(陳霆)의 <양산묵담(兩山墨談)>에 의하면, 송태종이 거란(거란)을 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다쳐서 돌아온 후 몇 년 만에 결국 그 화살에 맞은 상처가 덧나서 죽었으나 이를 <송사(宋史)>나 <遼史>에 기록하지 않았는데, 이 사건은 수백 년 후 진정(陳霆)의 고증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이로부터, 중국인들은 그 군주나 신하들이 외족(外族)과의 싸움에서 패하여 상하거나 죽거나 하면 이를 국치(國恥)라 하여 역사에 기록하지 않고 감추고 있다는 실증(實證)을 얻어서 나의 가설(假設)을 세웠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국치를 감추는 버릇이 있다고 해서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화살에 맞아 다쳤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실증은 되지 못하므로 다시 신 . 구 <당서>를 읽어보니, 태종본기(太宗本記)에 "당 태종이 정관 19년 (기원 645) 9월에 안시성에서 회군(回軍)하였다." 고 하였고, 유박전(劉泊傳)에 "그해 12월에 태종의 병세가 위급하므로 유박(劉泊)이 심히 슬퍼하고 두려워하였다." 고 하였고, 본기(本記)에서 정관 20년 (기원 646)에 "황제의 병이 완전히 낫지 못하여 태자에게 정사(政事)를 위임하였다." 고 하였고, 정관 23년 5월에 "황제가 돌아갔다." 고 하였는데, 그 죽은 원인을 <강목(綱目)>에서는 "이질(痍疾)이 다시 심해졌기 때문" 이라고 하였고, <자치통감>에서는 "요동에서부터 악성 종기를 앓았다." 고 하였다.

대개 군왕(君王)과 조상이 욕 본 일을 감추어서 주(周) 천자가 정후(鄭侯)의 활에 맞아 다친 것과 노(魯) 은공(隱公) . 소공(昭公)등이 피살 당하고 쫓겨난 것을 <춘추>에서 쓰지 않은 공자의 벽견(壁見: 편벽된 견해)이 중국 역사가들의 습성이 되어, 당 태종이 이미 빠진 눈을 유리조각으로 가리고 그의 임상(臨床) 보고서를 모두 딴 말로 바꾸었는데, 화살에 맞은 상처가 몸 안의 종기로 바뀌고, 안질(眼疾)이 항문(肛門)에 난 병으로 바뀌어, 전쟁의 부상으로 죽은 자가 이질이나 늑막염을 앓다가 죽은 것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면 <삼국사기>에서는 왜 실제대로 적지 않았는가? 이는 신라가 고구려, 백제 양국을 미워하여 그 명예로운 역사를 다 불살라 버렸기 때문에, 위병(魏兵)을 깨뜨린 사법명(沙法名)과 수군(隨軍)을 물리친 을지문덕은 모두 도리어 중국의 사서(史書)때문에 그 성명(姓名)이나마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니(을지문덕이 <삼국사기>에 보이게 된 것은 김부식이 중국의 사서(史書)에서 인용하였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는 논평에서 "중국의 사서가 아니면 을지문덕을 알 수가 없다." 고 하였다.-원주) 당 태종이 눈을 잃고 달아난 것은 고구려의 전사(戰史)에서 특기할 만한 명예이므로, 신라인들이 그것을 빼버린 것 또한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 태종의 눈 빠진 사실을 처음에는 전설과 <색은집(穡隱集)>에서 겨우 찾아낸 후 신 . 구 <당서>나 <삼국사기>에서 이것을 기록하지 않은 이유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는데, 진정(陳霆)의 <양산묵담(兩山墨談)>에서 같은 종류의 사건을 발견하고, 공자의 <춘추>에서 그 전통의 악습(惡習)을 적발하고, 신 . 구 <당서> . <자치통감> . <강목> 등을 가지고 그 모호하고 은미(隱微)한 문구 속에서,

一) 당 태종의 병록(炳錄: 이질 등) 보고가 사실과 다름을 간파해 내고,

二) 목은(牧隱)의 <정관음(貞觀吟)>(당 태종이 화살에 눈 맞은 사실을 소재로 지은 시 -원주)이 믿을만한 것임을 실증하였고,

三) 신라인들이 고구려가 승리한 역사를 헐어 없앰으로써 당 태종이 전쟁에서 패하고 부상당한 사실이 <삼국사기>에서 빠지게 되었다고 단정하고, 이로부터 간단한 하나의 결론을 얻게되니, 말하자면, <당 태종이 보장왕(寶藏王) 4년에 안시성에서 눈을 상하고 도망쳐 돌아가서 중국의 외과 치료가 불완전하여 거의 30개월을 고생하다가 보장왕 5년에 죽었다.> 라는 수십 자(字)이다.

이 수십 자(字)의 결론을 얻기 위해서도 5, 6종의 서적 수천 권을 반복하여 출입하여, 혹은 무의식 중에서 얻으며, 혹은 고심한 끝에 찾아낸 결과이니, 그 노력과 고생이 또한 적지 않다.

 

승군의 내력을 모른다고 해서 해(害)로울 게 무엇 있으며 단 태종이 부상당한 사실을 안다고 해서 이로울 게 무엇 있다고 이런 사실을 애써 탐색하는가, 하고 묻는 이가 있겠지만, 그러나 사학(史學)이란 것은 개별(個別)사건들을 수집하고 잘못 전해진 것을 바로잡아 과거 인류의 행동을 살아 있듯이 그려내서 후세 사람들에게 물려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승군(僧軍) 곧 선인군(先人軍)의 내력을 모르면 고구려가 당나라 군사 십만 명을 물리친 원동력(原動力)뿐 아니라 이에 앞서 명림답부(明臨答夫)의 혁명군의 중심이 무엇이었는지, 거란(渠丹)을 깨뜨린 강감찬(姜邯贊) 군대의 주력이 무엇이었는지도 다 모르게 되며, 따라서 삼국시대부터 고려까지의 1천여 년간의 군제(軍制) 상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모르게 된다.

 

당태종이 눈의 상처로 죽은 줄 모르면 안시성 전투가 빨리 매듭지어진 원인을 모르게될 뿐 아니라, 신라와 당(당)이 연맹을 맺게된 원인과, 당 고종(고종)의 군신(군신)들이 일체의 희생을 돌아보지 않고 고구려와 흥망을 겨루게된 이유와,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제휴하게된 동기(동기)을 모르게 된다.

 

그러나 위에서 든 것은 그 한두 가지 예일 다름이다. 이밖에도 이 같은 일들이 얼마인지 모를 정도이다. 그러므로 조선사의 황무지를 개척하자면 한두 사람의 몇 년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완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三) 각종 명사(名詞)의 해석에 대하여

 

고대에 페니키아인들이 이집트의 상형문자(象形文字)가져다가 알파벳을 만든 것처럼 우리나라가 한자(漢字)를 가져와서 이두문(吏讀文)을 처음 만들 때에는 그 한자의 음(音)을 취한 것도 있고 혹은 한자의 뜻(義)을 취한 것도 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인명(人名)을 보면, <炤智 一名 毗處(소지 일명 비처)>라 한 것은, <빛의 뜻(義)은 炤智(소지)이고 그 음(音)은 毗處(비처)라는 것이다. <素那 一名 金川(소나 일명 금천)이라 한 것은, <쇠내(= 사금(沙金)이 생산되는 개천) 의 뜻(義)은 金川(금천)이고

 그 음(音)은 素那(소나)라는 것이다. <거칠부 일명 황종(居柒夫 一名 荒宗)이라 한 것은 , 거칠우의 뜻(義)은 "황종(荒宗)이고 그 음(音)은 "居柒夫(거칠부)"라는 것이다. "蓋蘇文 一名 蓋金(개소문 일명 개금)"은 "신"의 음(音)이 "蘇文"(소문)이고 그 뜻(義)은 "금"이라는 것이다. "異斯夫 一名 苔宗(이사부 일명 태종)"은 "잇우"의 음(音) 은 異斯夫(이사부)이고 그 뜻(義)은 "苔宗(태종)"훈몽자회(訓字會) 苔를 <잇>으로 훈(訓)하였음.-원주)이라는 것이다.

 

지명(地名)을 보면, <密城 一云 推火(밀성 일운 추화)>라 한 것은, <밀무>의 음(音)은 密城(밀성)이고 그 뜻(義)은 <推火(추화)>라는 것이다. <熊山 一云 功木達(웅산 일운 공목달)>이라 한 것은, <곰대>의 뜻(義)은 <熊山(웅산)>이고 그 음(義)은 功木達(공목달)이라는 것이다. 繼立嶺 一名 麻木嶺(계립령 일명 마목령)은 <저름>의 음(音)은 <繼立(계립)>이고 그 뜻(義)은 <麻木(마목)>이라는 것이다. <母城 一云 阿莫城(모성 일운 아막성)>이라 한 것은, <어미>의 뜻()은 <모(母)>이고 그 음(音)은 <阿莫(아막>이라는 것이다. 黑壤 一云 今勿奴(흑양 일운 금물노)라 한 것은, 거물라"의 <거물>의 뜻(義)은 <黑(흑)>이고 그 음(音)은 <今勿(금물)>이라는 것이며, <壤(양)>과 <奴(노)>는 다 <라>의 음(音)을 취한 것이다.

 

관직명(官職名)을 보면, <角干(각간)>을 혹 <發翰(발한)>이라 한 것은 <불(=뿔)>의 뜻(義)은 <角(각)>이고 그 음(音)은 <發(발)>이며, <干(간)>과 <翰(한)>은 다 <한>의 음(音)을 취한 것이니, <불한>은 군왕(君王)을 칭한 것이다. <樓薩(누살)을 혹 <道使(도사)>라고도 하는 것은 <라>의 뜻(義)은 <道(도)>이고 그 음(音)은 <樓(누)>이며, <薩(살)>의 뜻(義)은 <使(사)>이고 그 음(音)은 <薩(살)>이라는 것이니, <라살>은 지방장관(地方長官)의 칭호이다. <말한 . 불한 신한>은 三神(삼신)에 그 근원을 둔 것인데, 그 뜻은 <天一(천일) . 지일(地一) . 太一(태일)>이고 그 음(音)은 <馬韓(마한) . 卞韓(변한) . 辰韓(진한)이라는 것이다.<도가 . 개가 . 크가 . 소가 . 말가>는 다섯 대신(大臣)의 칭호인데 <도 . 개 . 크 . 소 . 말>등은 그 뜻(義)을 취하고 <가>는 음(音)을 취하여 <猪加(저가) . 狗加(구가) . 大加(대가) . 牛加(우가) . 馬加(마가)>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자잘하고 상세한 고증이 무슨 역사상의 큰 일이 되느냐? 그러나 이것은 잗다란 일인 듯하나 지지(地志)의 잘못도 이로써 바로 잡을 수 있으며, 사료의 의심스러운 것도 이로써 보완할 수 있으며, 고대의 문학부터 생활상태까지 연구하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해모수(解募漱)와 유화왕후(柳花王后)가 만난 압록강(鴨綠江)은 어디인가? 지금의 압록(鴨綠)이라 하면 당시 부여의 서울인 하얼빈과 너무 멀고, 다른 곳이라고 하면, 다른 곳에는 압록(鴨綠)이 없으므로 그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었는데, 첫 번째 단계에서 광개토경호태왕(廣開土境好太王)의 비(碑)에서 압록강(鴨綠江)을 아리수(阿利水)라 한 것을 보고, 압록(押綠)의 이름이 <阿利> 곧 <阿利>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 두 번째 단계에서, <遙史(요사>의 遼<요>興宗(흥종)이 鴨子河(압자하)를 <혼동강(混同江)>으로 개명(改名)것을 보고, 압자(鴨子)가 곧 <阿利>이므로 혼동강(混同江)- 즉 송화강(松花江) - 이 고대의 북압록강(北鴨綠江)일 것이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세 번째 단계에서, <東史綱目> 고이(考異)에서, <삼국유사>의 <遼河 一名 鴨綠(요하 일명 압록)>과 朱熹(주희)의 <女眞起據鴨綠江(여진기거압록강)>(- 여진족은 압록강을 근거로 하여 일어났다.) 을 인용하여 <세개의 압록(鴨綠)이 있다.>고 한 것을 보고, 송화(松花)가 고대에는 압록이었다는 것을 알았고, 따라서 해모수(解慕漱) 부처(夫妻)가 만났던 압록은 곧 송화강(松花江)이라고 단정하였다.

 

마한전(馬韓傳)에 나오는 <비리(卑離)>를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만주원류고(滿州源流考)> 삼한정류(三韓訂謬)에서는 만주의 <貝勒(패륵: 음 <패리>- 원주>과 같이 관직명이라고 하였으나, 그러나 나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삼한의 <卑離(비리)>는 <삼국사기 지리지>의 백제의 <夫里(부리)> 로서, <卑離(비리)>, <부리(夫里)>는 다 <불>의 음(音)을 취한 것이며, 그 뜻(義)은 <도회지(都會地: 都市)>이다. 마한의 <卑離(비리)>와 백제의 <부리(夫里)>를 참조하면, 마한의 <피비리(避卑離)>는 백제의 <파부리(波夫里)>요. <여래비리(如來卑離)>는 <이릉브리(爾陵夫里)>요. <모로비리(牟盧卑離)>는 <모량부리(毛良夫里)>요. <감해비리(監奚卑離)>는 <고막부리(古幕夫里)>요. <초산도비리(楚山途卑離)>는 <미동부리(未冬夫里)>요. <고랍비리(古臘卑離)>는 <고막부리(古幕夫里)>이니, 비록 매번 이쪽은 음(音)을 취하고 저쪽의 뜻(義)을 취하여 서로 다른 번역이 있게 되었으나, 그것이 서로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선이 관중(管仲)과 싸우던 때에 산서성(山西省)이나 영평부(永平府)에 <비이(卑耳)>라는 계곡이 있었는데, <비이(卑耳)>도 <비리(卑離)> 곧 <불>의 번역이다. 이로부터 조선고대의 <불>이 산해관(山海觀) 이서(以西)까지 걸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자잘하고 상세한 고증(考證)이 역사상 큰 일은 아니지만 도리어 역사상의 큰 사실을 발견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만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훈몽자회(訓蒙字會)> . <처용가(處容歌)> . <훈민정음(訓民正音)> 등에서 고어(古語)를 연구하고 <삼국유사>에 쓰인 향가(響歌)에서 이두문(吏讀文)의 용법을 연구한다면, 역사상 수많은 발견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일찍이 이에 유의(留意)한 적이 있었으나 해외에 나온 뒤부터 한 권의 책조차 사기가 심히 어려운 형편이어서, 10년을 두고 <삼국유사>를 좀 보았으면 하였으나 그 또한 얻을 수가 없었다.

 

(四) 위서(爲書)의 변별(辨別)과 선택에 대하여

 

우리나라는 고대에 진귀한 서적(珍書)들을 불살라 없앤 적(이조 태종의 분서(焚書) 같은 것-원저)은 있었으나 위서(爲書)를 조작한 일은 없었다. 근래에 와서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 등이 처음으로 출현하였는데, 아무도 그것을 변박(辯駁)한 일이 없었음에도 그것을 고서(古書)로 믿고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서적은 각씨(各氏)의 족부 중 그 조상의 일을 혹 위조한 것이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진위(眞爲)의 변별에 그리 신경쓸 것이 없다.

다음으로,우리와 국토가 접해있는 중국, 일본 양국은 옛날부터 교제가 빈번하였으므로 우리역사에 참고가 될 서적이 적지 않다.

그러나 위서(僞書)가 많기로는 중국 같은 나라가 없을 것이다. 위서(僞書)를 변별하지 못하면 인증(引證)해서는 안 될 기록을 우리 역사에 인증하는 착오를 범하게 된다. 그러나 거짓에도 다음과 같이 그 정도가 있다.

 

그 첫째는 위서(僞書)에 기재된 거짓 사실(僞)이다.

예를 들면, <죽서기년(竹書記年)>의 진본(眞本)이 없어지고 위작(僞作)이 나왔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진술하였지만, 옛 사가(史家)들이 늘 고기(古記)의 "檀君, 與堯竝立, 於戊振(단군, 여요병립, 어무진)" (-> 단군은 요(堯) 임금과 같이 무진(戊辰)년에 나라를 세웠다.)이라고 한 글에 근거하여, 단군의 연대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항상 요임금의 연대를 찾는 사람들은 <속강목(續綱目)>(김인산(金仁山) 저 - 원저)을 표준으로 참고하지만, 그러나 주(周) . 소(召) 공화(共和): 주(周) 여왕(廬王) 때인 기원전 841년에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같이 주나라를 다스리던 때 - 원주) 이전의 연대는 중국 사가(史家)들의 큰 할아버지(大祖)라 할 사마천(司馬遷)도 알지 못하여 그 <사기(史記)> 연표에 쓰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그보다 요원한 (堯)의 연대이겠느냐, 그러므로 <속강목(續綱目)>의 연대는 다만 위서인 <죽서기년>에 근거하여 적은 연대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속강목>에 근거하여 고대의 연대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도리어 연대를 흐리게 만드는 것이다.

 

공안국(孔安國)의 <상서전(尙書傳)>에 나오는 "句麗, 扶餘, 肝, 貊(구려, 부여, 간, 맥)" 이란 구절을 인용하여 고구려와 삼한(三韓)이 주(周) 무왕(武王)과 교통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서 "安國, 爲今皇帝博士, 蚤卒)" (->공안국은 지금 황제(武帝) 때 박사가 되었으나 일찍 죽었다.) 이라고 하였는데 , "今皇帝(금황제)는 무제(武帝)이다.무제를 "今皇帝(금황제)" 한 것은 무제가 죽어서 시호( 諡號)받는 것을 사마천이 보지 못하고 먼저 죽었기 때문이고, 공안국(孔安國)을 "조졸(=蚤卒: 조졸)"이라고 한 것은, 사마천이 살아있을 때 공안국이 먼저 죽었기 때문에 이렇게 적은 것이다.

이 공안국은 사마천보다 먼저 죽었고, 사마천은 무제(武帝)보다 먼저 죽었음이 명백한데도 <상서전>에는 무제의 아들인 소제(昭帝)시대에 창설한 금성군(金城郡)의 이름이 나오고 있으니, 공안국이 자신이 죽은 후에 창설된 지명을 예언할 만한 점쟁이라면 모르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상서대전(尙書大傳)>은 위서(僞書)임이 틀림없고, 거기에 기록된 "간, 백, 구려" 등이 거짓임도 자연히 명백한 것이다.

 

그 둘째는 진서(眞書) 중의 거짓 사실(僞)인데, 이것을 또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갑)은 진서(眞書)인 그 책 자체 내에 있는 위증(僞證)으로서, <초학집(初學集)> <유학집(有學集)> 등은 전겸익(錢謙益)이 쓴 실재(實在)하는 글이지만, 그 책들 속에 나오는 우리나라에 관한 일은 대개 전겸익이 위조한 것들이고 실제로 있었던 것이 아닌 것이 많다는 것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역사에 그것을 반박할 확실한 증거들이 있거니와, 만일 우리나라 역사에 그것을 반박할 재료가 없어져 버리고 그가 쓴 역사에서 꾸며낸 거짓 사실(査悉)들만 유전되고 있다면, 다만 가설(假說)로써 부인하는 것만으로는 안 될 것이니, 어떻게 해야겠는가.

전에 장유(長維)가 <사기(史記)>의 "武王...乃封箕子於朝鮮(무왕...내봉기자어조선") (-> 무왕이...이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다.)이란 글을 변별하여 바로 잡으면서, 첫째, 상서(尙書)의 "我罔僞臣僕(아망위신복)" (->나는 신하가 되지 않겠다.)란 구절을 들어, 기자(箕子)가 이미 남의 신복(臣僕)이 되지 않기로 스스로 맹세하였으므로무왕(武王)의 봉작(封爵)을 받을리가 없다는 전제를 세우고, 둘째, 한서(漢書) "箕子避地于朝鮮(기자피지우조선) (->기자가 (무왕)을 피하여 조선으로 갔다.)이란 구절을 들어, 반고(班固)는 <사기>를 쓴 사마천보다 충실하고 정밀한 역사가로서,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기자봉작설(箕子封爵說)을 빼버렸으므로, 봉작(封爵)은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을 내렸으니, 이것이 <인증(人證: 사람으로 증명함)>이다.

 

삼국 이후 고려 말엽 이전(몽고가 쳐들어오기 이전- 원주)에 우리나라의 국력이 강성하여 중국에 대하여 무력으로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에도 중국에 보낸 국서(國書)에비사(卑辭)가 많았다.

그러나 첫째, 다른 나라가 사신을 보내오면 반드시"래조(來朝)"(-찾아와 인사를 하였다.)라고 썼던 것은 중국인들의 병리적 자존성(自尊性)이니, 이는 근세의 청조( 淸朝)가 처음 서양과 통할 때에 영국, 러시아 등여러 나라와 통상(通商)한 사실을 모두 "某國 稱臣奉貢(모국 칭신봉공)" (모국(某國)이 신하라 칭하며 조공을 바쳤다.)이라고 쓴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으니, 그런 기록들을 함부로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둘째, 중국인들이 만든<열조십집(列朝詩集)> <양조평양록(兩朝平壤錄)> 등 시화(詩話)가운데 조선 사람의 시를 가져다가 게재할 때에는 늘 대담하게 한 구(句) 한 련()을 덧칠하거나 고쳤음을 볼 수 있는데, 우리의 역사를 전재할 때에도 자구(字句)를 고쳤을 알 수 있다.

셋째, 몽고의 위력이 우리나라를 뒤흔들어 두려워 떨게 할 때에 우리의 악부(樂府)와 사책(史冊)등을 가져가서 <황도(皇都)> . <제경(帝京)> . <해동천자(海東天子)>등의 자구(字句)를 모두 고친 사실이 <고려사>에 보이는데, 그 고친 기록을 개정하지 못한 <삼국사> <고려사> 등도 중국과 관계된 문자는 실록(實錄)이 아님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은 <사증(事證: 사실로서 증명함)이다.

 

몇 년 전에 나온 김택영(金澤榮)의 <역사집략(歷史輯略)>과 장지연(張志淵)의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에서, (일본의) 신공여주(神功女主) 18년에 신라를 정복한 일과 수인주(垂仁主) 2년에 임나부(任那府)를 설치한 일 등을 모드 <일본서기(日本書記)>에서 따 와서는 자신의 박식함을 자랑하였으나, 그러나 신공(神功) 18년은 신라 나해니사금(奈解尼師今) 4년이고, 나해(奈解) 당년에는 신라 사람으로서 압록강을 구경한 이도 적었을 터인데, 이제 나해(奈解)가 아리나례(아리나례: 압록강- 원주)를 가리키며 거듭 맹세하였다고 하니, 이게 무슨 말이며, 수인(垂仁)은 백제와 교통하기 이전 일본의 황제이므로 백제의 옷들도 수입되지 못하던 때인데, 수인(垂仁) 2년에 임나국(任那國) 사람들에게 붉은 비단 2백 필을 주었다는 말이 정말일 수 있을까?

뒤의 두 가지 의문에 대답하기 전에 그 두 가지 기사는 저절로 부정될 것이니, 이것은 이증(理證): 이치로서 증명함) 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옛 사람들의 위증(僞證)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람(人)으로서,사실(事)로서, 또 이치(理)로서, 증명하여 부합되지 않으면 위록(僞錄: 거짓 기록)알 수 있다.

(乙)은 후세 사람의 위증(僞증)으로서, 진서(眞書)인 그 책 자체에는 본래 위증이 없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문구(文句)를 증가하여 위증한 것이다. 이는 마치 당태종이 고구려를 치려고 하여 그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 <진서(晋書)> <남사(南史)> <북사(北史)> 등에 나오는 조선에 관한 사실을 가져다가 자가(自家)에 유익하도록 꾸미면서, 안사고(顔師古) 등에게 시켜서 곡필(곡필)을 잡고서 덧칠하여 고치고, 덧붙여 늘이고, 바꾸고, 멋대로 주석을 달아서 한사군(한사군)의 연혁(연혁)이 가짜(僞)가 진짜(眞)처럼 되고, 역대 양국의 국서(國書)가 더욱 본문대로 유전된 것이 없게 되었다.(이에 대한 증거는 본편 제 2장 지리연혁(지리연혁)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원주)

 

그 셋째는 위서(僞書)중에 나오는 사실(眞)이다. <관자(管子)>라는 책은 본래 관중(管仲)의 저작은 아니고 중국 육국시대(六國時代)의 저작으로서, 조선과 제(濟)의 전쟁에 대하여는 도리어 그 사실을 전하고 있으니, 비록 위서(僞書)이지만 진서(眞書) 이상의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할 수 있다.

 

(五) 몽고(蒙) . 만주(滿) . 토욕혼(土) 여러 부족의 언어와 풍속의 연구

 

김부식은 김춘추(金春秋) . 최치원(崔致遠) 이래 모화주의(慕華主義)의 결정(結晶)이라 할 수 있으니, 그가 쓴 <삼국사기>에서 고주몽(高朱蒙)은 고신씨(高辛氏)의 후예라고 하였고, 김수로(金首露)는 김천씨(金天氏)의 후예라 하였으며, 진한(辰韓)은 진(秦)나라 사람들이 동쪽으로 건너와서 세운 것이라 하였다.

그가 말(言)이나 피(血)나 뼈(骨)나 종교나 풍속 등 어느 한 가지도 같은데가 없는 중국인들을 우리와 동종(同宗)으로 보아서, 말(馬) 살에 쇠(牛)살을 묻힌 식의 어림없는 붓을 놀린 후로 그 편견(偏見)을 갈파한 이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 부여(扶餘)의 종족 계통(族系)이 분명하지 못하게 되어, 드디어는 조선사의 위치가 어두운 구석에 놓여지게 된 지가 오래 되었다.

 

언젠가 필자가 <사기(史記)>의 흉노전(匈奴傳)을 보니, 세 성씨(姓氏)의 귀족(貴族) 있음이 신라와 같고, 좌 . 우 현왕(賢王) 있음이 고려나 백제와 같고, 5월의 제천(祭天) 있음이 마한(馬韓)과 같고, 날짜 간지에 무(무)와 기(기)가 들어 있는 날을 길일(길일)로 치는것이 고려와 같고, 왕공(왕공)을 <한(汗)이라 하는 것이 삼국의 <간(干)>과 같으며, 관직명 끝에 치(zhi) 라는 음(音)이 있음이 <신지(臣智)>의 지(智 zhi)와 한지(旱支)의 <지(支)와 같으며, 후(后):왕후)를 <알씨(閼氏)라 하는 것이 곧 <아씨>의 한자 번역이 아닌가 하는 가설(假說)을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가축이나 회계하는 곳을 <담림(憺淋: danlim)> 혹은 <접림(蝶林:dielin)>이라 하는 것이 <살림>의 뜻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났으며, <休屠(휴도)는 <蘇屠(소도)와 음(音)이 같을 뿐만 아니라 나라 안에 <대휴도(大休屠)>를 둔 <휴도국(休屠國)이 있고 각처에 또 <<소휴도(小休屠)>가 있어, 더욱 삼한의 소도(蘇途)와 틀림이 없는지라, 이에 조선과 흉노가 3천년 전에는 한 집안 내의 형제였을 것이라는 의문을 가지고 그 해결을 구해 보았다.

 

그 후에 청나라 건륭제(乾隆帝)가 흠정(欽定)한 <만주원류고(滿州原流考)>와 요(遼) . 금(金) . 원(元) <삼사국어해(三四國語解)>를 가지고 비교해 보니, 바록 그 중에 부여의 대신(大臣)칭호인<加(가)를 음(音)으로 해석하여 조선말에 金<가> . 李<가>라는 <가>와 동의(同義)라 하지 않고 뜻(義)으로 해석하여 주(주)를 달면서 <家(가)>를 잘못 쓴 것이(誤)이라고 하였으며, 금사(金史)의 <勃極列(발극렬)>을, 음(音)을 취해서 만들어진 신라의 <弗矩內(불구내)>에 상당한 것이라고 하지 않고, 청조(淸朝)의 <貝勒(패륵: 패리)과 같은 종류라고 ......한 것 등에 틀린 것이 없지 않으나, <朱蒙(주몽)>의 만주어인 <주림물>은 곧 <활을 잘 쏜다>는 뜻이라 하였고, <沃沮(옥저)>는 만주어의 <와지> 곧 <森林(삼림)>의 뜻이라 하였으며, 삼한의 관직명 끝의 자(字)인 <지(支)>는 곧 몽고어에서 마관(馬官)을 <말치>, 양관(羊官)을 <활치>라고 할 때의 <치>와 같은 종류라 하였으며, 三韓(삼한)의 삼한<韓(한)>은 극한(可汗)의 <汗(한)>과 같이 왕(王)의 칭호이고 나라(國)의 칭호가 아니라고 한......다수의 고거(考據: 참고하여 근거로 삼음)할 거리를 얻었다.

또 그 후 동몽고(東蒙古)의 한 중을 만나서 동몽고 말의 동 . 서 . 남 .북을 물으니, <연나 . 준나 . 우진나. 회차>라 하여, 그것이 <고구려사>의 "東部日順那, 西部日涓那, 南部日灌那, 北部日絶那"(-> 동부를 순나(順那), 서부를 연나(涓那), 남부를 관나(灌那), 북부를 절나(絶那)라 한다.)와 같음을 알았다.

또 그 후 일본인 조거용장(鳥居龍藏)이 조사 발표한 것으로서, 조선, 만주, 몽고, 터키 네 민족들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말 중에 같이 쓰는 말들이 수십 종(지금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다만 귀자(貴子)를 <아기>라 하고, 건장(乾裝)을 <메주>라 하는 한두 마디 뿐이다- 원주) 있다고 한 것을 보고, 제 1 단계로 조선, 만주, 몽고, 터키 네 종류 언어는 동어계(同語系)라는 억단(臆斷)을 내리고, 다시 중국 <이십사사(二十四史)>의 선비(鮮卑) . 흉노(匈奴) . 몽고(蒙古) . 등지에 관한 기록을 가져다가 그 종교와 풍속의 같고 다름을 참조하고, 서양사(西洋史)를 가지고 흉노의 유종(遺種)이 터키 헝가리 등지로 이주한 사실을 고열(考閱)하였다.

그리하여 제 2단걔로 조선 . 만주 . 몽고 . 터키 네 민족은 같은 혈족(血族)이라는 억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나의 이 억단이 맞는지 틀린지는 잠시 접어두고, 조선사를 연구하려면 조선의 고어(古語)뿐만 아니라 만주어, 몽고어 등의 말을 연구해야 한다. 이들 말에 대한 연구는 고대의 지명 . 관명의 의의(意義)를 깨닫는 데, 이주(移住)와 교통(交通)의 자취와, 공전(功戰)과 침탈(侵奪)의 유허(遺墟)와, 풍속의 동이(同異) 및 그 차이, 문명과 야만의 정도 및 그것이 다르게 된 원인, 기타 수많은 사적(史籍)을 탐구하는 데, 그리고 잘못된 역사 기록(記錄)의 교정에도 유익하다.

 

이상의 다섯 가지는 재료의 수집과 선택 등 노고(勞苦)에 있어서 나 자신의 경험을 말한 것이다.

아, 슬프다. 조선과 중국, 일본 등 동양문헌에 대한 큰 도서관이 없으면 조선사를 연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본의 학자들은 국내에 아직 충분히 만족할 만한 도서관은 없다고 해도 그러나 동양에서는 제일이고, 또 지금에 와서는 조선의 소유가 거의 모두 그곳에 저장되어 있으며, 또 서적의 구입 및 열람과 각종 사료의 수집이 우리처럼 떠돌아다니며 생활하고 있는 가난한 서생(書生)들 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고, 게다가 신사학(新史學)에 상당한 소양까지 있다고 자랑하면서도, 지금까지 동양학 분야에서 위대한 인물이 나오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저들 중에서 가장 명성이 자자한 자가 백조고길(白鳥庫吉)이라 하지만, 그가 저술한 신라(新羅史)를 보면, 사료를 배열하고 정리하는 데 새로운 방식도 볼 수 없고 한두 가지의 새로운 발명(發明)도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2줄 빠져 있는데, 검열에서 삭제된 듯하다. - 초판의 주)좁아터진 천성(天性)이 조선을 무함(誣陷)하기에만 급급하여 공평(公平)을 결여하였기 때문인가?

조선 사람으로서 어찌 조선 사학이 일본인에 의하여 그 단초(端初)가 열리기를 바라겠는가마는, 조선의 보장(寶藏)들을 남김없이 다 가져가서 어둠 속에 썪히고 있음은 통탄스럽고 애석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