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아라리의 고장 정선을 찾아서

운우(雲雨) 2011. 5. 23. 17:24

내가 정선을 다시 찾은 것은 4년만인 것 같다.

4년 전에 갔을 때는 첫날은 소설의 무대인 임계면 가슬비를 보러 간 것이라 임계를 거쳐

정선으로 오는 도중에 아우라지를 본 것이 전부였다.

정선에서는 하룻밤 묵으며 정선 5일 장을 둘러본 후 정선군청에서 소설에 필요한 자료를 구입한

후 조양강에서 조약돌을 줍고 오후에 정선군청에서 마련해준 창극 아리랑을 관람했었다.

관람이 끝난 후 군청에서 마련해준 패키지 열차를 타고 서울에 무사히 올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 정선여행은 먼저 번과는 좀 다른 여행이었다.

먼저 번 여행이 혼자 하는 여행이었다면 이번에는 석탑문학 회원들과 함께한 여행이었다.

문학기행이란 자신이 쓸 작품을 위하여 하는 여행도 있고 나중 작품을 구상하기 위하여 머리를

식히기 위하여 하는 여행이 있다.

전번 여행이 전자라면 이번 여행은 후자에 속할 것이다.

이번 정선여행은 특별히 뭣을 쓰겠다고 계획을 만들어 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획을 하고 간 것보다 얻은 수확은 훨씬 많았다는 것이다.

“백문이 불요일견” 이라는 말이 있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본 것만 못하다는 말이 아닌가.

그것은 내가 화암동굴에서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예전의 정선이란 오지여서 귀양살이를 하는 땅이었다.

지금도 교통이 원활치 않은 곳이고 보면 내 짐작이 틀리진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열차가 다니는 레일은 깔려 있어도 평일엔 열차가 다니질 않고 정선 장날에만 겨우 1회에

한하여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예전의 정선엔 지금보다는 열차의 운행이 빈번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때는 금광이나 탄광이 활기를 뛰고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세월이 가며 광산들이 폐광을 하며 먹고살 수단이 없어지니 모두가 그곳을 떠나버린 것이다.

자연히 사람의 수가 줄다보니 손님이 없는 열차를 운행해 보니 적자만 쌓이고 그러다 보니 운영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정선에 그곳 사람들이 먹고 살 일이란 것이 한정이 되어 있는 것이다.

아직 폐광이 안 된 광산들과 거기에 조금씩 짓는 농사 아니면 산에서 채취한 나물 종류를 팔아 연명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을테니 말이다.

정선시내를 돌아보는 데 걸리는 시간이 걸어서 채 1시간도 되지 않는다.

그만큼 정선의 발전이 더딤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그러나 어제는 새로운 정선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다.

관광 산업을 활발하게 유치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이번 정선여행에서 처음 만난 것은 백석폭포였다.

길옆에 있는 것이었는데 자연폭포가 아니라 인공으로 물을 산 정상으로 끌어올려 아래로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많은 관광객이 지나다가 그곳에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즐기는 모습이었다.

또 그곳에서 가까운 곳에 별천지 박물관이 있었다.

예전에 초등학교 분교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떠나 학생이 없어 학교를 문을 닫아 폐교가 된 곳이었다.

그런 폐교에 별천지 박물관이란 것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곳엔 50~ 70년대의 주간지나 월간잡지 또는 그 시대 사람들이 가지고 놀던 그림 딱지라든가 교과서

또는 북한 교과서도 있었다.

여하튼 지난 시절의 귀한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는 귀한 박물관이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작은 폐교가 말 그대로 별천지 박물관이 되어서 우리의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게

하고 있었다.

우리가 별천지 박물관을 나오니 시간은 점심시간을 넘고 있었다.

배가 고프니 장만숙 선생이 준비해온 음식을 먹기로 하고 계곡을 찾았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은 옆으로 찻길이 잘 닦아져 있었다.

한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직접 쒀온 도토리묵과 참외, 방울토마토, 오이, 당근을 먹으며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주위에 피어난 야생화들은 천국의 한곳을 지상에 옮겨 놓은 듯 했고 계곡 물소리는 장엄한 자연의

교향곡을 듣는 듯 마음이 벅차올랐다.

계곡에서의 시간을 끝내고 우린 화암 약수 쪽으로 가기로 했다.

그곳엔 피톤치드 삼림욕장과 몰운대가 있었다.

피톤치드 삼림욕장과 몰운대는 산을 타고 8km올라가야 해 시간이 없는 관계로 일단 접기로 하였다.

화암 약수터는 정선군에서 깨끗하게 관리를 하고 있었다.

널찍하게 만들어진 약수터에는 두 군데에 약수를 뜰 수 있게 만들어져 있어서 그곳에 준비되어 있는

바가지로 약수를 떠서 마셔 보았다.

신기했다.

탁 쏘는 탄산수와 같은 맛이었다.

함께 간 박인수 시인이 “여기에 설탕만 넣으면 사이다가 되겠어요.” 한다. 맞는 말이었다.

그 물에 설탕을 넣어 마신다면 틀림없는 사이다가 될 것 같았다.

물통을 사서 한통씩 떠서 차에 실었다.

다음 행선지는 화암동굴이었다.

화암동굴은 앞에서도 언급을 한 것과 같이 금을 캐는 광산이었다.

약 1000m가 넘는 길이의 동굴이었는데 금광 동굴과 자연 종유석 동굴이 함께 있는 동굴이었다.

아마 금광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종유석 동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동굴을 잘 개발하여 갖가지 금과 관련된 자료들을 구경을 하는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있었다.

화암동굴을 보면서 대강 옛날 정선 사람들의 생활상을 떠올릴 수가 있었다.

지금이야 많은 광산들이 폐광이 되어 문을 닫았지만 먹고 살 수 있는 수단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과는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다.

산골에서 특별하게 먹고 살 수단이 없었던 그곳 사람들은 광산에서 일을 하며 고달픈 명줄을 이어

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고달픈 삶이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나오니 시간은 4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일단 그곳에 있는 향토 박물관을 들린 후 식사를 하기로 했다.

1층서부터 2층까지를 견학을 한 후 천포 금광촌을 돌아보았다.

금광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활상을 마네킹으로 만들어 놓아 그대로 재연을 해놓은 곳이었다.

금광촌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생활상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금광촌을 나온 우리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로 했다.

처음엔 곤드레 비빔밥을 먹기로 했지만 왠지 얼큰한 국물이 있는 매운탕이 먹고 싶어 내가 우겨

곤드레 비빔밥을 포기하고 민물 매운탕을 먹기로 통일이 되었다.

대신 곤드레 나물이 나와 곤드레 비빔밥을 먹지 못한 것은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그곳 조양강에서 잡은 민물고기는 깨끗한 물에서만 잡히는 고기였는데 회를 쳐 먹어도 좋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정선이 깨끗하다는 얘기였을 것이다.

하루에 정선을 모두 본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턱도 없이 모자라는 것이 아쉬웠다.

아리리촌으로 온 우리는 부랴부랴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정선 5일 장이 얄리는 곳으로 왔다.

5일 장날이니 정선의 주 산물인 산나물을 사는 일 때문이었다.

정선 5일 장은 이제 막 파장을 맞고 있었다. 파장이니 물건은 쌀 수밖에 없었다.

곤드레서부터 여러 가지 나물이 있었지만 우리들 눈에 익숙한 취나물 2k를 박인수 시인이 사서 조금씩

나누어 준다.

마나님이 올 때 사오라고 엄명을 내렸다는 것이다.

차에 산 물건을 실으니 정선의 하늘에도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다.

이제 우리들의 정선 기행도 접어야할 때가 된 것이다.

우리는 어둠이 내리고 있는 정선을 뒤로한 채 서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