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상고사

제 2장 고구려 대(對) 선비(鮮卑)의 전쟁

운우(雲雨) 2019. 9. 7. 17:53

제 2장 고구려 대(對) 선비(鮮卑)의 전쟁

1, 선비 모용씨(慕容氏)의 강성

선비(鮮卑)는 고구려에 복속하여, 비록 영웅적인 면모와 용맹함을 갖춘 추장 단석괴(檀石塊)가 있을 때에도, 명림답부(明臨答夫)의 절제(節制)를 받아왔다.

그러나 고구려가 발기(發岐)의 난을 겪으면서 요동을 잃어버리고 나라의 힘이 이미 쇠약해지자, 선비는 드디어 고구려를 배반하고 떨어져 나가서 한(漢)에 붙었다.

한말(漢末)에 원소(袁紹)와 조조(曹操)가 서로 대치할 때에 선비와 오환(烏桓)은 다 원소에게 붙었는데, 원소가 망하자 기원 207년에 조조가 7월의 장마 때를 이용하여 노룡새(盧龍塞) 5백 리를 몰래 나가서 선비와 오환이 전혀 무방비 상태로 있을 때 그 소굴을 격파함으로써 오환은 드디어 쇠망하였다.

그러나 선비는 그 뒤에 가비능(軻比能)이란 자가 나와서 다시 강성해져서 자주 한(漢)의 유주(幽州)와 병주(幷州)를 침략하였다. 이에 한(漢)의 유주자사 왕웅(王雄)이 자객을 보내어 가비능을 암살하니, 선비는 다시 쇠약해졌다.

기원 250년경에 선비는 우문씨(宇文氏). 모용씨(慕容氏) . 단씨(段氏) .탁발씨(托跋氏)의 4부(部)로 나뉘어 서로 자웅을 다투었는데, 모용씨 중에 모용외(慕容廆)란 자가 용맹하고 교활하여 부족이 가장 강성하였으며, 창려(昌黎)태극성(太棘城; 지금의 동몽고(東蒙古)땅 특묵우익(特黙右翼)부근;원주)을 근거지로 하여 사면으로 쳐들어가서 약탈하였다.

이때에 중국의 위(魏). 오(吳). 촉(蜀) 삼국이 다 멸망하고 진(晋) 사마씨(司馬氏)가 중국을 통일하였으나 자주 모용의(慕容廆)에게 패하여 요서(遼西)일대가 소란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사가(史家)들은 흔히 모용씨가 근거지로 하고 있었던 창려(昌黎)를 지금의 난주(灤州) 부근이라고 하나, <진서(晋書)> 무제본기(武帝本紀)에 “모용외가 창려(昌黎)를 침략하였다.” 라고 한 것을 보면, 위의 창려(昌黎 : 지금의 난주-원주))는, 진(晋)의 창려(昌黎)가 아닌 것이 명백하고, 나중에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慕容皝)이 도읍한 용성(龍城)과 멀지 않은 땅일 것이다.

2, 북부여의 파괴와 의려왕(依慮王)의 자살

북부여(北扶餘)는 제 3편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조선 열국의 문화의 원천이었던 나라이다. 그러나 신라.고구려 이래로 압록강 이북을 잃고는 드디어 북부여를 조선 역외(域外)의 나라라고 하여 그 역사를 거두어 기록해 놓지 않았으므로 해모수왕(解慕漱王) 이후의 그 치란(治亂)과 성쇠(盛衰)를 알 수 없게 되었는데, 다행히 중의 사가(史家)들이 그들과 정치적으로 관계된 사람들을 몇 마디 기록해 놓았으므로, 그 개략(槪略)을 말할 수 있다.

후한(後漢)의 안제(安帝) 영초 5년, 기원 112년에 “부여왕(失名-원주)이 보병과 기병 7, 8천명을 거느리고 한(漢)의 낙랑을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곧 역사에 나타난 북부여의 대외 용병(用兵)의 시작일 것이다.

연광(延光) 원년, 기원 121년에 “부여완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어 한(漢)의 군사와 힘을 합쳐 고구려 . 마한(百濟).예(濊). 읍루(挹婁) 등을 격파하였다.” 라고 하였으나, 그 다음 해에 한(漢)이 고구려의 차대왕(次大王)에게 강화를 애걸하고 그 배상(賠償)으로 비단을 바친 것을 보면, 북부여와 한(漢)이 고구려를 격파 하였다는 것은 거짓 기록일 것이다.

기원 136년에 위구태(尉仇台)가 왕이 되어 2만의 기병으로써 항(漢)의 현토군을 습격하고, 그 뒤에 공손도(公孫度)가 요동왕(遼東王)이 되어서는 부여의 강함을 두려워하여 종실 여자를 부여왕의 처로 바치고 고구려와 선비에 대한 공수동맹(攻守同盟)을 체결하였으니, 위구태왕은 마치 고구려의 차대왕처럼 가장 무력을 숭상하는 군주였으며, 또 그의 재위 기간은 해모수 이후 북부여의 유일한 전성시대였을 것이다.

위구태왕의 뒤에 간위거왕(簡位居王)에 이르러서는, 적자(嫡子)가 없어서 서자(庶子) 마여(麻余)가 즉위하니, 오가(五加) 중에서 우가가 배반할 마음을 품었다.

그러나 우가(牛加)의 형의 아들은 왕실에 충성하고 국사에 부지런하고 나라 사람들에게 재물을 잘 베풀어주어 인심이 그에게 돌아갔는데, 우가(牛加)의 부자(父子)가 배반하자 위거(位居)가 이들을 잡아 죽이고 그 가산을 모두 몰수하였다.

위거(位居)는 마여왕(麻余王)이 죽자 마여의 아들 의려(依廬): 겨우 6살 난 어린 아이였음-원주)를 세워서 보좌하였는데, 위거(位居)가 죽고 의려가 선지 41년 만에 국방이 소홀해졌다. 이러한 사정이 드디어 선비 모용외에게 탐지되자, 모용외는 선비의 무리들을 몰아 북부여의 서울 아사달(阿斯達)을 침입하기에 이르렀다.

모용외가 쳐들어오자 의려왕은 수비가 허약하여 방어하지 못할 줄 알고 칼을 빼어 자살하면서 나라 망하게 한 죄를 나라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유서로써 태자 의라(依螺)에게 왕위를 전하면서 나라 회복에 힘쓰라고 권하였다.

의려왕이 국방에 힘쓰지 못하여 나라를 위망(危亡)에게 빠지게 한 죄는 없지 않으나, 그러나 항복하느니 차라리 죽으리라는 의기(義氣)를 가져서 조선 사상 제 1차 순국(殉國)의 왕이 되어 피로써 후세 사람에게 기념(紀念)을 남겼으니, 어찌 성하지맹(城下之盟 :왕이 성 아래에서 적에게 항복하고 신하 노릇 하기를 맹시하는 것-원주) 옮긴이)을 맺으면서도 구차한 생명을 보전하려는 저 용렬한 왕들에 비할 바이겠느냐.

의려왕이 이미 자살하자 의라(依螺)가 서갈사나(西葛思那)의 삼림 속으로 달아나 결사대를 모집하여 선비 군사들을 쳐서 물리치고 지형이 험한 곳을 지켜서 새 나라를 세웠다.

아사달(阿斯達)은 왕검 이후 수천 년 동안 문화의 고도로써 역대의 진기한 보물뿐만 아니라 문헌(文獻)들이 많아서 신지(神誌)의 역사며, 이두자로 적은 풍월(風月: 詩歌)이며, 왕검의 태자 부루(夫樓)가 하우(夏禹)를 가르쳤다는 금간옥첩(金簡玉牒)에 쓴 문자 등이 있었는데, 모두 선비의 야만 병사들에 의해 불살라지고 말았다.

3, 고구려의 예란(濊亂) 토평(討平)과 명장 달가(達賈)의 참사

선비가 북부여를 침입하기 6년 전인 280년에 고구려에는 예(濊: (본기)의 숙신(肅愼)-원주)이 있었다. 예(濊)는 원래 수렵시대의 야만족으로써 처음에는 북부여에 복속하였는데, 북부여가 조세를 너무 과중하게 징수하므로 배반하여 고구려에 붙었다가, 고구려가 요동을 잃고 나라의 세력이 쇠약해지자 드디어 반란을 일으켜 국경을 침입하여 사상(死傷)한 인민과 빼앗아간 가축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에 서천왕(西川王)이 크게 걱정하여 장수의 재목(材木)을 구하였는데, 이때 여러 신하들이 왕의 동생 달가(達賈)를 추천하였다. 달가가 기계(奇計)로써 예(濊)의 소글을 습격하여 그 추장 6, 7백 명을 포로로 잡아 와서 부여의 남쪽에 있는 오천(烏川)으로 옮기고, 그들의 부락을 항복시켰다.

이에 서천왕이 달가를 안국군(安國君)에 봉하였다.

서천왕이 죽고 그의 아들 봉상왕(烽上王)이 즉위하였는데, 그는 천성이 의심과 시기심이 많아서, 달가가 항렬(行列)로는 자기 숙부(叔父)이고 그 위명(威名)은 전국에 떨치므로 조;l를 얽어 사형에 처하니, 나라 안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안국군이 아니었으면 우리들은 이미 오래 전에 예(濊). 맥(貊)의 난리에 죽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4, 모용외(募容嵬)의 패퇴와 봉상왕(烽上王)의 교만과 포학

모용외(募容嵬)는 일세의 효웅(梟雄)인지라, 진(晋)의 정치가 부패하여 중국이 장차 크게 어지러워질 것으로 보고 전 중국을 집어 삼킬 야심을 가졌으나, 만일 동으로 고구려를 꺾어 놓지 못하면 뒤를 돌아다보아야 할 걱정이 적지 않을 줄 그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북부여를 잔파(殘破)한 뒤에 그 승세를 타고 곧 고구려를 침입하려고 하였으나, 다만 안국군(安國君: 達賈)의 위명(威名)을 꺼려서 주저하고 있었는데, 달가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크게 기뻐하여 기원 292년에 경병(經兵)으로 고구려의 신성(新城)을 침범하였다.

이때 봉상왕(烽上王)이 신성으로 순행(巡幸))을 왔다가, 모용외가 이 사실을 알고 탐지하여 그를 포위하여 매우 위급한 처지에 놓이게 되자 신성의 성주 북부소형(北部小兄) 고노자(高奴子)가 기병 오백으로 모용외의 병사들을 돌격하여 그들을 대파하고 왕을 구하였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고노자의 직위를 높여 북부대형(北部大兄)으로 삼았다.

3년 후에 모용외가 또 침입하여 졸본(卒本)으로 들어가 서천왕(西川王)의 묘를 파는 것을 구원병이 달려와서 격퇴하였는데, 왕이 모용외가 자주 쳐들어오는 것을 걱정하니, <신가> 창조리(倉租利)가 말하기를 “”북부대형(北部大兄)신성 성주 고노자(高奴子)는 지략과 용맹을 겸비한 장수입니다. 대왕께서는 고노자를 두고서 어찌 선비를 걱정하십니까.“ 하고, 드디어 왕에게 권하여 고노자로 신성태수(新城太守)를 삼았다. 고노자가 백성들을 사랑하고 병사들을 훈련하여 여러 차례 모용외의 침입군을 격파하니, 마침내 국경이 안정되었다.

이리하여 모요외의 병사들이 더 이상 쳐들어오지 못하자 봉상왕이 이에 교만해지고 안일에 빠져 수년간의 흉년과 가뭄으로 인민들이 굶주리고 지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 안의 인부들을 징발하여 궁실을 건축하니, 사람들이 더욱 흩어지고 달아나서 인구가 줄었다.

기원 3백년에 이르러서는, 왕은 여러 신하들의 간쟁(諫爭)을 다 거절하고, 나라 안의 남녀로서 15세 이상 된 자는 전부 징발하여 궁실건축에 부역(赴役)하게 하였다.

이에 <신가> 창조리(倉租利)가 위험을 무릅쓰고 간하여 말하였다. “천재가 잦아서 수확을 하지 못하여 나라 안의 인민들이, 장정들은 구걸하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지고, 노약자들은 도랑이나 산골짜기에 빠져죽고 있는데도 대왕께서는 이를 돌아보지 않고 굶주린 인민들을 몰아다가 토목공사의 일을 시키니, 이는 임금으로서 할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하물며 북방에는 모용씨의 강적이 있어 날마다 우리의 틈을 엿보고 있으니, 대왕은 깊이 생각하소서.

임금이 백성을 아끼지 않으면 이는 인(仁)이 아니며, 신하가 임금을 간(諫)하지 않으면 이는 충(忠)이 아니니, 신(臣)이 이미 <신가>의 자리에 있으므로 말할 바를 숨길 수 없어서 이에 아뢰나이다.“

왕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임금은 백성들이 쳐다보는 바라. 임금의 궁실이 장려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무엇을 쳐다보겠는가. <신가>는 백성을 위하여 명예(名譽)를 구하지 말라. <신가>가 만일 백성을 위하여 죽으려는 생각이 없다면, 더 이상 말을 하지 말라.”

이에 창조리(倉租利)는 봉상왕이 고치지 않을 줄 깨닫고 동지들과 밀모(密謀)하여 왕을 폐하려 하였다

5, 봉상왕의 폐출과 미천왕(美川王)의 즉위

봉상왕이 처음에 그 숙부 달가(達賈)를 죽이고, 또 그 아우 돌고(咄固)를 의심하여 사형에 처하였더니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이 화(禍)가 자신에게 미칠 줄 알고 달아났다. 그 후에 봉상왕이 누차 을불을 찾아 죽이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을불이 도망한 뒤에 성명(姓名)을 바꾸고 몸을 팔아 수실촌(水室村) 사람음모(陰牟)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였는데, 음모가 일을 매우 고되게 시켜서, 낮에는 나무를 하게 하고, 밤에는 그 집 문 앞에 있는 늪에 밤새 돌팔매질을 시켜서 개구리 울음소리가 나지 못하게 하여 그 집 식구들이 잠을 편히 잘 수 있도록 하게 하니, 을불이 견디다 못하여 일 년 만에 도망가서 동촌(東村) 사람 재모(再牟)와 함께 소금 장사를 하였다.

소금을 사서는 배편으로 압록강으로 들여와 소금 짐을 강동(江東) 사수촌(思收村)의 인가(人家)에 부려놓았더니, 그 집 노파가 공짜로 소금을 달라고 하므로 한 말 가량이나 주었다. 그러나 그 노파가 마음에 차지 않아 하면서 더 달라고 보채는 것을 주지 않았더니, 노파가 도리어 꽁한 마음을 먹고 음해(陰害)하려 하여, 소금 짐 속에다 가만히 신 한 켤레를 묻어 놓고, 을불이 떠나온 뒤에 쫓아와서는 소금을 뒤져 신을 찾아내고 을불 등 두 사람을 절도로 몰아 압록 성주에게 고소하였다. 압록 성주는 을불에게 태형(笞刑)을 치고 소금은 빼앗아 노파에게 주라고 판결하였다.

을불이 이에 소금자수는 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다 집어치우고, 머슴살이 할 곳도 얻지 못하여,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아다니며 걸식하며 날을 보냈더니, 옷은 나불나불 다 떨어지고, 얼굴은 보기에도 무섭게 여위어서, 어느 누구도 그가 혹시 왕년의 왕손(王孫)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조차 갖지 못하였다.

이때에 <신가> 창조리(倉租利) 등이 봉상왕(烽上王)을 폐하려 하면서, 임금 될 재목으로나 차례로나 모두 을불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여, 북부(北部) <살이>조불(祖拂)과 동부(東部) <살이> 소우(蕭友) 등으로 하여금 을불을 찾아내도록 하였는데, 비류수(沸流水)에 이르러 드디어 을불을 만났다. 소우가 을불의 어릴 때 얼굴모습을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절을 하며 가만히 그 뜻을 전하여 말하였다. “지금의 왕이 무도하므로, <신가> 이하 여러 대신들이 협의하여 지금의 왕을 폐하려고 그동안 왕손을 찾았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을불이 의심하여 말하기를 ”나는 평민이지 왕손이 아니오. 청컨대 다른 데 가서 알아보시오.“ 라고 하였다는 기사가 더 있다.-옮긴이)

그리고 조불도 말하였다. “지금의 왕은 인심을 잃어 나라가 위태로우므로, 여러 신하들이 왕손은 품행이 단정하시고 성격이 인자하시어 조상의 대업을 이을만 하다.”고 하여 왕손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간절하니, 왕손은 의심하지 말기를 바랍니다.“하고 받들어 모시고 돌아와서, 창조리의 동지 조맥남(鳥陌南)의 집에 숨겨 두었다.

가을 9월에 창조리가 봉상왕이 후산(後山)에서 사냥을 하는데 따라 갔다가, 갓에다 갈대 잎을 따서 꽂고는 큰소리로 외쳐 말하기를, “나를 따르려 하는 자는 나처럼 갈대 잎을 갓에 꽂으라!” 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다 창조리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갈대 잎을 따서 갓에 꽂았다.

창조리가 이때 많은 사람들과 함께 봉상왕을 폐하여 별실에 가두니, 왕이 죽음을 면하지 못할 줄 깨닫고 그 아들 형제와 함께 목을 매어 자살 하였다. 을불이 왕위에 오르니, 역사에 미천왕(美川王)이라 칭하는 이가 곧 이 사람이다.

6, 미천왕(美川王)의 요동(遼東) 전승과 선비(鮮卑) 몰아냄

기원 197년, 곧 발기(發岐)의 반란 이후부터 기원 370년경, 곧 고국원왕(故國原王) 말년까지는 곧 고구려의 중쇠시대(中衰時代)이지만, 그러나 미천왕(美川王)의 한 대(代)는 이 중쇠시대 중에서 가장 특성(特盛)한 시대이다.

저자가 일찍이 환인현(桓仁縣)에서 머물러 있을 때, 그곳의 문사(文士)인 왕자평(王子平: 본래 만주인이다.-원주)이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고구려 고대에 <우글로>란 대왕이 있어서, 그가 한미(寒微)하던 시절에 불우하여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며 걸식(乞食)을 하였는데, 그때에 가죽으로 신을 만들어 신었으므로 지금도 만주에서는 가죽신을 <우글로>(<우글로>는 만주 노동자의 신발이다.-원주) 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 대왕의 이름을 따라 지은 것이다.

그 대왕이 그렇게 걸식을 하고 다닐 정도로 빈궁하고 곤고(困苦)하였지만, 그는 항상 요동을 차지할 꿈을 가져서, 요동 각지를 다니며 걸식을 하면서도 산천의 험하고 평탄함과 도로의 멀고 가까움을 알기 위하여 풀씨를 가지고 다니면서 이것을 길가에 뿌려 그가 지나온 길을 기억하였다. 그리하여 지금도 요동 각지의 길가에는 <우글로>라는 풀이 많다.“

<우글로>가 <을불(乙弗)과 음(音)이 같고, 또 고구려 제왕 중에 초년에 걸식을 한 이는 을불 뿐이니, <우글로>는 아마도 미천왕(美川王)을불(乙弗)이 한미하던 시절에 만든 것일 것이다.

미천왕은 기원 300년부터 331년까지 무릇 31년 동안 재위에 있었던 제왕으로, 그 31년간의 역사는 곧 선비 모용씨(慕容氏)와 혈전한 역사이다. 이제 간단하고 엉성한 고구려 본기와, 허황하고 과장이 심한 진서(晋書)를 합하여, 그 진실에 가까운 사실들을 뽑아 미천왕의 역사를 서술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을 뿐이다.

(가) 현토(玄免) 회복-왕자 수성(遂成): 차대왕)이 회복한 요동이 연우왕(延優王) 때에 또 한(漢)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거니와, 미천왕이 즉위해서는 그 제2년에 곧 현토성을 피하여 8천여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기고, 16년에 마침내 현토성을 점령하였다.

(나) 낙랑(樂浪) 회복- 낙랑 역시 한 무제의 4군(郡)의 하나로서 대대로 그 자리 옮김이 빈번하였지만, 대개 이는 요동 땅에 가설(假說)한 것이고 평양의 낙랑(國)과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다. 동천왕(東川王) 본기에 의하면, 위(魏)의 군사들이 달아나서 낙랑으로 물러날 때에 동천왕은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동천왕이 평양으로 천도(遷都)한 이후에도 위(魏). 진(晋).의 낙랑태수는 여전히 존재하였다. 따라서, 만일 중국의 낙랑이 곧 조선의 평양(平壤: 남낙랑(南樂浪)-원주)이라고 한다면, 이는 평양이 고구려의 왕도(王都)인 동시에 또 중국 낙랑군의 치소(治所 : 군청소재지)가 되는 것이니, 천하에 어찌 이같이 모순(矛盾)되고 당착(撞着)되는 역사적 사실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미천왕이 낙랑을 점령한 것은 그의 재위 14년 . 곧 기원 314년의 일이다. 진(晋)나라 사람 장통(張統)이 낙랑. 대방(帶方) 두 군(郡: 대방(帶方) 역시 요동에 가설한 군(郡)으로 장단(長湍)혹은 봉산(鳳山)의 <대방국(帶方國)>이 아니다.-원주)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으므로 왕이 이를 공격하여 쳐부순 것인데, 장통이 항거할 힘이 없어서 모용외(慕容廆)의 부장(部將)인 낙랑왕 묘용준(慕容遵)에게 구원을 애걸하였다.

그러나 모용준이 달려가서 구원하려다가 고구려군에게 패하고는 장통을 꾀어서 민간인 1천여 가구를 몰아가지고 모용외에게 투항하도록 하였다. 이에 모용외는 유성(柳城: 지금의 금주(錦州) 등지-원주)에 또 낙랑군을 가설(假說)하여 장통을 태수(太守)로 삼았으며, 요동의 낙랑은 고구려의 소유로 되었다.

(다) 요동 전첩(戰捷)-요동군의 치소(治所)는 양평(지금의 요양(遼陽)-원주)이다.) <진서(晋書)에 따르면 “미천왕이 요동을 공격하다가 자주 패하여 물러나고는 도리어 동맹 맺기를 구걸하였다.”고 하였으나 <양서(梁書)에서는 “乙弗, 頻寇遼東, 廆不能制,)”(-> 을불(乙弗)이 빈번하게 요동으로 쳐들어갔는데, 모용외는 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라고 하여, 모용외가 늘 미천왕에게 패하였던 것으로 기록하였다. 이처럼 두 사서의 내용이 서로 모순된다.그러나 ,진서(晋書)>는 당 태종(太宗)이 지은 것이다. 당 태종은 요동(遼東)을 어떻게 해서든지 중국의 소유라고 거짓 증명함으로써 자국의 신민(臣民)들에게 고구려 소유의 요동에 대한 전쟁열(戰爭熱)을 불러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전대(前代)의 사서(史書)인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 등의 책에 기록되어 있는 조선열국(朝鮮列國) 그 중에서도 특히 고구려와 관련된 문자(文字)들을 많이 뜯어 고쳤다. 그런데도 유독 자신이 직접 쓴 <진서>만은 사실대로 썼겠는가?

그러므로 <양서>에 기록된 내용이 더욱 진실하며, 현토와 낙랑이 이미 차례차례 정복되었으므로 겨우 몇 개 현(縣)만 남은 요동도 고구려에게 귀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충분한 증거가 없으므로 이만 쓰도록 한다.

(라) 극성(棘城) 전쟁-기원 320년에 미천왕이 선비의 우문씨(宇文氏)와 단씨(段氏)와 진(晋)의 평주자사(平州刺史) 최비(崔毖)와 연합하여 모용외의 서울 극성(棘城)을 쳤더니, 모용외가 네 나라 사이의 이간하였으므로, 미천왕과 단씨는 군사를 이끌고 돌아오고 우문씨와 최비가 남아서 모용외와 싸우다가 대패하여, 최비는 고구려에 투항하고, 고구려 장수 여노(如孥)가 하성(河城)에서 버티고 싸우다가 모용외의 장수 장통(張統)에게 패하였다고 하니, 이는 진서(晋書)에서 전한 내용이다.

7, 제3 환도- 지금의 집안현 홍석정자산(紅石頂子山)의 함락

원왕

기원 331년 미천왕이 죽고 고국원왕(故國原王)소가 왕위를 이어 받아 즉위하였는데, 3년 후에 모용외도 죽고 그 세자(世子)황이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 고국원왕은 그 야심은 미천왕보다 더 컸으나 그 재략(才略)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모용황은 그 야심과 재략이 그 아비 모용외보다 뛰어난 효웅(梟雄)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서형(庶兄)모용한과 그의 두 아들 모용준. 모용각 등이 다 절세의 기재(奇才)들이었다.

고국원왕은 서울 평양이 서북 경영에 불편하다고 하여 지금의 집안현(輯安縣)홍석정자산(紅石頂子山) 위에 새로 환도성(丸都城)을 쌓아 도읍을 옮기니, 이것이 ,제3환도(第三丸都)이다. 태조 때에 왕자 수성(邃成)이 쌓은 <제1환도>는 아직 적국의 땅으로 되어 있고, 동천왕이 쌓은 <제2환도>도 너무 적국에 바짝 붙어 있으므로, 나아가 싸우기에도 편하고 물러나 지키기에도 용이한 지방을 가려서 서울로 삼으려고 <제3환도성(第3丸都城)>을 쌓았던 것이다.

모용황은, 고국원왕이 환도성으로 천도하였다는 말을 듣고, 고구려가 장차 북벌(北伐)을 하려는 것인 줄 알고 먼저 고구려에 침입하여 타격을 주려고 하는 동시에, 밖으로는 고구려를 피하여 멀리 도망가는 모습을 가장하여 고구려가 방비에 소홀하도록 만들려고 극성(棘城)-모용외 이래 저들의 고도(古都)-을 버리고 그곳에서 서북으로 더 나아가 용성(龍城)으로 천도하였다.

그리고는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물었다.

“고구려와 우문씨(宇文氏) 두 나라 중 어느 것을 먼저 치는 것이 옳겠느냐.”

모용한(慕容翰)이 대답하였다.

“우문(宇文)은 비록 강성하나 사실은(保守) 지키려는 뜻을 가졌을 뿐이지만, 고구려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일 우문을 친다면 고구려가 우리의 뒤를 습격할 염려가 없지 않으므로 먼저 고구려를 치는 것이 옳습니다.

고구려를 치려면 두 개의 길이 있는데, 그 하나는 북치(北置)로부터 환도성에 이르는 북쪽 길이고, 또 하나는 남협(南陜)과 목저(木底)로부터 환도성으로 향하는 남쪽 길인데, 북쪽 길은 평탄하고 넓으며, 남쪽 길은 험하고 좁아서, 고구려가 남쪽 길보다는 북쪽 길을 엄히 지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일부 병사들로 북쪽 길로 쳐들어간다고 소문을 내고는 가만히 많은 병사들로 남쪽 길로 습격한다면, 환도를 파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모용황은 모용한의 계책을 채택하였다.

고국원왕이 모용황의 병사들이 북쪽 길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계책을 모른 채, 동생 무(武)를 보내어 5만의 병사로써 북쪽 길을 지키게 하였다. 무(武) 군사들은 기다리고 있다가 모용황의 병사들과 싸워 그 장군 왕부(王富)의 목을 베고 그의 전체 군사 1만 5천을 전멸 시켰다. 그러나 왕은 소수의 병사들로 남쪽 길을 방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용황의 대병을 만나자 대패하여 왕이 단기(單騎)로 도망하니, 환도성은 드디어 적병에게 함락되었다. 그리고 왕태후 주씨(周氏)와 왕후 모씨(某氏)는 적병에게 사로 잡혔다.

모용황이 이미 환도성을 손에 넣고 또다시 왕을 추격하려 하였는데, 그때 모용황의 장군 한수(韓壽)가 말했다.

“고구려왕이 비록 패하였으나 각 성(城)의 구원병이 다 모여들면 충분히 대군(大軍)의 적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고구려 국내에 있는 산들은 대부분 험하므로 추격하는 것은 위험하니, 왕을 위하여 계책을 생각하건대, 고구려왕의 부친의 묘를 파서 해골을 가져오고, 그 모후(母后)와 처(妻: 왕후)를 잡아간다면, 그가 자기 돌아가신 부친과 생모, 처를 찾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굴복할 것입니다. 그런 후에 은혜와 신의(恩信)로 어루만져 주어 그가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면, 장래 우리의 중원(中原)경영에 아무런 장애가 없을 것입니다.”

이에 모용황이 그의 말을 따라 나라 창고(國庫)에 들어가서 역대의 문헌들을 불사르고, 모든 진기한 보물과 재물들을 약탈하고, 성곽과 궁궐과 민가를 모두 헐어버리고, 미천왕의 능(陵)을 파서 그 시체와 왕태후 주씨(周氏)와 왕후를 싣고 돌아갔다.

고국원왕은 비록 적병들은 돌아갔으나 죽은 부친과 생모가 적국에 잡혀 갔으므로 그들을 찾아오기 위하여, 공손한 언사와 후한 예절(禮節)로써 모용씨와 사귀며, 부득이 중국 대륙에 대한 계획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하여 수십 년 동안 고구려는 약국이 되었다.

환도성의 세 차례 이전은 고구려의 전반기 성쇠(盛衰)의 역사를 충분히 설명하는 것이다. 태조 때에 왕자 수성(遂成: 차대왕- 원주)이 요동을 점령하고 제 1차 환도성을 지금의 개평(蓋平) 부근에 처음으로 쌓았던 때가 그 가장 강성했던 시대이고, 발기(發岐)가 배반하여 요동을 들어 공손씨(公孫氏)에게 항복함으로써 산상왕(山上王)이 제2차 환도성을 지금의 환인현(桓仁縣) 부근에 옮겨 쌓았다가 그것까지 위(魏)장수 관구검(毌丘儉)에게 파괴된 때가 그 쇠락한 시기이며, 미천왕(美川王)이 선비를 몰아내고 낙랑. 현토. 요동 등의 군(郡)을 거의 차례대로 회복하여 중흥의 실적을 올리다가 중도에 죽고, 고국원왕(故國原王)이 뒤를 이어 제3차 환도성을 지금의 집안현 부근에 옮겨 쌓았다가 또 모용황에게 파괴 당하니, 이것이 가장 쇠락한 시대이다.

<삼국사기>에서는 비록 이러한 관계를 상세히 기술하지 못하였으나, 본기의 지리(地理)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 대개(大槪) 얻을 수 있다. <삼국지>에도 “伊夷謨, 更作新國)”(->이이모, 경작신국(이이모: 고국천왕의 이름)가 다시 새 나라를 만들었다.)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곧 제2 환도의 신축을 가리킨 것이다.

이상에서 기록한 것은 <조선사략(朝鮮史略)과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초록한 것이지만, 이미 간략히 설명한 바와 같이, <진서(晋書)>는 당 태종이 고구려를 깎아 내리기 위하여 수많은 사실이 아닌 기사(記事)들을 위조한 것이 많은 책이다. 그러므로 위의 기사도 의심스러운 것이 없지 않다.

예를 들면, 모용황이 미천왕의 묘를 파내어 갔다고 하였으나, 그러나 미천왕 때에 고구려의 서울은 평양이었고, 미천왕이 죽은 후 12년 만에 고국원왕(故國原王)이 환도(丸都)로 도읍을 옮겼다. 고구려 역대의 왕릉은 모두 다 당시의 왕도 부근에 있었으므로, 미천왕이 죽은 후에 반드시 평양에 묻혔을 것이고 환도에 묻히지는 않았을 것이니, 환도로 쳐들어온 모용황이 어찌 평양에 묻힌 미천왕릉을 파내어 갈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미천왕릉을 파내어 갔다고 운운한 것은 충분히 의심스러운 일인 동시에, 그 이하에 적혀 있는 바 왕태후와 왕후가 사로잡혀 갔다고 운운한 것도 믿기 어렵다. 다만 이후에 고구려가 30년 동안, 곧 모용씨가 멸망하기 이전에는, 다시 중국 대륙을 도모할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을 보면, 모용씨에게 대패하여 불리한 조약을 맺었던 사실이 있었다는 것은 명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