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상고사

고구려의 중쇠(中衰)와 북부여의 멸망

운우(雲雨) 2017. 4. 30. 18:23

제 5편(二)

고구려의 중쇠(中衰)와 북부여의 멸망

-북부여(北扶餘)는, 제 3편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조선 열국의 문화의 원천이었던 나라이다. 그러나 신라, 고구려 이래로 압록강 이북을 잃고는 드디어 북부여를 조선 역외(域外)의 나라라고 하여 그 역사를 거두어 기록해 놓지 않았으므로 해모수왕(解慕漱王) 이후의 그 치란(治亂)과 성쇠(盛衰)를 알 수 없게 되었는데, 다행히 중국의 사가(史家)들이 그들과 정치적으로 관계된 사실들을 몇 마디 기록해 놓았으므로, 그 개략(槪略)을 말할 수 있다.-

제 1장 고구려의 대(對) 중국과의 전쟁에서의 패배

1, 발기(發岐)의 반란과 제1 환도 - 현 개평(蓋平)의 잔파

기원 197년에 고국천왕이 궂기고(죽고) 그를 이을 후손이 없었다.

이에 왕후 우씨(于氏)가 좌가려(左可慮)의 난(亂) 이후로 정치에 입을 벌리지 못하고 답답하게 궁중에 처박혀 있다가, 왕이 궂기자(죽자) 정치무대에 다시 등장할 열망으로 애통해 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뻐하면서 국왕의 상사(喪事)를 감추고 발표하지 않은 채, 그날 밤 미복(微服)차림으로 비밀리에 왕의 첫째 아우인 발기(發岐)의 집으로 찾아가서 발기를 보고, “대왕은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니 그대가 후계자가 될 자가 아니냐.”고 하면서 그를 꾀이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발기는 순나부(順那部)의 고추가(古鄒加)로서 환도성간(丸都城干: 환도성의 성장)을 겸하여 요동 전체 지역을 관리하고 있었으므로 그 위세와 권력이 혁혁하였을 뿐만 아니라, 만약 고국천왕이 돌아간다면 당당하게 왕위를 이어받을 권리가 자기에게 있었기 때문에, 우씨(于氏)의 말을 새겨듣지 않고 엄정한 어조로 우씨를 질책하여, “왕위(王位)는 천명(天命)이니 부인이 물을 바가 아니며, 부인의 야행(夜行)은 예(禮)가 아니므로 왕후로서는 해서는 안 될 일이다.”고 하였다.

이에 우씨가 크게 부끄럽고 또 분하여 그 길로 곧 왕의 둘째 아우인 연우(延優)를 찾아가서, 왕이 궂긴 사실과 발기를 찾아갔다가 핀잔을 들은 경위를 낱낱이 하소하니, 연우가 크게 기뻐하며 우씨를 맞아들여 밤에 주연(酒宴)을 베풀었다. 연우가 손수 칼을 잡고 고기를 베다가 손가락을 다치자 우씨가 치마끈을 끊어 싸매 주었다. 야연을 마친 후 함께 손목을 잡고 입궁하여 그날 밤 동숙(同宿)하였다.

다음날 고국천왕의 죽음을 발표하는 동시에, 왕의 유언(遺言)을 조작하여 연우를 왕의 후계로 삼고, 당일 왕위에 즉위하였다.

발기(發岐)가 연우가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크게 화를 내며 격문(檄文)을 띄워서 연우가 우씨(于氏)와 밀통하여 차례를 건너뛰어 왕위를 참칭(僭稱)한 죄를 폭로하고, 순나(順那)의 병력을 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그러나 서로 격전을 벌인 지 3일이 지났으나 나라 안 사람들로 발기를 돕는 자가 없었으므로 패하여, 순나 소속의 3만 명을 거느리고 요동 전 땅을 들어 (* <삼국사기>에서는, 이곳에서 “처자들을 데리고” 라고만 하였음.-옮긴이) 한(漢)의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에게 투항하여 구원을 청하였다.

공손도는 한말(漢末)의 효웅(梟雄)이니, 기원 190년에 한(漢)이 장차 어지러워질 조짐을 보고는 요동태수가 되어 요동에서 왕이 되기를 꿈꾸었다. 그러나 이때 요동의 모든 땅은 차대왕(次大王)이 점령한 뒤였으므로 고구려의 소유였고, 한(漢)의 요동은 지금의 난주(灤州)로 옮겨서 토지가 매우 협소하였다. 그래서 공손도는 항상 고구려의 요동을 엿보아 왔는데, 이때 마침 싸우지도 않고 발기의 항복을 받게 되자 크게 기뻐하면서 드디어 정예병 3만을 동원하여 발기의 투항한 군사들을 선봉으로 삼아 고구려로 침입하여, 차대왕의 북벌군의 본영이던 환도성-<제1의 환도)에 들어가 성읍과 부락들을 소탕하고, 비류강으로 향하여 졸본성(卒本城)을 공격하였다.

연우왕(延優王)이 자기 동생 계수(瀱須)를 <신치>전군총사령관(全軍總司令官)으로 삼아 항전하여 한나라 군사들을 대파하고 좌원(坐原)까지 추격하니, 발기가 다급해져서 계수를 돌아보며, “계수야 네가 차마 너의 장형(長兄)을 죽이려느냐. 불의(不義)한 연우를 위하여 너의 장형을 죽이려느냐.”고 하였다.

계수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연우가 비록 불의하다고 하나, 너는 외국에 항복하여 외국의 군사들을 끌어들여 조상과 부모의 강토를 유린하였으니, 연우보다도 네가 불의하지 않으냐.”라고 하니, 발기가 크게 부끄러워하여 후회하고 배천(裵川: 곧 비류강(沸流江-원주)에 이르러 자살하였다.

발기가 일시의 분을 참지 못하여 나라를 팔아먹은 죄를 지었으나, 계수의 한 마디에 양심이 회복되어 자살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가 팔아버린 오혈홀(烏列笏), 곧 요동은 회복하지 못하여 공손도의 소유가 되었다. 이리하여 공손도는 드디어 요동왕(遼東王)이라 자칭하고, 전 요동의 땅을 나누어 요동. 요중(遼中). 요서(遼西) 세 요(三遼 를 만들고, 바다를 건너 동래(東萊)의 여러 군(郡: 지금의 연태(烟台) 등지-원주)들을 점령하여 일시에 강력한 위세를 자랑하였다.

이에 연우왕은 지금의 환인현(桓仁縣) 혼강(渾江) 상류(지금의 안고성-원주)로 환도성을 옮겨 쌓고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니, 이것이 곧 <제2의 환도>이다.

2, 동천왕의 제1 환도성 회복과 오(吳). 위(魏)와의 외교

연우왕이 형수 우씨(于氏)의 손에 의해 왕위를 얻고 우씨로써 왕후를 삼았는데, 얼마 후에 우씨가 늙었음을 싫어하여 주통촌(酒桶村)에서 아름다운 처녀 후녀(后女: 이름(名)임-원주)를 몰래 취하여 소후(小后)로 삼아 동천왕을 낳았다.

기원 227년에 연우왕이 죽고 동천왕이 왕위를 이어 즉위하니, 이때에 중국은 4대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一)은 <위(魏)>의 조씨(曺氏: 조조)이니, 鄴(업: 지금의 북경시 업현(鄴縣)-원주)에 도읍하여 지금의 장강(長江) 이북을 소유하였고.

(二)는 <오(吳)>의 손씨(孫氏: 손권이니, 건업(建業: 지금의 강소성 남경(南京)-원주)에 도읍하여 장강 이남을 소유하였고.

(三)은 <촉(蜀)의 유씨(劉氏: 유비)이니, 成都(지금의 사천성 성도-원주)에 도읍하여 지금의 사천성(泗川省)을 소유하였고.

(四)는 <요동(遼東)>의 공손씨(公孫氏: 요동태수)이니, 양평(襄平 :지금의 요양(遼陽)-원주)에 도읍하여 지금의 난주(灤州) 이동과 요동반도를 소유하였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공손씨와는 적국 사이었고, 촉(蜀)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서 서로 통할 수 없었거니와, 위(魏) 오(吳) 두 나라와도 왕래가 없었다.

기원 223년에 공손연(公孫淵: 公孫度의 손자-원주)이 간사한 계책을 써서 위(魏). 오(吳)두 나라 사이에서 이익을 취하고자 하여, 오(吳) 황제 손권(孫權)에게 사신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리고 스스로 신(臣)이라 칭하며 위(魏)를 같이 공격하자고 청하였다. 손권이 크게 기뻐하여 사신 허미(許彌)등으로 하여금 수천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공손연에게 가도록 하였다.

공손연은 허미를 위(魏)와 통하는 미끼를 삼으려고 하여, 먼저 허미의 신변보호 장사(壯士)인 진단(秦旦)등 60여 명을 잡아 현토군(玄免郡: 지금의 봉천성-원주)에 가두어 놓고 장차 죽이려고 하였다.

진단 등이 성을 넘어 도망하여 고구려로 들어가서 거짓말로 속여서 말하기를, “오(吳)의 황제인 손권(孫權)이 고구려 대왕에게 올리는 공물(貢物)이 적지 않으며, 또 고구려와 맹약을 맺고 공손연을 쳐서 그 토지를 서로 나누어 갖자는 내용을 기록한 문서도 가져왔는데, 불행히도 바다에서 배가 큰 바람을 만나 해로에서 방향을 잃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요동의 해안에 도착하였으나, 그만 공손연의 관리들의 수색과 탐색에 걸려서 공물과 문서들은 다 빼앗기고, 일행은 다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 후 다행히 틈을 얻어 호구(虎口)를 벗어나 여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동천왕이 크게 기뻐하며 진단 등을 불러 만나보고, 그리고 조의(皂衣)25명에게 해로로 진단 등 일행을 호송해 주도록 하였는데, 초피(貂皮) 1천장과 산박쥐의 껍질 10패(貝)손권에게 선물로 주면서 고구려의 육군과 오(吳)의 수군으로 함께 공손연을 쳐 없애기로 하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로부터 3년 후에 손권(孫權)이 사굉(謝宏). 진핑(陳宏)등을 사신으로 보내며 많은 의복과 진귀한 보물들을 공납(貢納)하자, 동천왕이 또 <일치>(주부(主簿)-원주) 작자(笮咨) . 대고(帶固)등을 보내어 약간의 예물로 답례를 하였다.

작자(岝咨)가 오(吳)에 이르러, (一)오(吳)의 수군은 취약하여 해로로 공손연을 습격할 수 없는데도 오(吳)는 다만 헛소리로 자랑하여 고구려로부터 후한 선물을 받으려고 하며, (二)손권이 고구려의 사신을 대할 때에는 비록 공손하지만, 그 내용을 자기 국내에 선포할 때에는 “동이(東夷)를 정복하여 그 사자가 들어와 조공을 바쳤다.”고 하여, 사실이 아닌 말로써 자기 신민들을 속이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돌아와서 왕에게 보고하였다.

동천왕이 그 보고를 듣고는 크게 화를 내어 위(魏)의 황제 조예에게 밀사를 보내어, 고구려와 위(魏)가 대 오(對吳). 대 요동(對遼東) 공수동맹(攻守同盟)을 체결하여, 고구려가 요동을 치는 경우에는 위(魏)가 육군으로써 고구려를 돕고, 위(魏)가 오(吳)를 치는 경우에는 고구려가 예(濊)의 수군으로써 위(魏)를 도와주며, 두 적국을 멸한 뒤에는 요동은 고구려가 차지하고 오(吳)는 위(魏)가 차지하기로 서로 약속하였다.

그 다음에 오(吳)의 사자 호위(胡衛)가 고구려에 오자 그의 머리를 베어 위(魏)에 보냈는데, 이로부터 고(高). 위(魏) 양국의 교제가 매우 빈번해졌다.

3, 공손연(公孫淵)의 멸망과 고(高). 위(魏) 양국의 충돌

기원 237년에 동천왕이 <신가>명림어수(明臨於漱)와 <일치>작자(苲咨) 대고(帶고)등으로 하여금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양수(梁水)로 나아가 공손연을 치게 하였는데, 이때 위(魏)에서도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에게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요수(遼水)로 나가 싸우게 하였다. 공손연은 곽흔(郭昕) 유포(柳蒲) 등을 보내어 고구려를 막고, 비연(卑椼). 양조(楊祚) 등을 보내어 위를 막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위(魏)의 군사들은 패하여 돌아가고, 공손연은 이에 연왕(燕王)이라 칭하여 천자(天子)의 위세를 과시하면서 전력을 다하여 고구려의 침입을 막았다.

다음해에 위(魏)가 태위(太尉) 사마의(司馬懿)를 보내어 10만의 군사로써 공손연을 치게 하였다. 사마의는 먼저 관구검으로 하여금 요수(遼遂)를 쳐서 공손연의 수군 장수 비연. 양조 등과 서로 대치하게 해놓고, 사마의 자신은 군사를 이끌고 몰래 북으로 진군하여 공손연의 서울인 양평(襄平)을 포위하였다.

공손연의 정예병들이 전부 고구려 방어를 위하여 양수(梁水)로 나가서 진을 치고 있었으므로 양평은 텅 비어 있었다. 서울의 포위 소식을 듣고 비연 등이 돌아가서 구하려다가 대패하였고, 공손연은 성안에서 포위된 지 30여일에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여러 겹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 부딪혀 싸워보려다가 그만 붙잡혀서 참수를 당하였다. 공손씨는 요동을 차지한지 3세(世) 50년 만에 망하였다.

대개 위(魏)가 이렇게 공손씨를 용이하게 멸망시킬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가 공손연의 후방을 견제하였기 때문인데도, 이와 관련하여서는 겨우 <삼국지> 동이열전에 “太尉司馬宣王, 率衆, 討公孫淵, 宮遣主簿大加, 張數天人助軍”(태위사마선왕, 솔중, 토공손연, 궁견주부대가, 장수천인조군)“(->太尉 사마선왕이 군사를 끌고 가서 공손연을 치자, 궁(宮: 산상왕(山上王) 연우(延優)의 이름.)이 부부(主簿) 대가(大加)를 파견하여 수천 명의 군사로써 위군(魏軍)을 돕도록 하였다.)이란 기사 하나가 기록되어 있을 뿐, 이밖에 위(魏)명제본기(明帝本紀)나 공손도전(公孫度傳) 등에서는 한 자(字)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중국 사가(史家)들의 고유한 <상내략외(詳內略外)>(->중국의 사실은 상세하게, 외국의 사실은 간략하게 기술함.)의 필법을 지킨 것이지만,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魏太簿司馬宣王, 率衆, 討公孫淵, 王遣主簿大加, 將兵天人助軍(위태부사마선왕, 솔중, 토공손연, 왕견주부대가, 장병천인조군.)”(->위 태부(太傅)사마선왕이 군사를 끌고 가서 공손연을 치자, 왕은 주부대가를 파견하여 군사 1천명으로써 위군(魏軍)을 돕도록 하였다.)이라고 하였다. <사마의(司馬懿)><사마선왕(司馬癬王)>이라고 한 것을 보면, <삼국사기>가 <삼국지> 동이열전의 본문을 그대로 초록하였음이 명백한데, <수천인(數千人)>을 바꾸어 <천인(千人)>이라고 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이상으로 저들과 우리의 역사적 사실에 관한 기록의 시말(始末)을 참작하여 위와 같이 정리한 것이다.

위(魏)가 이미 공손연을 죽이고 요동의 전부를 항복시키고 나서는 고구려와 맺은 맹약을 어기고 한 조각의 땅도 고구려에 돌려주지 않았다. 이에 동천왕이 화가 나서 자주 군사를 일으켜 위(魏)를 토벌하여 서안평(西安平)을 함락시켰다.

<서안평>은, <삼국사기>에서, <금압록강입해구(今鴨綠江入海口)>(->지금의 압록강물이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하였으나, 이는 <한서> 지리지에 근거한 것이고, 공손연이 한창 흥성하였을 때에 고구려와 오(吳).위(魏)의 교통은 언제나 서안평으로부터 시작하여 해로(海路)로 이루어졌으므로, 이때의 서안평은 대개 양수(梁水) 부근이었을 것이다. 고대의 지명은 언제나 천이(遷移: 옮겨지고 바뀜.)가 잦았다.

4, 관구검의 침입과 제2의 환도(지금의 안고성) 함락

기원 245년경에 위(魏)가 동천왕이 자주 침입해 오는 것을 걱정하여,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을 보내어 수만 군사로써 쳐들어 왔으나, 왕이 그들을 비류수(沸流水)에서 맞아 싸워 대파하여 3천여 명을 목을 베어 죽이고, 양맥곡(梁貊谷)까지 추격하여 또 3천여 명을 쳐 죽였다. 이에 왕이 말하기를 “위(魏)의 수많은 군사가 우리의 적은 수의 군사만도 못하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여러 장수들에게 후방에 남아서 싸움 구경이나 하라고 하고는, 왕이 몸소 철기(鐵騎) 5천을 거느리고 진격하였다. 관구검 등이 고구려의 숫자가 적은 것을 보고 죽음을 각오하고 혈전하여 자꾸 전진해 오자 왕의 군사들이 퇴각을 하니, 후방에서 싸움 구경을 하던 군사들이 놀라 무너져서 드디어 참패하였으며, 사상자가 1만 8천 명이나 나왔다.

이에 왕이 1천여 기(騎)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으로 달아나니, 관구검이 드디어 환도성(丸都城)에 들어가서 궁실과 민가들을 모조리 다 불태워 버리고, 역대의 문헌과 전적들을 다 실어 위(魏)나라로 보내고, 장군 왕기로 하여금 계속 왕을 추격하게 하였다.

동천왕이 죽령에 이르렀을 때에는 여러 장수들이 다 달아나 흩어지고 오직 동부(東部) 밀우(密友)가 그를 곁에서 모시고 있었다. 적의 추격병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어서 형세가 매우 위급하게 되자, 밀우가 결사대를 뽑아서 적들과 싸우고, 왕은 그 틈을 타서 도망하여 산속으로 들어가서 흩어진 군졸들을 거두어 모았다.

왕은 험한 지형을 의지하여 지키면서 군중에 명령을 내리기를, “밀우를 살려오는 자에게는 큰 상을 내릴 것이다.”고 하니 남부(南部) 유옥구(劉屋句)가 왕의 명령에 응하여 싸움터로 내려가서 밀우가 기진하여 땅에 엎드려 있는 것을 발견하여 등에 업고 돌아왔다. 왕이 자기 다리의 살을 베어 밀우에게 먹이자, 그가 한참 후에 깨어났다.

왕이 이에 밀우 등과 함께 남갈사(南葛思)로 달아났다. 그러나 적들의 추격은 여전히 그치지 않았으므로, 북부(北部) 유유(紐由)가 말했다. “이같이 국가의 흥망이 달린 판국에 모험을 하지 않고는 위기 상황에서 벗아날 수 없습니다.”

이에 음식물을 갖추어 위군(魏軍)의 진중으로 들어가서 거짓 항복 문서를 바치며 말하기를, “우리 임금께서큰 나라에 죄를 지어, 바닷가에 이르러 다시 더 갈 곳도 없으므로, 이에 항복하기를 청하면서 먼저 많지 않은 토산물로 큰 나라의 군사들을 먹이도록 하였습니다.” 라고 하니, 위(魏) 장수가 접견(接見)하였다. 그때 유유가 식기 속에 감추어 놓았던 칼을 빼서 위 장수를 찔러 죽였다. 이에 왕이 장사(壯士)들에게 명하여 위군(魏軍)을 치게 하니, 위군이 무너져서 어지러워지고 다시 진(陣)을 이루지 못하고 요동의 낙랑으로 패주(敗走)하였다.

위의 전투에 관한 기사는 김부식이 (삼국지>와 <고기(古記)>를 섞어 취하여 고구려본기에 넣었으므로 위아래의 기사가 서로 모순되는 것이 많다.

이를테면, (一) “관구검이 군사 1만 명으로써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으로 맞아 싸웠다.”고 하였으므로, 고구려의 군사 수가 위나라 군사 수의 두 배나 되었는데, 그 아래에서는 동천왕의 말을 기록하여 이르기를 “위(魏)의 수많은 군사가 우리의 적은 수의 군사만도 못하다.” 고 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말인가.

(二) 비류수(沸流水)에서 위병(魏兵) 3천여 명을 죽이고 양맥곡(梁貊谷)에서 또 3천여 명을 죽였으므로, 1만 명의 위나라 군사들은 이미 6천여 명의 전사자를 내었으므로 더 이상 군(軍)을 편성할 수조차 없었을 터인데도, 그 아래에서 “왕이 철기 5천으로 추격하다가 ...대패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말인가.

<삼국지> 관구검전에 전쟁의 결과를 기록하여 이르기를, “논공행상, 후자백여인(論功行賞, 候者百餘人)”(-> 논공행상을 할 때 후(후)로 봉해진 자가 백여 명이나 되었다.)라고 하였은즉, 이로써 출병한 군사의 수와 전투의 규모를 미루어 알 수 있으니, 어찌 구구하게 1만 명의 군사만 출병하였겠는가. 다만 저들의 사서에서는 <詳內略外(상내략외)>의 예를 좇아서 그 기재가 이에 그쳤을 뿐이다.

고구려본기에서는 위의 전투를 동천왕 20년 (기원 245년)이라 하였으니, 동천왕 20년은 위(魏)의 폐제 방(廢帝 芳) 정시(正始) 8년이고, <삼국지> 관구검전에서 정시 중에 현토를 출발하여 고구려를 치고 6년에 다시 고구려를 쳤다. 라고 하였으므로 <해동역사(海東譯史)>에서 정시 5년. 6년의 2회 전쟁으로 나누어 기록하였는데, 정시 5년.6년은 동천왕 18년.19년이다. 그러나 <삼국지>본기에서는 정시 7년에 “유주자사관구검, 토고구려 (幽州刺史毌丘劍, 討高句麗)“(->유주자사 관구검(毌丘劍)이 고구려를 쳤다.)라고 하여, 고구려 본기와 서로 부합한다. 어떤 것을 따라야 하겠는가.

최근 기원 1905년에 청(淸)의 집안현지사(輯安縣知事) 모씨(某氏)가 판석령(板石領)의 고개 위에서 발견한 관구검의 기공비(紀功卑) 파편에 “六年 五月(육년 오월)” 이란 글이 그 둘째 줄에 있었는데, 만일 이것이 진적(眞跡: 실제의 유물)이라면 정시 6년(동천왕 19년)이 그 전쟁의 시작 연도이고, 다시 싸웠다(再戰)란 기록은 틀린 것이다.

그러나 청조(淸朝) 인사들이 고물(古物) 위조의 버릇이 퍽 많아서 중국 현대의 고비(古碑). 고와(古瓦) 탁본들은 거의가 안본(贗本: 모조품)이라고 하니, 이 비의 파편은 아직 고고학자의 감정을 요한다 할 것이며, 설사 이것이 진적(진적)이라 하더라도 이는 불내성(不耐城)의 비명(碑銘)이고 환도성(丸都城)의 비명은 아니다. 왜냐하면, 집안현의 환도성은 <제3 환도성(第三 丸都城)>이며, 제3 환도성은 동천왕 때에는 아직 건축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는 본편 제2장 제7절에서 자세히 기술할 것이다.

5, 제2 환도성의 파괴 후 평양(平壤)으로의 천도

<제2 환도>가 철저히 파괴되자 이에 동천왕의 서북정벌(西北征伐)이란 웅심(雄心)이 차가운 재로 변하여 지금의 대동강 위의 평양(平壤)으로 천도하니, 이것이 고구려의 남천(南遷)의 시작이다.

평양 천도 이후에 대세가 변한 것이 두 가지이다.

(一) 남낙랑 소속 소국(小國)들이 비록 고구려에 복속하였으나 대주류왕(大朱留王)이 최씨(崔氏)를 멸망시킨 구원(舊怨)을 생각하여 항복하여 붙음과 배반하여 떨어져 나감을 반복하다가,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가 되어 제왕의 거처와 군대의 본영(본영)이 모두 이곳에 있게 되자, 소국들은 기가 눌리어 점차 완전히 꺾여 복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二) 평양 천도 이전에는 고구려가 늘 서북으로 발전하여 흉노. 중국 등과 충돌이 잦았으나, 평양 천도 이후에는 백제. 신라. 가라(加羅)등과 접촉하게 되어, 북방보다는 남방에 대한 충돌이 많았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가 서북의 국가로 되지 않고 동남의 국가로 된 것은 곧 평양으로의 천도가 그 원인이다. 그러나 평양 천도는 <제2 환도>가 파괴된 데 그 원인이 있으니, 그러므로 <제2 환도>의 파괴는 조선 고대사에 있어서 비상히 큰 사건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