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상고사

제 4장 차대왕(次大王)의 왕위 찬탈

운우(雲雨) 2017. 3. 13. 07:22

제 4장 차대왕(次大王)의 왕위 찬탈

1, 태조(太祖)의 가정불화(家庭不和)

왕자 수성(수성)이 이미 요동을 회복하고 한(한)의 세폐(歲幣)를 받게 되자 태조는 그의 공을 포상하여 <신가>에 임명하여 군국대사(軍國大事)를 총 책임지게 하였다. 그리하여 권력과 위세가 그의 한 몸에 집중되고 그의 성망(聲望)이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만약 수성이 이 성망을 이용하여 나아가 요서(遼西)를 쳤더라면 삼조선(三朝鮮)의 서북 옛 강토를 전부 회복하기가 용이하였겠지만, 그러나 가정에 대한 그의 불평과 불만이 공명(功名)에 대한 열정을 감소시켜, 이에 요동을 회복한 다음날 한(漢)의 강화 요구를 받아들이고(앞의 장에서 설명하였음-원주)귀국하였다.

그의 가정불화(家庭不和)란 무엇인가?

수성은 태조(太祖)의 서자(庶子)였고, 막근(莫勤). 막덕(莫德). 형제가 태조의 적자(嫡子)임은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는데, 막근은 고구려 왕실의 가법(家法)에 의하여 왕위를 계승할 권리가 있었고, 수성은 그 혁혁한 무공(武功)에 의하여 또한 태자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래서 수성은 요동 전쟁을 마치고 급히 서둘러 돌아와 더 이상 원정할 생각을 끊고, 밖으로 정사(政事)에 힘쓰면서 현신(賢臣) 목두루(穆度寠). 고복장(高福章)을 끌어들여 <팔치>와 <발치>에 임명하며 인망(人望)을 거두고, 안으로 사당(私黨)을 길러 태자의 지위를 얻기를 도모하니, <불라>(彿流那) <일치> 미유(彌儒)와 <환라>(桓那)<일치> 어지류(菸支留)와, <불라> 조의(조의: 당지의 <선배>영수(領首)-원주)가 수성의 뜻을 알고 이에 아첨하여 붙어서 태자의 지위를 얻으려고 밀모(밀모)하였다.

그런데 태조는, 수성을 태자로 삼으려 하니 가법(家法)에 걸리고, 막근을 태자로 삼으려 하니 수성이 마음에 걸려서, 오랫동안 태자를 세우지 못하였다. 수성이 정치를 도맡아 한 지 10여 년이 지나도록 태자의 지위를 얻지 못하자 원망하는 기색이 이따금 얼굴에 나타났으며, 모의(謀議)의 흔적이 때때로 밖으로 드러났다.

한편, 막근은 태자의 자리를 빼앗길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수성에게 죽임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였으나, 병권(兵權)도 없고 또 위망(威望)도 수성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그 대항할 방책이라고는 오직 태조의 마음을 돌리는 데 있음을 깨달았다.

이때 고구려 <신두수>의 신단(神壇)의 무사(巫師)는, 비록 부여와 같이 정치권력을 갖지는 못하였으나, 복술(卜術)로써 남의 길흉화복을 예언한다고 소문이 나서 일반인들은 그를 믿고 귀천의 계급을 불문하고 일체의 의문이나 어려운 문제를 그에게 가져가서 그 결정을 구하는 때였기 때문에, 막근은 무사에게 뇌물을 주고 도움을 청하였다.

마침 기원 142년에 환도성에 지진이 나고, 또 태조의 꿈에 표범이 범의 꼬리를 물어 끊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태조는 마음속으로 불안을 느끼고 무사에게 꿈을 풀이해 달라고 청하였다.

무사는 이를 수성을 참소할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범은 막근의 부친(즉 태조)이고, 표범은 범의 작은 씨(=서자)이며, 범의 꼬리는 범의 뒤이니, 아마도 대왕의 작은 씨가 대왕의 뒤(=후예. 적자)를 끊으려 하는 일이 있어서 꿈이 그러한가 합니다.”고 하면서 슬그머니 서자 수성이 적자 막근을 해치려 한다는 뜻을 말하였다.

그러나 태조가 수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데 어찌 갑자기 무사의 말에 기울어질 수 있겠는가. 다시 <불치> 고복장(高福章)을 불러 모으니, 고복장은 수성과 한 패는 아니었지만 아직 수성의 음모를 모르고 있었으므로, “선(善)을 행하면 모든 복이 내리고, 불선(不善)을 행하면 온갖 화가 이른다고 하니, 대왕께서 나라를 집같이 걱정하시고 백성을 아들같이 사랑하신다면, 비록 재이(災異)와 악몽(惡夢)이 있을지라도 무슨 화가 되겠습니까.” 라고 하여, 무사의 말을 반대하여 태조의 마음을 위안하였다.

2, 수성의 음모와 태조의 선위(禪位)

수성이 40년 동안이나 정권을 장악하여 위복(위복: 위력으로 억압하기도 하고 복록을 베풀어 사람을 달래기도 하는 것.)을 전단(전단)하면서 항상 막근을 살해하여 왕위 상속의 권리를 빼앗으려 하였으나, 다만 부친인 태조가 이미 연로하므로, 그 돌아가실 때를 기다려 일을 실행하려고 하였다.

한편 태조는 수성과 막근 사이의 감정을 조화시켜 자기가 백 살이 지난 후에도 아무런 변란이 없도록 한 뒤에 태자를 봉하려고 하였는데, 그 바람에 긴 세월이 경과되었다.

기원 146년은 태조가 재위한 지 94년이며, 나이가 만 1백세가 되는 경사스런 해였는데, 이때 아들 수성의 나이도 이미 76세나 되었다. 수성이 백세 노인인 태조가 여전히 건강한 것을 보고 혹시 자기가 태조보다도 먼저 죽어 왕위가 막근의 차지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수성이 이해 7월에 왜산(倭山: 연혁 미상-원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석양을 바라보고 탄식을 하였더니, 가까이 있던 자들이 그 뜻을 알고는 모두 힘을 다하여 왕자의 뒤를 따라 행동할 것을 맹서하였다.

그러나 그 중의 한 사람이 홀로 말하기를, “대왕께서 성명(聖名)하시어 인민들이 다 사랑하여 떠받들고 있는데, 왕자가 좌우의 소인들을 데리고 성명한 대왕을 폐하려 하는 것은, 마치 한 올의 실로써 만근의 무게를 끌려고 하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만일 왕자께서 생각을 고쳐서 효도로써 대왕을 섬긴다면 대왕께서는 반드시 왕자의 선(善)함을 알아 왕위를 물려주실 마음을 갖게 될 것이지만, 만일 그렇지 않으면 큰 화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반대하였다.

수성이 이를 듣기 싫어하니, 좌우의 사람들이 수성을 위하여 그를 살해하고, 음모를 더욱 급히 진행시켰다. 고복장(高福章)이 그것을 눈치 채고 태조에게 들어가 보고하고 태자를 주살(誅殺)하기를 청하였다.

태조가 이에 사람의 신하로써 누릴 수 있는 어떤 부귀(부귀)로도 수성의 마음을 달랠 수 없음을 깨달았으나, 그렇다고 차마 죽일 수도 없어서, 고복장의 청을 거절하고 수성에게 왕위를 선위(禪位)하고 별궁으로 물러나니, 드디어 수성(遂成)이 즉위하여 차대왕(次大王)이라 불렀다.

고구려 본기 태조 80년에 “左輔沛者穆度寠, 知遂成有異志, 稱疾不仕(좌보패자목도루, 지수성유이지, 칭질불사”(-> 좌보(左輔) 패자(沛者) 목도루(穆度寠)는 수성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음을 알고 병을 핑계대고 벼슬을 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하였고, 또 차때왕(차대왕) 2년에 “左輔穆度寠, 稱疾退老,)” (->좌보 목도루는 병을 핑계대고 은퇴하였다.) 라고 기록해 놓았는데, 이미 15년 전에 “칭질불사(稱疾不仕)”(병을 핑계로 벼슬을 하지 않았다.)하였던 목도루가 어찌 15년 후인 차대왕 2년에 또 “稱疾退老(칭질퇴노)”(->병을 핑계대고 은퇴하였다.)할 수 있단 말인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에 각종 고기(고기)로부터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고 이것저것 마구 취하기가 이처럼 심하였다.

게다가 <左輔(좌보)>나 <沛者(패자)나 다 <팔치>의 번역이거늘 (하나는 한문 번역, 하나는 이두문 표기-옳긴이) <左輔沛者(좌보패자)라는 겹말 명사(名詞)를 문자에 올렸으니, 이야말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태조본기에는, 94년 8월 “王遣將, 襲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왕견장, 습요동서안평현, 살대방령, 략득낙랑태수처자)”(->왕은 장수를 파견하여 요동의 서안평현(서안평현)을 습격하게 하여 대방 수령을 죽이고, 낙랑을 침략하여 태수의 처자를 사로 잡았다.)라고 하였는데, 이 기사는 <후한서>의 “高句麗王伯固...質桓之間, 復犯療東西安平,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고구려왕백고,,,질환지간, 부범요동서안평, 살대방령, 략득낙랑태수처자)“(->고구려왕 백고(伯固)가 ...질제(質帝)와 환제(桓帝)연간에 요동의 서안평현을 침범하여 대방 수령을 죽이고, 낙랑을 침략하여 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라는 본문을 초록한 것이다.

<질환지간(질환지간)>은 질제(질제)와 환제(환제) 연간을 가리킨 것인데, 질제와 환제 연간은 태조 94년이므로 김부식이 이것을 이곳 본문에 끼워 넣은 것이며, <백고(백고)>)는 신대왕(신대왕)의 이름이고, 이때는 신대왕 20년이므로, 김부식이 <고구려왕 백고(고구려왕 백고)라는 6자를 <遣將(견장: 장수를 파견하여)>으로 고친 것이다.

그러나 이때 태조의 가정에는 차대왕(次大王)과 막근 사이의 투쟁 때문에 바깥일에 신경을 쓸 여지가 없을 때였으므로, <후한서>의 <질환기간(質桓之間>)은 <환령지간(桓靈之間)>(환제(桓帝)와 영제(靈帝) 연간-원주), 곧 신대왕(次大王) 때로 개정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도 김부식은 이를 태조 94년의 일로 끼워 넣은 것이 이미 함부로 쓴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기다가 친절하게도 달(月)까지 박아서 <8월(八月)>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근거한 것인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면서 나라 안팎의 기록들을 뽑아서 가져올 때에, 모호한 곳이 있으면 아무 근거 없이 연월(年月)을 자기 마음대로 정하고 자구도 가감한 것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