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상고사

제 6장 을파소(乙巴素)의 업적

운우(雲雨) 2017. 3. 22. 07:24

제 6장 을파소(乙巴素)의 업적

1, 왕후의 정치 간여와 좌가려(左可慮)의 난(亂)

기원 179년에 신대왕(新大王)이 죽고 고국천왕(故國川王)이 즉위하였다. 왕후 우씨(于氏 ; 연나(椽那), 우소(于素)의 딸-원주)는 절세의 자색(姿色)으로 왕의 총애를 받아 왕후의 친척인 어비류(於卑留)는 <팔치>가 되고, 좌가려(左可慮)는 <발치>가 되어 정권을 마음대로 휘둘렀는데, 그 자제들은 권세를 믿고 교만하고 포악하여 남의 처녀를 빼앗아 비첩(卑妾)을 삼고 남의 아들과 조카들을 잡아서 노복(奴僕)을 만들었으며, 남의 좋은 전답이나 좋은 가옥을 빼앗아 자신들의 소유로 만들었으므로, 나라 안 사람들로 그들을 비방하는 자들이 많았다. 왕이 이를 살펴서 알고 그들에게 죄를 가하려 하자. 좌가려 등이 연나부(椽那部)를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기내(畿內: 왕이 직접 관할하는 수도 인근의 직할지-옮긴이)의 병마(兵馬)를 모집하여 이를 진압하고, 그리고 왕후 친족의 정치 간여를 징계하였다. 그리고 4부(部) 대신들에게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근자에 벼슬은 정실에 의하여 주어지고, 직위는 덕행에 의하여 승진되지 않음으로써 그 해독이 백성들에게 미치고 왕실을 동요시켰다. 이것은 다 내가 정사(政事)에 밝지 못했기 때문이니, 너희 4부는 각기 자기 밑에 있는 어진 인재(賢良)들을 천거하라.” 고 하였다. 4부가 협의하여 동부(東部)의 안류(晏留)를 천거하였다.

2, 을파소(乙巴素)의 등용

고국천왕이 안류(晏留)에게 국정을 맡기려 하자, 안류가 자기의 재능이 대임(大任)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면서 서압록곡(西鴨綠谷)의 처사(處士) 을파소(乙巴素)를 추천하였다.

을파소는 유류왕(儒留王)의 대신 을소(乙素)의 후손으로 고금의 치란(治亂)에 통달하였으며, 민간의 이로움과 폐단 등을 잘 알았으며, 학식이 넉넉하였으나, 세속에 아는 자가 없으므로 초야에 묻혀 지내면서 밭을 갈아 생활하고 벼슬에는 뜻이 없었다.

고국천왕이 말을 겸손하게 낮추고 후한 예물로써그를 맞아 스승의 예로써 대하고 중외대부(中畏大夫)를 삼아 <일치>의 작위를 주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을파소는 그에게 주어진 관작으로는 자기의 포부를 펼 수 없다고 생각하여 사양하면서, 다른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다시 구하여 높은 지위를 주어서 대업(大業)을 성취하라고 청하였다. 왕이 그의 뜻을 알고 을파소를 <신가>로 임명하여 모든 관리들보다 높은 지위에서 국정을 처리하게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을파소가 한갓 초야에 있던 한미(寒微)한 처사(處士)로서 하루아침에 높은 지위에 있게 된 것을 시샘하여 비난이 자자하였다. 이에 왕이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만일 <신가>의 명령을 거역하는 자가 있으면 그 친족까지 멸할 것이다.”고 하면서 더욱 을파소를 신임하였다.

이에 을파소가 자신을 알아주는 임금을 만난 것에 감격하여 지성으로 국정에 임하였는데, 상벌(賞罰)을 신중히 하고 정령(政令)을 밝게 하여 국내가 크게 잘 다스려져서 고구려 9백년간의 제일 현명한 재상이라 불리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고국천왕(故國川王)(혹은 국양(國襄)고도 한다.-원주) 의 이름은 남무(男武 혹은 이이모(伊夷謨)라고도 한다.-원주)이니, 신대왕 백고(伯固)의 둘째 아들이다. 백고가 궂기자(죽자) 나라 사람들이 맏아들 발기(拔奇)가 못난 자라고 하여 다 같이 아이모(伊夷謨)를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다. 한(漢) 헌제(獻帝) 건안(建安) 초기에 발기가 형으로서 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고 소노가(消奴加)와 함께 각각 휘하의 3만여 명을 이끌고 공손강(公孫康 :요동태수)에게로 가서 항복하고 비류수(沸流水)가로 돌아와 살았다.)이라고 하였으나, 이것은 김부식이 <삼국지> 고구려전의 본문을 초록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발기<拔寄>는 상산왕 본기(上山王 本紀) 가운데서 말하는 <발기(拔奇)>이며, <이이모(伊夷謨)>는 곧 상산왕 연우(延優)이다. <삼국지> 작자가 발기(拔奇) 연우(延優) 두 사람을 신대왕(新大王)의 아들로 잘못 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김부식이 경솔하게 그것을 믿고 고국천왕 남무(男武)가 곧 이이모(伊夷謨)라 하였으며, 남무(男武)는 곧 발기의 아우 아우라 하였으니, 이것이 첫째 잘못이다. <삼국지> 공손도전(公孫度傳)에 의하면, 공손가(公孫康)의 부친 공손도가 한 헌제(獻帝) 초평(初平) 원년에 요동태수가 되어 건안 9년에 죽고 공손강이 그 지위를 이어받았는바, 한 헌제 초평 원년은 고국천왕 12년경이므로, 고국천왕 즉위 초에는 공손강은 고사하고 그의 부친 공손도조차 아직 요동태수를 꿈도 꾸지 못했던 때이다. 그런데도 김부식이 이를 고국천왕 즉위 원년의 기사로 적었으니, 이것이 둘째 잘못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 있는 신대왕 5년에 “助...公孫度, 討富山賊(조...공손도, 토부산적)”(->공손도를 도와 부산의 적을 토벌하였다.)이라고 한 문장과 합쳐서 보면, 김부식은 공손도가 어느 시대의 인물인지조차 알지 못했던 듯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