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상고사

제 2장 태조, 차 양 대왕의 문치

운우(雲雨) 2021. 11. 20. 20:39

2장 태조, 차 양 대왕의 문치

 

1, 태조. . 양 대왕의 세계의 오류

 

왕조의 세계가 틀렸는지 아닌지를 안다고 해서 사가가 아는 체 할 것은 아니지만, 고대사는 연대의 사실이 언제나 왕조의 족보에 딸리어 전하기 때문에 그 틀린지의 여부를 가리게 되는 것이다.

이제 첫 번째로 태조의 세계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전 사서(삼국사기)에서는 태조는 유류왕의 아들 고추가 재사의 아들이고, 또한 대주류왕의 조카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류왕은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연대 삭감 내에 포함된 제왕이고 광개토경호태왕의 16세 조상이므로, 모본왕에게는 3세조가 될 것이고 태조에게는 4세조가 될 것이니, 따라서 유류왕이 태조의 부친인 재사의 부친이라고 한 것은 착오로 인한 기록이거나 아니면 거짓 기록이다.

 

재사는 그 작위 명이 고추가인데, 고추가는 곧 고추가를 이두문자로 기록한 것이다. <고주>는 오래된 뿌리란 뜻이며(지금 풍속에도 고근을 고주박이라고 한다.-원주)

<>는 신의 씨란 뜻으로, 당시 5부대신 의 칭호가 된 것이다. <고주가>는 당시 종친대신의 작위 명으로(지금 풍속에도 먼 동족을 <고죽지 먼동거럭이>라고 한다.-원주) 재사가 <고주가>의 작위를 가졌으므로 종친대신임은 명백하다.

 

<후한서><삼국지>에서는 연나는 본래는(나라의 주인이었으나 지금은) 왕이 될 권리를 잃었다. 그러나 적통대신으로서 고추가라 칭하고 종묘를 세울 수 있다. 그러나 연나는 서부의 이름이고 계나는 중부의 이름이니, 고구려의 정치제도에 중부가 주가 되고 4부가 이에 복속하였는데, 어느 나라 어느 때에도 중부를 놔두고 서부인 연나에서 왕이 났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태조는 연나의 주장인 고추가 재사의 아들로서의 자격으로 왕이 되고, 모본의 태자는 계나를 차지하였던 <신한>의 아들로서 물러나서 연나의 고추가가 되었음을 가리킨 것일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는 태조 이후에 다시 대주류왕의 후예로서 왕위를 이어받은 이가 없는데, 광개토경호태왕의 비문에서는 대주류왕이 그 직계 조상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태조의 부친인 재사는 대주류왕의 조카가 아니라 3세손이 되는 것이다.

 

이제 또 차대왕의 세계를 설명해 보도록 하자.

<삼국사기>에서는 차대왕을 재사의 아들이며 태조의 동모제(동복 동생. 한 어머니께서 난 아우- 옮김)라고 하였으나, 태조 당시에 차대왕은 이미 왕자라 칭하였으니, 차대왕이 태조의 동생이라면 어찌하여 왕의 동생이라고 하지 않고 왕자라고 하였는가?

당시 왕의 아들은 아니지만 전 왕의 아들이므로 또한 왕자로 칭하였다고한다면, 재사가 왕의 아버지이지 왕은 아니니, 왕의 아버지으 아들도 왕자라고 칭한 예가 있는가?

 

태조가 즉위할 때 나이가 겨우 7세였고, 생모인 태후가 섭정하였으니, 이때에 재사가 생존했다고 하더라도 만사를 감당해 내는 것이 부인이나 어린아이만도 못할 만큼 노쇠하였기 때문에 7세 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아내가 섭정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 되는데 , 그렇다면 그 뒤에는 어찌하여 다시 강장하여 차대왕과 신대왕과 인고 삼형제를 낳기에 이르렀는가?

재사가 정치문제에는 권태를 느꼈으나 아들을 낳을 만한 생식력은 왕성했다고 가정하더라도, 차대왕은 즉위할 때에 나이가 76세였으니 그가 태어난 해는 태조 19년이 되고 신대왕은 즉위할 때에 나이가 77세이므로 그가 태어난 해는 태조 37년이 된다. 태조 원년에 이미 늙었던 재사가 19년 만에 다시 차대왕을 낳고, 그 뒤 20년 만에 또 신대왕을 낳았다는 것이 어찌 사리에 맞는 말이겠느냐.

 

대개 차대왕 신대왕. 인고 3인은 태조의 서자들이고, 차대왕에게 죽은 막근과 막덕 두 사람은 태조의 작자들임로, 신대왕과 인고가 비록 차대왕의 권력전단을 미워하였으나 초록동색(다 같은 서자 출신이라는 처지-옮긴이)이기 때문에 그의 반역 음모를 고발하지 않았던 것이며, 차대왕도 즉위한 뒤에 적자인 막근 형제는 살해했으나 신대왕과 인고는 그대로 둔 것이니 <후한서>에 차대왕을 태조의 아들로 기록한 것이 실록이고, 고구려 본기에 차대왕을 태조의 동생이라고 한 것은 틀린 기록이거나 혹은 거짓 기록이다.

 

고구려 본기에서 태조의 어릴 때의 자는 어수라 하고 이름은 궁이라 하였으나, 어수는 이두문에서는 <마스>로 읽어야 할 것이고 그 뜻은 궁이므로, 전자나 후자나 다 태조의 이름이다. 따라서 어수는 어릴 때의 자이고 궁은 이름이라고 나눠서는 안 된다.

차대왕의 이름은 <수성>인데 수성은 <수성>으로 읽어야 할 것이니, 더러운 그릇을 깨끗이 닦는 <짚 몽둥이(=집수세미>를 가리키는 말이다.

태조를 옛 사서에서는 시호라 하였으나, 고구려는 시종 시법을 쓰지 않았으니, 생시에 그 공업을 예찬하여 태조 혹은 <국조>라고 쓴 존호(존호 : 높여 부르는 호칭)이다.

 

2, 태조대왕과 차대왕 시대의 <선배> 제도

 

고구려의 강성함은 <선배> 제도의 창설로 시작되었는데, 창설한 연대는 옛 사서에 전하지 않으나 조의(조의 : 아래에서 상세히 설명한다-원주)의 이름이 태조본기에 처음으로 나타나므로, 그 창설은 태조대왕과 차대왕의 때일 것이다.

<선배>는 이두문자로 (선인이라 썼는데, 선과 선은 선배의 선의 음을 취한 것이며, 인은 선배의 배의 뜻을 취한 것이다.

<선배>는 원래 <신수두>교도의 보통 명칭이었다. 태조 때에 와서 매년 3월과 10<신수두> 대제에 모든 군중들을 모아놓고 혹 칼춤도 추고, 혹 활도 쏘고, 혹 깨금질(한 발은 들고 한 발로만 뛰어가는 것. 앙감질)도 하고 혹 택견도 하고, 혹 강의 얼음을 깨고 물속에 들어가 물싸움도 하고, 혹 가무를 연주하여 그 실력을 보고, 혹 대규모 사냥시합을 하여 그 쏘아 잡은 것의 많고 적음도 보는 등 여러 가지 내기에서 승리하는 자를 <선배>라 불렀다.

일단 <선배>가 되고 나면 국가에서 녹을 주어 처자를 먹여 살려주어 가정의 대소사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게 하고, <선배>가 된 자는 각각 대오를 나누어 한 집에서 자고, 한 자리에서 먹고, 앉으면 옛일을 이야기 하거나 학문이나 기예를 배우거나 하고, 나가서는 산수를 탐험하거나, 성곽을 쌓거나 도로를 닦거나, 군중을 위하여 강습하거나 하여, 자신의 한 몸을 사회와 국가에 바쳐 어떤 어려움과 고생도 사양하지 않는다.

그 중에서 성품이나 행동, 학문과 기술이 뛰어난 자를 뽑아 스승으로 섬기고, 일반 <선배>들은 머리를 깎고 검은 천을 허리에 두르고, 그 스승은 검은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그 스승 중에 제일 우두머리는 <신크마리> - 두 대형>혹은 태대형이라 부르고, 그 다음은 <마리>- <대형>이라 부르며, 가장 아래는 <소형>(이 말은 그 근거를 찾지 못했음. -원주)이라 불렀다.

 

전쟁이 일어나면 <신크마리>가 그 <선배>들을 전부 모아 슷로 일단을 조직하여 전쟁터로 달려나갔다.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면 전사할 것을 작정하여, 죽어 돌아오는 자는 인민들이 이를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자와 같이 영광의 행운을 누리는 자들로 대하였고, 패하여 물러난 자들을 보고는 그들에게 침을 뱉었다. 그리하여 전쟁터에서 가장 용감한 것은 선배들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각종 지위를 거의 골품(태어날 때의 사회적 신분과 계급)으로 얻게 되어 있었던 사회였으므로 신분이 미천한 자는 고위직에 올ㄹ 수 없었으나, 오직 선배의 단체는 신분의 구분도 없었고, 따라서 귀천의 구별 없이 학문과 기술로서만 개인의 지위를 정하였기 때문에, 인물이 그 중에서 가장 많이 나왔다.

 

지금 함경북도의 재가화상이 곧 고구려 <선배>의 유종이니, <고려도경에 재가화상은 중이 아니라 형을 살고 나온 자 곧 전과자들로서, 중과 같이 머리를 깎았으므로 화상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그러나 화상을 재가화상이 아니다. 라고 한 것은 실제에 부합하는 말이지만, 그러나 형을 살고 나온 자.“ 라고 한 것은 서긍: <고려도경>의 작자. 중국 송나라 사람 원주)이 다만 중국 한대에 죄인을 머리를 깎아 노(노예)라고 불렀던 기록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드디어 재가화상을 형을 살고 나온 자. 곧 전과자라고 억단하였던 것이다.

 

대개 고구려가 망한 뒤에 <선배>의 유당들이 오히려 그 유풍을 보전하여 촌락에 숨어서 그 의무를 밟아 왔으나, <선배>의 명칭은 유교도에게 빼앗기고, 그 단발한 머리 모양 때문에 재가화상(집에서 생활하는 중)이란 잘못된 명칭을 얻게 된 것이며, 그 후예들이 빈곤하여 학문을 하지 못하여 조상의 옛일을 날로 잊어버려 자가의 내력을 스스로 증명하지 못한 것이다.(유교에서 <선배> 명칭을 가져와서 <선비>라 하였다.-옮긴이)

송도의 수박이 곧 <선배> 경기의 일부분이니, 수박은 중국에 들어가서는 <권법>이 되었으며, 일본에 건너가서는 <유도>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이조 때 무풍을 천시한 이래로 그 자취가 거의 전멸되었다.

 

3, 태조대왕과 차대왕 시대의 제도

 

고구려가 추모왕 때에는 많은 소국들이 벌려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규정이나 제도들이 처음 만들어진 때여서 국가의 체제를 갖추지 못하였다. 그러나 태조 때에 와서는 차대왕이 왕자로서 집정하여 각종 제도를 제정하였다. 그러나 그 제도는 대게 왕검조선이나 3부여의 것을 참작하여 대동소이하게 만든 것이며, 이후에 각 대마다 다소의 변경이 있었으나, 대개 차대왕이 정한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 . > 삼한의 제도를 모방하여 정부에 재상 셋을 두었으니, 이른바 <신가>. <팔치>. <발치> 이다.

<신가>는 태대신이란 뜻으로, 이두문자로는 <상가>라 썼다. <신가>의 별명은 <마리>인데 <마리><머리>란 뜻이고, 이두문자로는 <대로>(대는 옛 뜻이 <마주>이다.- 원주)라고 썼다. <신가><마리>를 한문으로는 <국상> 혹은 <대보>라고 번역하였다.

<팔치><>이란 뜻이고 이두문자로는 <패자>라고 썼다. <팔치><다라>란 뜻이고 이두문자로는 <평자>하고 썼다.

<팔치>. <발치>를 한문으로는 <좌보>. <우보>라고 번역하였다.

이 셋을 한문으로 직역한다면 <두신> <굉신> <고신> 이라 할 수 있으나, 문자의 멋을 내기 위하여 <대보> <좌보> <우보>라고 하였던 것이다.

<삼한고기> <해동고기> <고구려고기> 등의 책에서는 혹은 이두문자를 좇아서 <대로> <패자> <평자>라고 하고, 혹은 한문을 좇아서 <대보> <좌보> <우보>라고 하였다. 그런데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쓸 때에 이두문과 그것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의 같고 다름을 구별하지 못하고 철없는 붓으로 마구 빼고, 넣고, 마구 섞고 마구 갈라놓았으므로 ”<좌보> <우보><국상>으로 바꾸었다. <패자> 아무를 <좌보>로 삼았다.“ 고 하는 등의 우스운 이야기가 그의 <삼국사기>중에 가끔 있게 되었다.

 

전국을 동. . . 북 중 5부로 나누어 동부는 <순라> 남부는 <불라> 서부는 <연라> 북부는 <줄라>, 중부는 <가우라>라 하였는데, <순나> <관나> <연나> <절나> <계안나>는 곧 <순라> <불라. <연라> <줄라> <가우라>의 이두문자이다. 관나의 <>은 그 뜻을 취하여 <>불로 읽어야 할 것이며, 그 별명인 비류나의 <비류>는 그 음을 취하여 <>로 읽어야 할 것이니, 중국사에 보이는 <관나>는 곧 고구려의 이두문자를 직접 수입한 것이다. 그런데도 삼국사기에서는 관을 관으로 바꾸어 그 뜻을 읽었다. 기타의 순. . . . 4부는 모두 음을 취하여 쓴 이두문자이다.

중부는 곧 <신가>의 관할이고, . .. 4부는 중부에 속하였다. 각 부에는 <라살>이란 칭호의 대관 한 명을 두었는데, 이를 이두문자로는 <누살>이라 쓰고 한문으로는 <도사>라고 썼다. 도사는 <라살> 곧 누살이다. 도사의 <><>의 의역이고 <><>의 음역이다. 그런데도 <신당서(동이열전)에서는 큰 성에는 누살을 두었으니 당의 도독과 같고, 나머지 성에는 도사를 두었으니 이는 당의 자사와 같다.“(이것은 <구당서>에 기재된 내용이고, <신당서>에는 (처려근지)<도사>라고 불렀다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 -옮긴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억단이다.

 

>신가>는 정권뿐만 아니라 내외 병마를 전적으로 장악하여 그 권력과 지위가 매우 높고 무거워 대왕과 견줄만하였다. 그러나 대왕은 세습으로 부동의 높은 지위에 있었지만 <신가>는 매 3년마다 대왕과 4<라살>과 기타 중요 관원들이 대회의를 열어 적당한 인물을 골라서 선임하였다. 3년이 되면 바꾸되 공적이 있는 자는 연임이 허용되었다. <라살>은 대개 세습이지만 가끔 왕과 <신가>의 명령으로 파면되는 경우도 있었다.

 

5부 내에서 각기 또 5부로 나누었으며, 각 부마다 또 세명의 상과 다섯 명의 경을 두고, 이들의 관명 위에 그 부의 이름을 덧붙여 구별하였다.

이를테면 동부(순라)에 속한 <순라><순라의 순라>이며, 동부에 속한 <불라>(순라의 불라이며 기타도 이와 같았고, 동부(순라)<신가>)<불라의 신가>라 칭하고, 기타도 이와 같았다.

이밖에 <일치>라는 것은 도부(문서와 장부 등)와 사령 (왕명의 하달이나 외교문서 작성 등)을 주관하는 관직인데, 이를 이두문자로 <을지> 혹은 <우태>라고 쓰고 한문으로는 <주부>라고 번역하였다. 그리고 <살치>라는 것은 대왕의 시종을 말하는데 이두문자로는 <사자>라고 썼다. 기타 중외대부 . 과절. 불과절 등의 관직명은 그 음과 뜻. 그리고 그 관장하는 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삼국지> <후한서> <양서> <후주서> <당서> 등의 사서에서는 12급의 관명을 기재해 놓았으나 모두 조선말을 모르는 중국의 사가들이 그 전해들은 것을 한자로 번역한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지>에서는 주부 외에 또 우태를 기재해 놓았는데, 이것은 주부가 곧 우태의 의역임을 몰랐기 때문이다. <신당서에서, 누사 외에 또 누살을을 기재해 놓은 것은 누사가 곧 누살의 와전이란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통전에서, 고추가를 빈객을 맡은 자라고 한 것은 당시 고구려의 종친대신인 고추가가 외교관이 된 것을 보고, 드디어 고추가가 곧 외교관이라고 오인한 것이며, <구당서>에서 조의두대형이 3년마다 교체되었다.”고 한 것은 <선배>의 수석을 대신의 수석으로 오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