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상고사

제3장 태조, 차 양 대왕의 한족 축출과 옛 강토 회복

운우(雲雨) 2021. 11. 26. 21:06

3장 태조(太祖), () 양 대왕의 한족(漢族) 축출과 옛 강토 회복

 

1, ()의 국력과 동침(東侵)의 배경

 

모본왕이 한 때 요동(遼東)을 회복하였다는 것은 이미 제1장에서 말하였지만, 모본왕이 시해(弑害)당한 뒤에 태조가 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국내의 인심이 위기가 닥칠까봐 의심하므로 요서(遼西)지방에 10개의 성()을 쌓았으나, 이때에 한()의 부강함이 절정에 달하여 중국 유사(有史)이래 최고라 할 수 있게 되었다.

명장(名將) 반초(班超)가 서역도호(西域都護)가 되어 지금의 서아시아의 차사(車肆). 선선(鄯善) 등의 나라들을 멸망시키고 지중해(地中海)에 임하여 대진(大秦 : 지금의 이태리-원주)과 신식(信息)과 통하여, 백색 피부의 키 큰 인종과 양피지(羊皮紙)에 가로로 쓴 문자에 관한 이야기를 <후한서>에 기록해 놓았다.

두헌(竇憲)5천여 리의 원정군(遠征軍)을 일으켜 지금의 외몽고 등지로 나아가 북흉노(北匈奴)를 대파하여, 북흉노가 흑해 (黑海) 부근으로 들어가서 동() 고트족()을 압박함으로써 서양사상 민족대이동(民族大移動)의 시기를 이루었고, 이로부터 2백여 년 후 흉노 대왕 <(아틸라(Attila the Hun : 405~453)>가 유럽 전체를 교란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 이만한 국력을 가진 때였으니 어찌 요동을 고구려의 옛 땅이라고 해서 영구히 양보해 주겠는가, 어찌 고구려나 선비(鮮卑)27천만 전()의 치욕적인 세폐(歲幣)를 영구히 해마다 바치고 말겠는가. 이에 세폐를 정지하고, 경기(耿夔)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요하(遼河)를 건너가서 6개 현()을 다시 빼앗게 하고, 그리고 경기를 요동태수(遼東太守)에 임명하여 동침(東侵)할 기회를 노렸다.

 

2, 왕자 수성의 요동 회복

 

<후한서>에는 당시 한()을 침략한 중심인물은 오인(誤認)하였으나, 사실 태조는 당시 고구려에 군림한 제왕(帝王)일 뿐이었고, 전쟁에 대하여는 거의 차대왕(次大王), 즉 왕자 수성(遂成)이 맡아서 처리하였다.

전쟁이 처음에는 한()이 주동자가 되어 요동을 침탈하는 동시에 고구려로 쳐들어 왔으며, 고구려는 파동적(波動的)으로 이에 반항(反抗)하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고구려가 주동자가 되어 요동을 회복하는 동시에 나아가 한의 변경을 잠식하고, ()은 피동적으로 이에 반항(반항)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이 요동 회복의 전쟁은 기원 105년에 시작하여 121년에 끝났으니,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모두 17년간 지속된 것이다.

 

이 전쟁의 첫해(기원 105)는 왕자 수성(邃成)의 나이가 34세이던 해이다. 고구려가 비록 토지의 넓기와 인구의 많기가 한()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다만 고구려는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은 나라이므로 지키기에 편리하여 소수의 병력으로도 한()의 대군(大軍)을 방어하기에 넉넉하였다.

()은 평원과 광야의 나라이므로 쳐들어가기 용이하여 고구려가 비록 일거에 한을 깨뜨리기는 어려워도, 자주 틈을 타서 그 변경을 교란시킴으로써 저들을 피폐하게 만든 후에 이를 격멸시킨다는 전략하에, 수성은 드디어 장기간에 걸친 침입과 교란을 대  전쟁의 전략으로 정한 다음, 정예병으로 요동에 들어가 신창. 후성 6개 현을 쳐서 수비병들을 격파하고 재물을 약탈하였다. 그런 다음 예선비를 끌어들여 해마다 한의 우북평. 어양. 상곡. 등지를 침략하자, 17년 동안 한의 인력과 가축, 재력의 소모는 비상하게 컸다.

 

기원 121년 정월, 한의 안제(安帝)는 고구려의 침입과 압박을 우려하여 유주자사 풍환(馮煥), 현토 군수 요광(姚光), 요동태수 채풍(蔡諷)에게, 유주 소속의 병력으로 고구려를 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수성(邃成)이 태조의 명을 받아 <신치>총사령이 되어 2천 명의 병력으로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풍환 등의 침공을 막고, 3천명으로써 샛길로 나가서 요동 현토의 각 군을 불태워 풍환 등의 후방 지원을 차단함으로써 드디어 풍환 등을 대파하였다. 같은 해 4월에 수성이 다시 선비의 병력 8천 명으로써 요동의 요대현(遙隊縣)을 쳤는데, 고구려의 정예병을 신창(新昌)에 잠입시켰다가 요동 태수 채풍의 구원병을 습격하여 채풍(蔡諷)과 그 이하 장수와 군관 1백여 명을 참살하고, 무수한 사졸들을 살상 혹은 사로잡아 드디어 요동군을 떼어 주고 해마다 바치던 세폐(歲幣)를 다시 회복하겠다는 조건으로 고구려에 화의를 애걸하고 포로로 잡혀 있던 사람들을 속환(贖還)해 갔는데, 포로 한 명당 어른 비단 40필이었고, 어린 아이는 20필이었다.

 

요동과 낙랑 등의 회복이 태조본기(태조본기)<후한서>에는 보이지 아니하였으나, () 가탐전(賈耽傳)遼東樂浪, 陷於漢建安之際(요동낙랑, 함어한건안지제)”(-> () 건안 때에 요동 낙랑이 함락되었다,)라고 한 말을 기재해 놓았는바, 가탐은 당대(唐代)의 유일한 이족(夷族)들에 관한 역사의 연구자이므로, 그 말이 반드시 출처가 있을 것이지만, 다만 <건안(建安)은 기원 196, 즉 한 헌제(獻帝)의 원년이니, 고구려가 중간에 쇠약해진 때이므로, 건안(建安)은 곧 건광(建光)의 착오이며 <건광(建光)은 곧 기원 121년 한 안제(安帝)의 연호이고, 왕자 수성(遂成)이 채풍(蔡諷)을 참살하고 한의 군사를 파하던 때이니, 이때에 고구려가 요동군내에 가설한 현토. 낙랑군 등을 회복하였음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자 지금의 개평현(蓋平縣) 동북 70리에 환도성(丸都城)을 쌓아 서방 경영의 본영(本營)으로 삼고, 국내성(國內城)과 졸본성(卒本城)과 함께 부르기를 삼경(三京)이라고 하였다.

환도성의 위치에 대하여는 후세인들의 쟁론이 분분한데, 혹자는 환인현(幻人縣) 부근(지금의 혼강(渾江) 상류의 안고성(安古城)-원주)이라 하고, 혹자는 집안현(輯安縣) 홍석정자산상(紅石頂子山上)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전자는 산상왕(山上王)이 옮겨서 세운 <2 환도>이고, 후자는 동천왕(東川王)이 옮겨서 세운 <3 환도>이다. 이에 대하여는 제5편에서 설명할 것이지만, 태조의 환도는 <1 환도>로 이때에 처음으로 쌓기 시작하였다.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安市城, 或云丸都城(안시성, 혹운환도성“(안시성을 혹은 환도성이라고도 한다.)이라고 하였으며, ”安市城, 舊安守忽(안시성,구안수홀)“(안시성은 옛날의 안수홀이다.)이라고 하였다. <()은 우리말에 <>이라 하니, 환도<丸都><安市(안시)><安守(안수)는 다 <아리>로 읽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같은 한 지방, 곧 지금의 개평(蓋平) 동북 70리의 고허(故墟)<환도>임이 명백하다. 그런데도 후인들은 전후 세 환도(丸都)를 구별하지 못하고 늘 환도를 한 곳에서만 찾았으므로, 아무리 환도의 고증에 노력하였다고 하더라도 환도의 위치는 여전히 애매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