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상고사

제5장 차대왕의 피살과 명림답부의 전권

운우(雲雨) 2021. 12. 19. 18:11

5장 차대왕의 피살과 명림답부의 전권(專權)

 

1. 차대왕의 20년 전제(專制)

 

차대왕이 태조의 선위(禪位)를 받아 20년 동안 고구려에 군림하여 전제(專制)를 실행하다가, 연나조(椽那皂衣) 명림답부(명림답부(明臨答夫)에게 시해(弑害)를 당하였다. 그러나 차대왕 본기가 너무 간략하고 빠진 곳이 많아 그가 어느 정도로 전제정치(專制政治)를 하였는지, 그리고 시해를 당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이에 <삼국사기>의 차대왕 본기 전문을 여기에 번역하여 실은 다음 한 번 논의해 보고자 한다.

 

<차대왕(次大王)의 이름은 수성(邃成)이니, 태조대왕의 동복아우(同母弟)이다.(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여기서(同母弟(동모제)> 세 자는 <서자(庶子)로 고쳐야 한다.-원주). 성격이 용감하고 체격이 건장하여 위엄이 있었으나, 인자한 마음이 적었다. 태조대왕이 물려준 왕위를 이어받아 왕위에 오르니, 이때 그의 나이는 76세였다. 2년 봄 2, 관나부(貫那部) 패자(沛者) 미유(彌儒)를 우보(右輔)로 임명하였다.

3,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을 죽였다. 고복장이 죽을 때 탄식하여 말했다.

슬프고 원통하다! 나는 당시 선대(先代) 임금의 근신(近臣)이었는데 어찌 반역을 도모하는 자를 보고 말하지 않을 수 있는가, 선군(先君)께서 나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렇게 된 것이 한()스럽다. 이제 임금이 처음 왕위에 올랐으니, 마땅히 정치와 교화를 새롭게 하여 백성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이거늘, 이제 불의(不義)로써 한 사람의 충신을 죽이려 하니, 내가 이 무도한 때에 사느니 차라리 빨리 죽는 것이 낫다.“

그리고는 곧 형장으로 나가니, 원근(遠近)의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분개하고 애석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가을 7, 좌보(左輔) 목도루가(穆度婁)가 병을 핑계대고 은퇴하므로, 환나(桓那 : <연나(椽那)>로 고쳐야 한다.-원주) 우태(優台) 어지류(菸支留)를 좌보(左輔)로 삼고, 작위를 올려 대주부(大主簿)로 삼았다.

겨울 10, 비류나(沸流那) 조의(皂衣) 양신(陽神)을 중외대부(中畏大夫)로 삼고, 작위를 올려주어 우태(優台)로 삼았다. 이들은 모두 왕의 옛 친구들이었다.

11월 지진이 있었다.

3년 여름 4, 왕이 사람을 시켜서 태조대왕의 맏아들 막근(莫勤)을 죽이니, 그의 아우 막덕(莫德)이 화가 자기에게도 미칠까 겁을 내어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가을 7, 왕이 평유원(平儒原)에서 사냥을 하다가 흰 여우(白孤)

따라오며 울기에 쏘았ㅇ나 맞지 않았다. 왕이 무사(巫師)에게 물으니, 무사가 말했다. ”여우는 요사스런 짐승이니 상서로운 것이 아닌데 더욱이나 백색의 여우이니 더욱 괴변입니다. 그러나 천제(天帝)께서 자세히 말해줄 수 없기 때문에 요괴(妖怪)를 보여줌으로써 인군(人君)으로 하여금 두려운 마음을 갖고 조심하고 반성하여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금께서 만약 덕을 닦으신다면 화()를 복()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흉하면 흉하고 길하면 길한 것이지, 이제 이미 요사스런 것이라 해놓고 또다시 복이 된다고 하니, 이 어찌 나를 속이는 말이 아니냐?“하고는 드디어 무사를 죽여버렸다.

4년 여름 4, 그믐날 정묘(丁卯)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5월 오성(五星: 오행(五行), , , , 와 배합되는 다섯 개의 별인 수성(水星), 화성(火星), 금성(金星), 목성(木星), 토성(土星)-옮긴이)이 왕이 노여워 할까 겁을 내어 거짓말하기를 이는 임금의 덕이며 나라의 복입니다.“ 고 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겨울 12, 얼음이 얼지 않았다.

8년 여름 6, 서리가 쌓였다.

겨울 12, 천둥이 치고 지진이 있었다. 그믐날 밤에 객성(客星)이 달을 범하였다.

13년 봄 2, 혜성(彗星)이 북두칠성 자리에 나타났다.

여름 5, 그믐날 갑술(甲戌)에 일식이 있었다.

20년 봄 정월, 일식이 있었다.

3, 태조가 별궁에서 궂기니(궂기다):상사(喪事)가 나다.

죽다는 뜻임 옮긴이.) 이때 나이가 119세였다.

겨울 10, 연나조의(椽那皂衣) 명림답부(明臨答夫)가 백성들이 참을 수 없게 된 상황을 이유로 왕을 죽이고 그 호()를 차대왕(次大王)이라 하였다.

이상이 차대왕본기(次大王本紀)의 전부이다.

 

맨 마지막 절()명림답부(明臨答夫)가 백성들이 참을 수 없게 된 상황을 이유로 왕을 죽이고라고 하였으나, 그 앞부분의 기사를 소급하여 살펴보면, 차대왕이 인민들로 하여금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만든 정사(政事)가 하나도 없다.

고복장(高福章)은 차대왕의 음모를 고발하였던 자이므로 죽인 것이고, 목도루(穆度婁)는 차대왕과 막근(莫勤)의 중간에서 애매한 태도를 취했던 자이므로 내쫓은 것이며, 무사(巫師)는 태조의 꿈을 야릇하게 풀이하여 차대왕을 해치려 하였던 자이므로 죽인 것이고, 막근 형제는 차대왕과 경쟁하던 원수이므로 죽인 것이니, 이것이 비록 참옥하고 잔인한 행동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원수를 보복한 것이고 인민에게는 이해관계가 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모두 차대왕 2년 내지 3년 사이의 일이므로, 이로부터 18년이 지난 후인 차대왕 20년에 명림답부(明臨答夫)가 반란을 일으켜 왕을 죽인 유일한 구실이 될 수는 없다. 그 이외의 기사는 일식. 지진. 성변(星變:별의 비정상적인 운행)등 뿐이니, 이와 같은 천문지리의 변화는 차대왕의 정치적 선악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므로, 이것으로써 인민들로 하여금 참을 수 없게 하였다는 증거로 삼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차대왕이 패망하고 명림답부의 반란이 성공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차대왕이 패한 뒤에 좌보 어지류가 여러 대신들로부터 차대왕의 아우인 백고(伯固) 신대왕(新大王)을 왕위에 앉히도록 하자는 권유를 받았는바, 어지류는 처음부터 차대왕을 도와서 왕위 찬탈을 계획하였던 죄인의 우두머리이고, 여러 대신들이란 대개 차대왕의 왕위 찬탈 음모에 동참하였던 미유(彌儒). 양신(陽神) 등일 것이니, 이로써 미루어 보면, 차대왕의 패망은 곧 사당(私黨)의 반란으로 인한 것일 것이다.

차대왕 즉위 이전 10여 년 동안 차대왕을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왕위 찬탈을 계획하였던 사당(私黨)들이 도리어 차대왕과 20년 동안 부귀를 누리다가 하루아침에 왕을 배반하고 떨어져 나간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원인은 찾기 어렵지 않다. 고구려는 원래 1인 전제(專制)의 나라가 아니라 여러 큰 가문의 종족(閥族)들이 같이 다스리는, 말하자면 벌족공치(閥族共治)의 나라였다. 따라서 국가의 기밀대사(機密大事)는 왕이 전결하지 못하고 왕과 5()의 대관(大官)들이 대회의의 결정을 거쳐서 행하며, 형벌이나 사형 같은 것도 회의의 결정을 통하여 시행해 왔다.

 

차대왕은 부왕(父王)을 연금하고 당시 일반인들의 신앙의 중심에 있는 무사(巫師)를 죽이는 자로서, 비록 어지류(菸支留) 등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오르기는 하였으나, 왕위에 오른 뒤에는 이 무리들을 안중에 두지 않고 군권(君權)만이 유일(惟一)하다고 주장하여 매사를 전단(專斷)하여 혼자 시행하였다. 이에 연나(椽那)<선배>의 영수(嶺首)인 명림답부가 그 본부의 <선배>로서 밖에서 반기를 들고, 어지류 등이 안에서 호응하여, 태조의 죽음을 기회로 차대왕을 습격하여 죽이고 벌족공치(閥族共治)의 나라를 회복하였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명림답부를 조선 역사상 첫 번째로 혁명을 일으킨 혁명가(革命家)라고 하나, 혁명은 반드시 역사상 진화(進化)의 의의(意義)를 가진 변동(變動)을 일컫는 것이니, 벌족공치의 낡은 제도를 회복한 반란이 어찌 혁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인가. 명림답부는 한때 정권을 빼앗은 효웅(梟雄: 사납고 용맹한 영웅) 영웅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혁명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2, 명림답부의 전권(專權)과 외정(外政)

 

명림답부가 이에 차대왕을 죽이고, 차대왕 당년에 해()를 피하여 산속에 숨어있던 백고(伯固)를 세워 신대왕(新大王)이라 부르고, 전국에 사면령을 내려서 차대왕의 태자 추안(鄒安)까지 사면하여 양국군(讓國君)에 봉하고, 차대왕이 제정한 준엄한 형법(刑法)들을 폐지하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고 승복하였다.

이에 명림답부는 <신가>가 되어 군국(軍國) 대소사(大小事)를 모두 통할하고, <팔치><발치>를 겸임하며, (). (). 등 여러 맥족(貊族)의 부장(副長)들을 아울러 다스리니, 그 위력과 권세가 태조 때의 왕자 수성(遂成)보다 더하였다.

고구려 신대왕(新大王) 본기에서는 명림답부가 국상(國相)으로서 패자(沛者)를 겸하였다고 하고, . 우보(. 右輔)를 국상(국상)으로 바꾼 것은 이때에 시작되었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은 국상(國相)이 곧 <신가>임을 모르고, 패자(沛者)<팔치> 곧 좌보(左輔)인줄 모르고 건방지게 내린 주석이다.

 

태조 때에 한()이 요동을 지금의 난주(灤州)로 옮겨 설치하였다는 것은 이미 앞에 설명하였거니와, 기원 169년에 한()에 요동을 회복하려고 하여 경림(耿臨)을 현토태수에 임명하여 대거에 침입해 들어왔다. 이에 답부(答夫)가 여러 신하들과 신대왕(新大王)의 어전에서 회의를 열어 싸우는 것과 수비하는 것의 이해득실을 의논하였는데, 모두들 나가서 싸울 것을 주장하였으나, 답부가 우리는 군사 수가 적으나 지리가 험하다는 이점이 있고, ()은 군사 수는 많으나 군량 운반에 어려움이 있으니, 우리가 먼저 지킴으로써 한()의 병력을 지치게 한 후에 나가서 싸운다면 백전백승할 수 있다.”고 하여, 먼저는 지키고 후에 싸우는 것으로 방책을 정하고, 각 주()와 군()에 명령을 내려 인민과 양식과 가축류를 거두어 성 안이나 산성(山城)으로 들여놓게 하여 굳게 지켰다.

한의 군사들이 침입한 지 여러 달이 지났으나, 약탈을 하려고 해도 얻을 것이 없었고, 싸우려 하였으나 고구려가 대응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군량이 다 떨어져 굶주리고 지쳐서 군사를 퇴각하였다. 이에 답부가 좌원(坐原)까지 추격해 가서 침으로써 한병(漢兵)은 하나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답부가 이에 한()의 침입군을 격파하고 강토를 개척하려 하면서, 먼저 선비(鮮卑)의 이름난 왕 단석괴(檀石槐)를 끌어들여 한의 유주(幽州). 병주(並州)(지금의 북경, 산서 두 성() - 원주)를 쳐서 소란하게 만들고, 그 뒤를 이어 고구려의 병력으로 한()을 치려고 하였으나 그만 병이 들어 죽으니, 이때 그의 나이 113세였다. 신대왕이 직접 그의 빈소로 가서 통곡하고 왕을 장사지내는 예로써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신대왕 4(기원 168)한의 현토태수 경림이 쳐들어와서 우리 군사 수백명을 죽이자, 왕이 항복하여 현토에 붙기를 청하였다.”고 하였고, 신대왕 5(기원 169)에는 왕이 대가(대가)우거(우거)와 주부(주부) 연인(연인) 등을 보내어 ...요동태수 공손도를 도와 부산(부산)의 적을 토벌하였다.‘고 하였으며, 8(기원 172)에는 ()이 대병으로 우리를 향해 오자 ...답부(답부)가 수천의 기마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좌원(좌원)에서 교전하였다. ()의 군사는 대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앞의 두 조()<후한서><삼국지>에서, 뒤의 한 조()는 고기(고기)에서 초록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 사략(조선사략)에는 신대왕 5년에 한의 현토태수 경림이 대병으로 쳐들어오자, ...답부(답부)가 좌원(좌원)에서 대파하여 ...’“라고 하였는바, 그 연도가 <후한서>에서 靈帝建寧二年 玄菟馱數耿臨 伯固降(영제건영이년 현토태수경림...백고항.)”(영제 건녕 2년에 현토태수 경림이...백고(伯固: :신대왕)가 항복하였다.)이라고 한 것과 부합하므로, 경림의 침입군이 명림답부에게 패하였음이 명백한데도, 깁부식이 이를 두 번의 사실로 잘못 나누어, 하나는 신대왕 4, 또 하나는 신대왕 8년에 기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공손도(公孫度)<삼국지>에 의하면, () 헌제(獻帝)영평(永平) 원년에 비로소 요동태수가 되었는데, 영평 원년은 기원 190년으로 신대왕 5(기원 169)으로부터는 20년도 더 후이다. 신대왕이 20년 후에 요동태수가 될 도울 수 없음이 또한 명백하거늘, 시비를 가리지 못하는 김부식이 그대로 신대왕 본기 중에 잘못 전재(轉載)한 것이다.

 

그러나 <후한서><삼국지>는 패주한 경림(耿臨)을 대승한 것으로 기록해 놓았고, 연대도 닿지 않는 공손도를 신대왕의 종주국(宗主國)으로 기록하였으니, 이런 것에서 중국사에 무필(誣筆: 가짓 기록)이 많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동국통감>에는 현토태수 경림이 침입해 왔다가 명림답부에게 패배한 것을 신대왕 8년으로 적어놓았는데, 이 또한 <조선사략>과는 다르다.대대 이조(李朝)초엽에는 <삼한고기> <해동고기> 등 여러 가지 책들이 있어서 <삼국사기> 이외에도 참고할 만한 서적이 더러 있었는데, 고기(古記)들 간에도 그 기록이 서로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6장 을파소(乙巴素)의 업적

 

1왕후의 정치 간여와 좌가려(좌가려(좌가려(左可慮)의 난()

 

기원 179년에 신대왕(新大王)이 죽고 고국천왕(故國川王)이 즉위하였다. 왕후 우씨(于氏: 연나(椽那) 우소(于素)의 딸 원주)는 절세의 자색(姿色)으로 왕의 총애를 받아 왕후의 친척인 어비류(於畀留)<팔치>가 되고, 좌가려(左可慮)<발치>가 되어 정권을 마음대로 휘둘렀는데, 그 자제들은 권세를 믿고 교만하고 포학하여 남의 처녀를 빼앗아 비첩(婢妾)을 삼고 남의 아들과 조카들을 잡아서 노복(奴僕)을 만들었으며, 남의 좋은 전답이나 좋은 가옥을 빼앗아 자신들의 소유로 만들었으므로, 나라 안 사람들로 그들을 비방하는 자들이 많았다. 왕이 이를 살펴서 알고 그들에게 죄를 가하려 하자, 좌가려 등이 연나부(椽那部)를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기내(畿內: 왕이 직접 관할하는 수도 인근의 직할지) - 옮긴이)의 병마(兵馬)를 모집하여 이를 진압하고, 그리고 왕후 친족의 정치 간여를 징계하였다. 그리고 4() 대신들에게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근자에 벼슬은 정실에 의하여 주어지고, 직위는 덕행에 의하여 승진되지 않음으로써 그 해독이 백성들에게 미치고 왕실을 동요시켰다. 이것은 다 내가 정사(政事)에 밝지 못했기 때문이다. 너희 4부는 각기 자기 밑에 있는 어진 인재(賢良)들을 천거하라.” 고 하였다. 4부가 협의하여 동부(東部)의 안류(晏留)를 천거하였다.

 

2, 을파소(乙巴素)의 등용

 

고국천왕이 안류(晏留)에게 국정을 맡기려 하자, 안류가 자기의 재능이 대임(代任)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면서 서압록곡(西鴨綠穀)의 처사(處士)을파소(乙巴素)를 추천하였다.

을파소는 유류왕(儒留王: 琉璃王)의 대신(大臣)이었던 을소(乙素)의 후손으로 고금의 치란(治亂)에 통달하였으며, 민간의 이로움과 폐단 등을 잘 알았으며, 학식이 넉넉하였으나, 세속에 아는 자가 없으므로 초야에 묻혀 지내면서 밭을 갈아 생활하고 벼슬에는 뜻이 없었다. 고국천왕이 말을 겸손하게 낮추고 후한 예물로써 그를 맞아 스승의 예로써 대하고 중외대부(中畏大夫)를 삼아 <일치>의 작위를 주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을파소는 그에게 주어진 관작으로는 자기의 포부를 펼 수 없다고 생각하여 사양하면서, 다른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다시 구하여 높은 지위를 주어서 대업(大業)을 성취하라고 청하였다. 왕이 그 뜻을 알고 을파소를 <신가>로 임명하여 모든 관리들보다 높은 지위에서 국정을 처리하게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을파소가 한갓 초야에 있던 한미(寒微)한 처사(處士)로서 하루아침에 높은 지위에 있게 된 것을 시샘하여 비난이 자자하였다. 이에 왕이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만일 <신가>의 명령을 거역하는 자가 있으면 그 친족까지 멸할 것이다.”고 하면서 더욱 을파소를 신임하였다.

이에 을파소가 자신을 알아주는 임금을 만난 것에 감격하여 지성으로 국정에 임하였는데, 상벌(賞罰)을 신중히 하고 정령(政令)을 밝게 하여 국내가 크게 잘 다스려져서 고구려 900년간의 제일 현명한 재상(賢相)이라 불리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故國川王(고국천왕 혹은 국양(國壤)이라고도 한다.-원주)의 이름은 남무(男武: 혹은 이이모(伊夷模)라고도 한다.-원주)이니, 신대왕 백고(伯固)의 둘째 아들이다. 백고가 궃기자(죽자) 나라 사람들이 맏아들 발기(拔奇)가 못난 자라고 하여 다 같이 이이모(伊夷模)를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다. () 헌제(獻帝) 건안(建安) 초기에 발기가 형으로서 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고 소노가(消奴加)와 함께 각각 휘하의 3만여 명을 이끌고 공손강(公孫康: 요동태수)에게로 가서 항복하고 비류수(沸流水)가로 돌아와 살았다.)이라고 하였으나, 이것은 김부식이 <삼국지> 고구려전의 본문을 초록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발기(拔奇)는 상산왕본기(上山王本紀) 가운데서 말하는 발기

(拔奇)이며, <伊夷模>는 곧 상산왕의 연우(延優)이다. <삼국지> 작자가 발기(拔奇). 연우(延優) 두 사람을 신대왕(新大王)의 아들로 잘못 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김부식이 경솔하게 그것을 믿고 고국천왕 남무(男武)가 곧 이이모(伊夷模)라 하였으며, 남무(男武)는곧 발기(拔奇)의 아우라 하였으니,이것이 그 첫째 잘못이다.

<삼국지> 공손도전(公孫度傳)에 의하면, 공손강(公孫康)의 부친 공손도가 한 헌제(獻帝) 초평(初平) 원년에 요동태수가 되어 건안 9년에 죽고 공손강이 그 지위를 이어받았는바, 한 헌제 초평 원년은 고국천왕 12년경이므로, 고국천왕 즉위 초에는 공손강은 고사하고 그의 부친 공손도조차 아직 요동태수를 꿈도 꾸지 못했던 때이다. 그런데도 김부식이 이를 고국천왕 즉위 원년의 기사로 적었으니, 이것이 둘째 잘못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 있는 신대왕 5년에 ...公孫度, 討富山賊(, 공손도, 토부산적)“(-> 공손도를 도와 부산의 적을 토벌하였다.)이라고 한 문장과 합쳐서 보면, 김부식은 공손도가 어느 시대의 인물인지조차 알지 못했던 듯하니, 이 또한 기이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