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맛있는 동행 / 화운 임승진

운우(雲雨) 2019. 9. 23. 22:37

맛있는 동행 / 화운 임승진

 

 

1971년 10월

스산한 바람이 명동 거리를 휩쓸고 지나던 날

쓰디쓴 커피를 시켜놓고 다 식어가도록

부끄러워 얼굴도 마주 보지 못했던 우리

서울과 부산을 오르내리며

여덟 번의 봄 동산을 넘어서 면사포를 썼을 땐

무지갯빛 낙원으로 들어가는 줄만 알았어요

남남이 만나 평생을 반려자로 살아가는 일은

웃음과 눈물로 비벼내는 비빔밥

갖가지 오색나물에 황백지단 올려

참기름 살짝 뿌려주면 고소한 냄새 진동하건만

톡 쏘는 고추장 빠지면 제맛이 아니지요

따끈한 뚝배기에 골고루 비벼야 참맛이 나는 걸

자식 낳아 기르느라 입술 말라 부르트고

두어줄 주름훈장 목에 걸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어요

한두 가지로는 삶의 진한 맛을 제대로 내지 못해

맵고, 짜고, 시고, 달고, 쓰기도 했지만

기대어 살아온 세월만큼 길들여진 각별한 맛

더 나이 들어 입맛 희미해지기  전에

양푼 한가득 푸짐하게 버무려서

사는 동안 매일매일 맛있는 동행이 되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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