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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서 길을 잃다. 14부

운우(雲雨) 2011. 11. 10. 07:22

14부

수련과 영우가 신혼여행을 떠나고 있을 시간에 정민은 병원의 침상에서 꿈을 꾸고 있었다.

수련이 눈물을 흘리며 강에서 배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모습이었다. 눈물이 맺힌 눈에 손을 흔들며 떠나는 수련을 정민은 손을 뻗어 잡으려 했지만 잡을 수가 없다. 그때 정희가 정민의 짐 속에서 나온 음악 테이프를 집에서 같다놓은 음향기기에 넣고 틀었다. 그 음악이 정민이 늘 즐겨 듣던 그리그의 솔베이지의 노래였다.

 

 

 

그 겨울이 지나

또 봄은 가고 또 봄은 가고

그 여름이 가면 더

세월이 간다, 세월이 간다.

아! 그러나 그대는 내님일세.

내 정성을 다하여 늘 고대하노라.

 

 

아! 그 풍성한 복을

참 많이 받고 참 많이 받고

오! 우리 하나님

늘 보호하소서. 늘 보호하소서.

쓸쓸하게 홀로 늘 고대함 그 몇 해인가.

아! 나는 그리워라 널 찾아 가노라 널 찾아 가노라.

 

 

 

솔베이지의 노래가 쓸쓸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마치 수련과 영우의 결혼이 정민에게는 비극이라도 되듯이 그 슬픈 노랫말에 실려 정민의 뇌 속에도 깊이 전달이 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별안간 정민이 소리를 지른다.

“수련씨, 안돼요. 가지 말아요.”

“정민씨, 기다리다 못해 난 떠나요. 부디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세요. 흐흐흑”

수련은 눈물을 흘리며 슬픈 얼굴로 배를 타고 떠나고 있었다.

“앗, 수련씨, 안돼요, 수련씨.”

눈에 뭐가 보인다. 그리고 허탈하다. 그의 눈에 보인 것은 병실의 천정이었을 것이다. 일 년이 넘어서야 부스스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세상을 다시 보게 된 것이었다. 정민의 얼굴을 닦아 주려고 수건을 빨아 오던 정희는 눈을 뜬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동생 정민을 보고 놀라 눈물을 펑펑 쏟는다.

“정민아, 네가 살아났구나. 네가 살아났어. 난 일 년이 넘도록 깨어나지 않아 네가 영영 못 일어나면 어쩌나 하고 얼마나 걱정을 했다구. 하나님이 무심치는 않으셨구나. 내 동생 장하다. 네가 기어이 일어났구나.”

정희는 정민의 몸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트린다. 정희는 정민의 깨어남이 기적과도 같은 것이었다. 지난 일 년 간 깨어나지 않는 동생을 보며 얼마나 애간장을 태웠는지 모른다. 병원에서는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말했지만 깨어나지를 않으니 걱정만 쌓이고 있었다. 그러나 정희가 정민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시기가 문제지 깨어나는 것은 틀림없다는 담당 의사의 확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깨어나는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빠른 시간 내에 일어날 것이지만 정확한 때는 알 수 없다고 한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인가 내일인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꿈과 같이 깨어난 것이다. 정희는 정민의 주치의에게 동생이 깨어난 것을 알렸다. 급히 온 주치의가 정민을 몇 군데 체크를 했다.

“몸이 워낙 건강한 사람이라 살았지 약한 체질이었다면 벌써 죽었을 겁니다. 그리고 본인이 무의식 속에서도 살아야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민아, 네가 기어이 이겨 냈구나. 내 동생 장하다. 난 네가 이렇게 영영 깨어나지 않을까봐 얼마나 조바심 속에서 살았는지 모른단다. 흐흐흑”

깨어나긴 했지만 아직도 정신이 맑지 못한 정민은 누나 정희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히 자신은 사막에서 쓰러졌는데 어떻게 누나 정희가 옆에서 울고 있는 건지 영문을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누나, 도대체 뭐가 뭔지 아무 것도 모르겠어. 난 사막에서 쓰러졌는데 왜 내가 여기 있으며 나와 함께 쓰러졌던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야.”

“정민아, 너 그러면 하나도 생각나는 게 없단 말이야?”

“무슨 생각이 난단 말이야. 난 사막에서 쓰러졌고 함께 있던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럼 그 친구들은 모두 죽었단 말이야.”

그때 마침 귀국해 매일 들리다시피 하는 남석현과 박기남이 늦은 저녁 퇴근하는 길에 들려 정민이 깨어난 것을 환호하며 축하했다.

“백대리님,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너무 반가워요.”

남석현과 박기남은 눈물을 흘리며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차차 정신이 맑아지며 사막에서의 장면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몸서리가 쳐졌다. 다시는 그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남석현과 박기남은 매일 찾아오기도 했지만 휴일 날은 병원에 와서 살다시피 했다. 그들은 사선(死線)을 함께 넘은 사이라 그런지 더욱 우정이 돈독해졌음을 느끼고 있었다.

“남주임과 박기사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부탁이라니요. 무엇이든지 말씀하세요.”

정민은 깨어나기 직전에 꾸었던 꿈이 꺼림칙했다. 자신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일 년이 넘도록 소식을 전하지 못 했으니 혹 수련이 기다리다 못해 실망감에 또 자살을 했는가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처음 만날 때 수련이 바닷물로 뛰어드는 것을 목격했던 정민으로서는 자신으로 인하여 수련이 전과 같이 일을 또 저지를까 못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나는 조금 전 막 깨어나 사막의 일이 이렇게 오래 된 일인 줄 몰랐어요. 깨어나 보니 일 년이란 시간이 넘었잖아요. 그동안 나는 죽은 사람이었어요. 누님의 정성과 나를 위하여 걱정해준 사람들의 마음으로 내가 살아난 것 같아요. 그런데 수련씨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일 년이 넘도록 소식을 전하지 못했으니 기다리다 지쳐 어떻게 된 것이 아닐 런지 걱정이 됩니다. 한번 알아봐 주시겠습니까?”

정민은 머릿속에 입력된 주소를 가르쳐 주었다. 걱정하지 말라며 박기남과 남석현이 나갔다. 전화번호를 기록해 놓았던 수첩은 정민이 쓰러졌을 때 급히 오느라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고 머릿속에 입력이 되었던 전화번호를 기억하려 했지만 이미 지워졌는지 기억이 떠오르질 않았다. 휴일이 되자 기남과 석현은 함께 만나 수련의 소식을 알기 위해 이천으로 내려갔다. 수옥의 집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도심에서 떨어진 과수원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문에 초인종을 누르니 고등학생 정도의 여자 아이가 나온다.

“누구세요?”

“설수련씨를 만나러 왔는데 혹시 여기 살고 있나요.”

“네, 맞아요, 저의 이몬데요. 며칠 전에 결혼해 신혼여행 갔는데 돌아 왔는지는 모르겠어요.”

“결혼해 신혼여행?”

“엄마가 집에 계시니 우리 엄마에게 물어 보세요.”

하고는 아이가 안으로 들어간 후 조금 서 있으려니 수옥이 나왔다.

“처음 뵙는 분들인데 우리 수련이를 찾으신다고요. 수련이는 제 동생인데 무슨 일이시죠?”

“네, 저희들은 백정민 대리님의 부탁으로 설수련씨를 만나러 왔습니다. ”

“백정민씨요? 아니 귀국한다 해놓고 일 년이 넘도록 소식 한번 없더니 웬일로 모르는 분들이 오셨어요.”

“백정민 대리님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귀국 한 달을 남기고 수련씨에게 줄 선물을 구하러 갔다가 사고로 인하여 일 년이 넘도록 식물인간으로 있다가 깨어 난지 겨우 3일이 지났습니다.

“네? 뭐라고요? 사고로 식물인간이 됐었다고요? 그런 일이 있었어요? 이게 웬일이람.”

“조금 전 학생이 그러는데 설수련씨가 결혼을 했다고 하는데 무슨 말씀인지요? 자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죄송해요, 수련이는 며칠 전 결혼을 했어요. 일 년이 넘도록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으니 할 수 없이 내가 억지로 결혼을 시킨 거지요. 들어오셔서 차 한 잔 하시며 자세한 이야기 좀 들려주십시오.”

기남과 석현은 수련이 결혼을 했다는 말에 망연자실 할 수밖에 없었다. 수옥 또한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정민이 1년이 넘는 동안을 사경을 헤매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민은 수련에게는 생명의 은인이고 수련이 영우에게 시집을 갔더라도 수련은 아직도 정민을 사랑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공연히 영우에게 진 신세 때문에 수련을 부추긴 자신이 부끄럽기만 하다. 그러나 어쩌랴 이제는 모든 것이 엎질러진 물인걸, 기남과 석현은 자신들이 정민과 함께 겪었던 생과 사의 지옥과 같았던 사막의 일들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본인들이 겪은 일을 직접 들려주니 더 감동적이었고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던진 정민에 대하여 고개 숙여지며 존경하는 마음과 미안함이 겹쳐왔다. 수련을 구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 험한 바닷물에 뛰어 들어 남의 생명을 구할 사람이 흔치 않은 세상이다. 수옥은 어쩌면 그때 일은 우연이라고 생각 했었는데 지금 사막의 일을 생생하게 듣고 보니 정민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마음에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것이었다. 기남과 석현은 수옥에게 수련이 일 년이 넘도록 정민을 기다렸던 이야기를 듣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수옥의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정민에게 이 일을 어떻게 전할까 고민을 했지만 결국은 실망이야 되겠지만 솔직한 말을 전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기남과 석현은 수옥을 만나고 온 이야기를 정민에게 그대로 들려주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정민은 한숨과 같은 긴 탄식이 흘러 나왔다.

“신이여! 운명이라 해도 너무 잔인합니다. 이제 난 어디로 가야합니까?”

정민은 그 말을 뱉고는 눈물만 흘리며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병실 창밖을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기남과 석현은 그런 정민을 보며 살며시 병실을 빠져 나왔다. 정민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건 운명이라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수련이 바닷물로 뛰어든걸 보고 구한 것은 분명 운명적이었다. 어떻게 그 많은 차량이 지나가면서 눈에 뛴 건 정민뿐이었으니 말이다. 또한 결혼을 약속하고 그녀와 열흘간을 함께 보내고 사우디아라비아에 2년이란 세월을 보내면서도 자신의 사람이라고 확신을 했었다. 그러나 귀국을 앞두고 수련을 기쁘게 해주기 위하여 구하러간 나무화석 때문에 이런 사고가 난 것은 운명이 아니라면 일어나서는 안 될 사건이었다.

“하나님, 너무 잔인하십니다. 왜 수련씨를 저에게 보내 주시고 또 빼앗아 가셨는지요. 원망스럽습니다.”

미칠 것 같은 마음이었지만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하며 마음을 진정시켜 보려 애를 쓴다. 그리고 허허롭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누가 싫어서 배신을 하고 배신을 당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 내가 사막에서 남석현과 박기남을 살리고자 할 때 그때 이미 나는 두 사람의 목숨과 수련을 바꾼 것이다. 이제 두 사람을 살렸으니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의 목숨과 수련을 맞바꾸고 보너스로 내 목숨까지 살려 주셨으니 이보다 더 감사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정민이 이렇게 마음을 먹으니 한결 마음에 위안이 된다. 이제는 빨리 병원에서 훌훌 털고 일어나 건강을 되찾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이었다.

“수련씨, 운명은 또 다시 당신과 나를 갈라놓고 말았어요. 부디 행복하게 잘 살길 바랄 뿐입니다.”

 

요즈음 회사의 일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밤늦게까지 거래처를 돌고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날의 연속이었다. 정민이 병원을 퇴원해 건강을 회복한 후 다니던 건설회사를 퇴사하고 개인 회사를 차린 지도 13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침에 일찍 출근을 하니 직원이 전화가 왔다고 한다. 수화기를 들으니 여자의 음성이다.

“백정민입니다.”

“백정민씨 맞죠?”

“네, 맞습니다만 누구시죠?”

“혹시 설수련이라는 사람을 지금도 알고 있는지요.”

“네, 알고 있습니다.”

“13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신단 말입니까?”

“그래요, 내 인생에서 지울 수 없는 사람이니까요.”

“그렇게도 잊지 못할 사람입니까?”

“그녀와 나는 결혼을 약속했던 사이였지요. 그러나 운명은 얄궂게도 우리를 갈라놓고 말았어요.”

“그랬군요. 가슴 아픈 일이었군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묻고 있는 분은 누구십니까? 설수련씨를 아십니까?”

“?”

“그럼 혹시 설수련씨인가요? 수련씨 맞죠?”

“네, 그래요. 수련이에요. 죄송합니다. 그동안 죄송하다는 전화를 하려고 수화기를 몇 번인가 들었다가 못하고 오늘에야 용기를 내어 전화를 드리는 겁니다. 그런 사건이 있어 병원에 일 년 넘게 식물인간으로 있었다는 걸 나중에야 언니에게 들어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언니는 나에게 정민씨가 그런 사건으로 인하여 못 왔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숨겨 왔으니까요. 만약 정민씨가 그런 일로 못 왔다는 것을 알았다면 난 모든 것을 버리고 정민씨에게 갔을 겁니다.”

“이제 와 그런 일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모두 지나간 일인걸요.”

“정민씨는 나에게 평생 잊지 못할 선물을 주신 분입니다. 앞으로도 죽기 전에는 잊지 못할 겁니다.”

“그러고 보면 난 수련씨에게 아픔만 준 것 같군요. 모든 것은 지나간 과거일 뿐인걸요. 이젠 모두 잊으십시오.”

수련은 영우와 결혼을 해 살고 있지만 영우와의 사이에 아이가 없었다. 그래서 영우는 효빈을 자신의 친 딸 이상으로 사랑했다. 영우는 결혼을 하자 곧 바로 효빈을 자신의 호적에 친 딸로 입적을 시키고 싶었으나 수련이 반대를 했다. 언젠가 정민이 나타나면 효빈에게 친 아버지를 찾아 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수련은 효빈을 볼 때마다 정민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그는 어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자신을 찾아오지 못한 것이라고 수련은 믿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수옥에게 정민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수옥이 생각하기에는 수련의 나이도 40을 넘겼으니 그 나이에 정민이 살아 있다한들 무슨 일이 있겠는가 한 것 같았다. 그러나 수련은 수옥이 정민에 대하여 들려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자신은 죽어가고 있던 정민을 버리고 결혼을 하여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다니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미 늦은 줄은 알지만 그길로 정민의 연락처를 알아내기 위해 정민이 전에 다니던 건설회사로 찾아 갔다. 그러나 정민은 오래 전에 회사를 그만 두었다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실망하여 막 나오려는데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수련에게 물었다.

“혹시 백정민씨를 찾으세요?”

“네, 그렇습니다.”

“백정민씨는 제가 모시던 분인데 지금은 회사를 퇴직하고 오래 전에 개인회사를 창업하셨습니다. 제가 연락처를 알려 드리지요.”

하며 정민의 회사 전화번호를 알려 준다. 수련은 그길로 내려와 몇 번인가 수화기를 들었지만 죄지은 것 같은 마음이 전화를 하도록 허락치를 않았다.

“정민씨, 제가 3일 후에 서울에 갈 일이 있어요. 서울에 가서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습니다. 가능 할 런지요.”

“그러면 동대문에 오셔서 전화를 주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3일 후 오후였다. 점심시간이 이미 지난 시간인데 전화의 벨이 울린다. 직원이 전화를 받아서 정민에게 건넨다.

“설수련씨라고 하는데요.”

“전화 바꿨습니다.”

“저 설수련이예요. 어디에서 기다릴까요.”

“동대문 옆에 작은 호텔이 있어요. 호텔 커피숍에서 기다리세요. 내가 바로 나갈게요.”

정민은 왠지 모르지만 가슴이 설렌다.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날 때 헤어지고 13년이 넘어서 보게 되는 얼굴이다. 어떻게 변했을까? 지금은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여러 가지 궁금한 것들이 많았지만 남의 여자인데 그런 건 알아서 무얼 해 하는 마음도 들었다. 1층 커피숍에 들어가 한 바퀴 둘러보니 핑크색 쉐터와 치마를 입은 여자가 안쪽에 앉아 있었다. 수련이었다. 모습은 예전과 전혀 다르지 않았지만 시골 아줌마 같은 분위기가 풍기는 모습이 분명 수련이었다. 정민이 수련을 향해 가자 수련이 알아보고 일어나 인사를 한다.

“안녕하셨어요. 오랜만이에요.”

정민이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자 수련도 손을 내민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정민씨도 많이 변하신 것 같아요.”

수련이 정민을 보며 많이 변했다고 한다.

“저야 제 모습 매일 보니 변한 줄은 잘 모르겠어요. 변한 것 같아요? 허허허”

“나이가 들으니 중후한 멋이 있어요. 더 멋져 보이는걸요. 호호호”

“감사합니다.”

“변한건 제가 더 많이 변했을 거예요. 제가 보기에도 많이 늙은걸요.”

그녀의 말대로 수련은 외모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얼굴이 늙은 것은 아닌데 화장기 없는 모습에서 도회지에서 사는 여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전 강원도 정선에 살아요. 오늘 고속버스로 언니 집에 다니러 오다가 정민씨나 한번 보고 가려고 이렇게 만나자고 한 거예요.”

“그랬었군요. 그럼 아직 식사도 못했겠는데요.”

“아니에요. 식사는 하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아요.”

“그러지 말고 식사하러 가기로 해요.”

정민은 그녀를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안내를 했다. 정민은 좀 전에 식사를 했기에 식욕이 땡기지 않았으나 여자 혼자 밥을 시켜 놓고 먹으라 하기에는 부끄러워 할 것 같아 함께 2인분을 시켰다. 밥을 먹으며 밝은데서 수련의 얼굴을 보니 얼굴에 약간의 멍 자국이 있었다. 처음엔 모른 척 하려 했으나 모습에서 초췌함이 보였다. 그래서 정민은 묻지 않으려던 것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수련씨, 오늘 상당히 초췌해 보이는 것 알고 있어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어요.”

“그런데 내 눈엔 왜 그렇게 보일까요.”

그러자 수련이 눈을 밑으로 내리며 눈물을 흘린다. 수련이 눈물을 흘리자 정민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수련씨, 무슨 일이 있어요. 무슨 일인지 말해 봐요.”

수련은 한숨을 쉬더니 그동안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결혼을 한 후 영우의 부동산은 확장을 하여 성업 중이었다. 원래부터 수완이 좋았던 영우의 사업은 날로 번창을 하였다. 돈줄이 튼튼했던 영우를 따라잡을 업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말 그대로 영우의 사업은 무풍지대와 같았다. 그러나 문제는 영우에게 있었다. 수련과 결혼 후 신앙심도 더 돈독해진 영우는 직원들에게 점포를 맡기고 교회 사업에 더 열중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서 집으로 온 영우는 수련과 상의할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마주 앉은 영우는 상의랄 것도 없이 정선으로 이사를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전에 사 놓았던 정선 임계면에 사놓은 땅으로 이사를 간다는 것이었다. 이미 부동산과 모든 것은 정리가 끝났고 바로 이사만 하면 되는 단계라는 것이었다. 정리하고 이사를 하게 되면서도 무엇 하나 수련과 상의 한마디 한 적이 없었다. 수련이 그렇게 도망을 하는 것처럼 이사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세상의 종말이 곧 오는데 상의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산속에 들어가 오염이 되지 않은 것들로 직접 농사를 지어 먹고 세상과는 단절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의를 하면 무조건 안 간다고 할 것은 빤한 일이기에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고 교회 장로 한 가족과 집사들 가족 몇 가구가 함께 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수련은 기가 막혔다.

“당신이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신들만 살기 위해 산속으로 피신 한다는 것이 온당한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아무리 세상이 타락을 했어도 그 속에 의인은 있게 마련이에요. 당신이 올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노아는 홍수가 나기 전에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죄인들 속에서 130년간을 회개하라고 외쳤어요. 그런데 당신은 뭐에요. 당신들만 살겠다고 산속으로 숨어드는 것은 자신들만 살겠다는 이기적인 얄팍한 신앙입니다. 난 그런 당신들 절대로 구원 받지 못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수련이 아무리 말려도 영우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모든 일은 정해졌고 떠나기만 하면 되는 상태에서 수련이 아무리 떠들고 안 간다 하여도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성되어 있었다. 약국은 성업 중이었기에 급하게 내놓으니 작자가 바로 나타났다. 나머지 일들은 수옥에게 부탁하고 일단 영우를 따라 이사를 하기로 한 것이다. 효빈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효빈도 산골 학교로 전학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낯선 땅 정선 임계로 가서 수련은 적응을 하려 노력을 했지만 잘 되질 않았다. 밤이면 온 사방이 어두음뿐이었고 이 분위기에서 빠져 나갈 틈이라고는 바늘구멍만한 틈새도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영우는 세상과는 완전히 등져야 한다며 신문은 볼 수도 없었으며 텔레비전은 아예 없애 버렸다. 완전히 세상과는 격리된 상태에서 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상태였다. 당장 이곳을 탈출해 떠나고 싶지만 마음뿐이었다. 마을이 분지처럼 산으로 둘려져 있어 밤이면 하늘에 빼곡하게 들어찬 별들만 보일 뿐이었다. 이곳엔 집들이 모두 재래식으로 지어져 있어 그 흔한 가스라든가 석유와 같은 연료는 없었다. 그래서 낮이면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때야만 했다. 이곳에서는 마을의 오염을 막기 위해 화석연료와 같은 것들은 쓰지를 않았고 여자들이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때야만 했다. 산에는 죽은 나무가 지천으로 널려 있어 나무를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운반이 힘들었다. 간신히 힘들여 가져 오면 영우가 톱으로 자르고 도끼로 나무를 패서 장작을 만들어 잘 마르도록 쌓아 놓으면 갔다 때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여자의 몸으로 나무를 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나무를 하다가 행여 뱀을 만나면 놀라서 다시는 산에 나무를 하러 다니기가 싫었다. 산에서의 어둠은 도시보다 더 빨리 찾아든다. 수련이 사는 마을에도 해가 지기 무섭게 어둠이 찾아 든다. 저녁을 짓느라 아궁이에 불을 때며 밖을 보면 칠흑 같은 어두움뿐이다. 사방은 온통 산으로 둘려 있어 뚫린 건 하늘뿐이다. 밤하늘엔 별들이 총총히 서려 아름다워 보이지만 이곳 생활이 불만족스러운 수련으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궁이의 불빛에 비치는 수련의 얼굴은 부스스하게 부어 있고 곳곳에 멍 자국이 나 있었다. 오늘 영우와 한바탕 다투다가 처음으로 영우에게 구타를 당한 것이었다. 이유는 수련이 이곳에선 도저히 살 수가 없으니 다시 도회지로 나가자고 했기 때문이었다.

“여보, 난 정말 여기가 싫거든요. 제발 다시 생각해봐요.”

“안 된다고 했잖아, 이곳이 얼마나 좋아. 공기 맑고 공해 없고, 이렇게 좋은 곳이 왜 싫다는 거야.”

“그렇게 좋으면 당신 혼자 여기서 살아요. 난 효빈이와 여길 떠날테니까.”

“내가 나 혼자 잘살려고 여기 온줄 알아? 우리 식구 모두가 구원 받고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히 살고 싶어 그런 거라구.”

“당신이나 구원 많이 받고 하늘나라에 가서 실컷 살아요.”

이렇게 옥신각신 다투다 급기야 화가 난 영우가 장작개비를 집어 수련을 때리기 시작했다. 매를 맞으니 억울해 말대꾸를 하다 보니 흠씬 매를 더 맞은 것이었다. 영우에게 손찌검까지 당하고 부터는 이곳이 더 싫어졌다. 어떻게 하면 이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 기회만 있으면 연구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임계면까지 나가는 차도 없지만 걸어서 나가려 해도 한 시간 이상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또 임계까지 나간다 해도 임계에서 강릉이나 정선까지 가는 버스가 많지 않았다. 거리상으로 본다면 임계에서 강릉이나 정선은 비슷했지만 교통은 강릉이 훨씬 편리했다. 그러나 그 거리가 원체 멀어서 이곳 지형을 잘 모르는 수련으로서는 감히 엄두도 낼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할까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정민이었다. 수옥에게 정민의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 정민이 전에 다녔던 회사로 찾아가 연락처를 알아내어 몇 번인가 전화를 하려 했었다. 그러나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정민을 떠난 것이 미안해 수화기를 들었다 놓기를 수없이 반복했던 수련이었다. 그러나 정민이 너무 보고 싶고 목소리만이라도 듣고 싶었다. 그래서 전화를 했더니 마침 직원이 정민을 바꾸어 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정민과 통화가 이루어진 김에 한번쯤 만나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마침 수옥과 만날 일이 있어 한번은 내려 와야 했기에 핑계 김에 정민과 만날 요량으로 영우에게 맞아서 몸에 난 멍 자국의 부끄러움도 잊은 채 영우에게는 수옥에게 다녀온다는 핑계를 대고 온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정민은 괴롭기만 하다. 그때 나무화석을 주우러 가지만 안았더라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져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니 마음이 더 아픈 것이다.

“정민씨, 결혼은 했어요?”

“네?”

“그럼 아직도......”

“그래요. 아직....”

그렇게 대답을 하는 정민의 음성에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사실 그때까지도 정민은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혼자 살고 있었다. 그는 여자에게 실망을 하여 독신으로 살겠다고 결심을 한지 오래였다. 첫 번째 결혼 실패 후 수련과는 정말로 행복 하고 싶었다. 수련이 물에 뛰어들어 죽으려 할 때 위험을 무릅쓰고 함께 물에 뛰어들어 살리고부터 그녀는 자신과의 만남이 운명적이며 필연적인 만남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운명은 그것마저 비껴가고 만 것이다. 신이 자신에겐 짝을 주지 않았다고 단정했다. 그는 여자에겐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은 채 일에만 몰두했다. 이미 자신은 사막에서 죽은 몸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것은 신이 자신에게 보너스로 준 삶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일을 하며 불우한 사람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들을 도우며 사는 게 유일한 기쁨이고 행복이었다. 그러던 차에 수련에게서 전화가 왔던 것이다. 그는 한편으론 반갑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두려운 것은 수련을 만남으로 전과 같은 뜨거운 사랑이 되살아날 것 같아서였다. 수련 또한 정민이 아직도 결혼 전이라는데 대하여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녀는 서둘러 일어섰다.

“전 이만 가야 되겠어요.”

수련이 이천의 수옥에게 가겠다며 일어선다. 정민은 일어서는 수련을 잡을 수가 없다. 그는 이미 남의 아내이기 때문이었다.

“정민씨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산다니 안타깝네요. 제가 뭐라고... 빨리 좋은 소식이 있기 바랍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정민은 떠나는 수련을 보며 왜 그리 마음이 허전한지 모른다. 힘이 빠지고 어디 한군데가 뻥 뚫려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강남터미널에 가서 고속버스를 타고 이천으로 간다며 동대문 지하철역으로 내려간다. 정민은 함께 내려가 지하철 표를 끊어 주기 위해 내려갔다. 그녀는 혼자 가도 된다며 극구 말렸지만 이대로 표도 끊어 주지 않고 그냥 보내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였다. 그는 앞장서서 내려가 지하철 표를 끊어 주었다.

“잘 다녀가십시오.”

“감사했어요. 안녕히 계세요.“

그녀는 손을 흔들며 개찰구를 빠져나가 총총히 계단으로 사라진다. 정민은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발길을 돌렸다. 그녀가 떠난 후 돌아서 오는 발걸음은 무거웠고 가슴이 허전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오고 가는데 혼자만이 고독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군중 속의 고독이 어떤 것인지 오늘에야 비로소 몸으로서 느끼고 있었다. 그날 퇴근해 집에 와서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뒤척이다 새벽녘에야 잠이 든 모양이었다. 깜빡하는 바람에 늦잠을 잔 것이다. 부랴부랴 씻고 아침은 생략한 채 회사에 나가니 어느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었다고 한다. 아직 출근 전이라 했더니 나중에 전화를 다시 하겠다며 끊었다는 것이었다. 분명 수련이었다고 단정했다. 정민이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다하니 수련의 성격상 마음이 아파 그냥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점심때쯤이었다. 전화벨이 울린다. 정민이 수화기를 들으니 수련의 목소리다.

“어제 정민씨가 아직도 결혼을 않고 혼자 살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마음이 아파 밤새 울었어요. 모두가 내가 더 기다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거라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미안하고 죄송해요.”

“지나간 일인데 이제와 잘잘못을 따지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사람에 만남이란 게 연이 닿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게 모두 운명이라는 거죠. 안 될 인연이라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안 되는 거지요.”

“정민씨, 오늘 가는 길에 한번만 더 만나고 가도 될까요? 오늘 정선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번만 꼭 보고 싶습니다.”

“수련씨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가는 길에 근처에 가서 전화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정민은 고민을 해본다. 이미 자신을 버리고 떠난 사람을 이렇게 만나서 어떻게 하자는 건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쪽에선 ‘원래 네 여자였는데 그녀의 남편 된 놈이 네가 없는 틈을 타 빼앗아 가버린 것 아니냐’ 는 마음이 일기도 한다. 이렇게 갈피를 못 잡고 마음은 방황을 거듭하고 있는 중에 전화의 벨이 힘 있게 울렸다. 수련의 전화였다. 건너편 호텔 커피숍에 와 있다는 것이었다. 정민은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담감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느낌이다. 그는 벗어 놓았던 양복을 걸치고 사무실 문을 나섰다. 호텔 커피숍을 살피니 수련이 화장을 하였는지 어제보다는 화사한 모습으로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왠지 그녀를 보니 아까부터 하였던 고민은 어디로 사라지고 도리어 마음이 가벼워 진다.

“그렇게도 만나기 힘들더니 한번 만나게 되니 쉽게 만나지게 되는군요.”

“정선에 가기 전에 한번만 더 보고 싶었어요. 저 이렇게 뻔뻔한 여자예요.”

“마음이 원한다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세요. 사람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게 죄가 됩니까?”

“정선에 가서도 전화 하고 싶으면 할게요.”

“글쎄요, 그건 순전히 수련씨 마음이에요.”

“이젠 정민씨 얼굴 봤으니 전 갈래요.”

“강남 터미널에서 차를 타나요?“

“아니에요. 동서울터미널에 강릉 가는 고속버스가 있어요.”

“그래요. 그러면 함께 가기로 해요. 내가 표를 사드릴게요.”

“그러면 저야 좋지만 회사가 바쁘지 않은지 모르겠어요.”

“괜찮습니다. 직원들이 알아서 잘 하니까요.”

정민과 수련은 정말 오랜만에 함께 걸어 본다. 그들은 동대문운동장역까지 걸어서 가기로 했다. 4호선을 동대문에서 타고 동대문운동장에서 갈아타느니 걸어서 동대문운동장역까지 걷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한 정거장의 짧은 거리였지만 지난 13년 세월의 그리움이 그 짧은 거리에서 해소될 수는 없겠으나 그들은 그 짧은 거리를 걸으면서라도 아쉬웠던 세월의 앙금을 털어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걸으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냥 아무 말 없이 걷고 있지만 그동안 하지 못한 말들을 무언 속에 하고 있었다. 동대문운동장역까지는 긴 거리가 아니기에 아쉽게도 눈 깜박할 새에 도착이 된 기분이다. 매표소에서 승차권을 끊어 함께 탔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 이 순간만은 정민과 수련은 연인이었다. 얼마 걸리지 않아 전철은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했다. 마침 강릉으로 가는 버스가 잠시 후 출발하는 것이 있었다. 정민은 급히 표를 끊어 수련에게 주었다. 그녀가 버스에 오르자 버스의 문이 닫히고 바로 차가 출발을 하려고 한다. 정민은 버스가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드디어 차가 출발을 하자 수련의 눈에서 눈물이 반짝이는 것을 정민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