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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사막에서 길을 잃다. 제9부

운우(雲雨) 2011. 9. 11. 10:06

9부

당장 달려가 아이를 안아보고 싶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아이를 데리고 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상한 생각이 든다. 그렇게 보고 싶어 미치도록 찾아 다녔어도 미친 사람 취급하며 대문도 열어주지 않던 사람들이다.

“씨 도둑질은 못한다더니 정말 너를 빼 닮았더라.”

“정말?”

“그럼 내가 정민씨 아이를 낳은 것 이야기 했어?”

“내가 미쳤니. 내가 그 인간에게 애 난 이야기를 왜 해.”

“언니 잘했어. 구태여 그 인간에게 할 이유가 없잖아.”

수련은 그 아이를 언젠가는 한 번 쯤은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막연한 생각일 뿐이었다. 방금 수옥에게 덕수와 그 아이가 왔다는 말을 듣는 순간 보고 싶다는 생각 보다는 돈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엉망이 되었다는 수치심 때문에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했었다. 그런데 수련을 빼 닮았다는 말 한마디에 그 아이가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 아이가 얼마나 컸으며 정말 자신을 빼다 박아 놓은 것처럼 닮았단 말인가? 수련의 큰 눈에 어느새 눈물이 맺혀 있다.

“만나 볼 거니?”

수옥의 묻는 말에 수련은 목이 메어 대답을 못하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어떻게 왔대?”

“나도 자세히 못 들었어, 형부하고 얘기하는 사이에 네가 올 시간이 된 것 같아 별안간 닥치는 것보다 내가 너에게 먼저 알려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만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를 기다린 거란다.”

수옥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사실 아무 것도 모르고 들어갔다가 덕수와 그 아이를 보았을 때 자신의 표정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표정관리가 엉망일 것은 빤 한 것이다.

"언니, 고마워. 난 그것도 모르고 언니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어서 무슨 큰 일이 났나 했었어.“

“너만 아니면 우리 집에 큰일 날 일이 뭐 있겠니? 자, 이제 들어가자.”

두 자매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이는 잠들어 있었다. 수련의 품을 떠날 때는 태어난 후 얼마 되지 않아 빼앗긴 아이라 얼굴도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그런데 벌써 세 살이 된 아이는 몰라보게 자라 있었다. 아마 밖에서 마주쳐도 몰라볼 것이었다. 잠들어 있는 모습이 천사와 같다. 순간 수련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수옥의 남편과 이야기를 하고 있던 덕수가 일어나 수련을 보고 서있었다.

“웬일이에요?”

“오랜만이요.”

“?”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우리에게 아직도 할 말이 남아 있어요? 아이를 빼앗고 나를 내 팽개치듯 내친 사람들이 누군데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찾아 와요.”

“그때는 미안했어요. 그러나 수련씨도 잘 알잖아요. 그건 내가 하고 싶어 한 일이 아니잖아요.”

“일이 어떻게 됐던 결과는 나를 씨받이로 이용하고 버린 거잖아요. 흐흐흑흑”

아이를 보고 쏟아졌던 눈물이 수련은 덕수를 보자 분노의 눈물로 변하고 말았다. 덕수도 수련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수련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시끄러웠는지 설 잠을 자고 있던 아이가 부스스 눈을 뜨고 낯선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덕수의 옆으로 바짝 붙는다.

“아빠, 우리 집에 가자.”

“그래, 조금만 더 있다 갈게, 아줌마하고 조금만 더 이야기 하고 가자. 응.“

“네, 아빠.”

“아빠 아줌마하고 밖에 나가서 잠간만 얘기하고 올게 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 알았지?”

“네,”

아이는 수련을 닮아서 눈이 컸다. 큰 눈을 껌뻑이며 대답하는 모습이 너무 앙증스럽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는 수련은 마음만 아플 뿐이다. 그러나 수련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는 것은 자신이 낳은 자식이면서도 엄마라고 떳떳하게 나서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자신이 친엄마라고 하면 어린 아이에게 혼란만 줄 것은 빤한 일이기 때문이다. 덕수는 밖으로 나가서 이야기 좀 하자며 먼저 밖으로 나간다. 수련은 밖으로 나가기 전에 아이를 품에 안아 본다. 품에 안고 아이의 손을 잡아보니 포동포동한 것이 마치 고사리 손 같아 깨물어 주고 싶다. 울음이 나올 것 같아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런 수련의 모습을 보는 수옥 내외의 마음도 편치가 않다. 밖으로 나온 덕수는 수련이 뒤쫓아 나오자 수련을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그냥 내가 가는대로 따라만 와요.”

10여분을 달리니 차는 어느 산속의 카페에 와 있었다. 주변이 온통 숲으로 둘러 싸여있어서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실내장식이 유럽풍과 한국의 고유미가 잘 어우러져 고풍스럽게 보인다. 마침 흘러나오는 음악이 정민이 좋아 하는 그리그의 “솔베이지의 노래”다. 음울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이 마음을 가라앉게 한다. 아직 초저녁이라 그런지 홀 안엔 손님이 드문드문 앉아 있을 뿐이었다. 차를 시킨 후 덕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소문으로 수련씨의 소식은 듣고 있었어요. 내가 수련씨에게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너무나 많은 죄를 지어서요. 용서해 달라고는 않겠어요.”

“할 말이 무엇인지 용건만 말씀하세요. 전 회장님 얼굴 대하기가 소름이 돋을 정도니까요.”

수련의 대답은 찬바람이 불 정도로 냉랭했다.

“난 사실 수련씨에게 용서를 구하고 저 아이와 셋이서 살자고 찾아 온 거요.”

“뭐라고요? 그 잘난 마나님은 어떻게 하고 지지리도 못나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은 나와 살려고 해요?”

“나라고 수련씨의 그런 소식을 들으며 편했겠어요? 그동안 내가 겪은 고통도 수련씨만은 못했겠지만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살아온 시간이었어요.“

덕수의 처인 민경희는 재벌집의 무남독녀로 세상에 부러울 것 없이 성장한 사람이다. 단 하나 부족한 것이 있었다면 어머니를 일찍 여위고 홀아버지 밑에서 자랐다는 것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해 그런지는 모르나 남을 사랑하고 배려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또한 외톨이로 자란 사람의 특성이 그러 하듯이 자신뿐이 모르는 이기적인 마음과 독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의심이 많았다. 수련을 알기 이전에도 그런 성격 때문에 종종 다투기도 했지만 수련이 낳은 아이를 빼앗아 온 후로는 그녀의 성격은 더 나쁜 쪽으로 변해 갔다. 그런 성격 때문에 아이를 낳아 오면 달라질 줄 알았는데 성질만 더 나빠지게 한 꼴이 되고만 것이다. 회사에서 업무가 늦어져 늦게 퇴근을 하게 되면 회사로 전화를 해 무엇 때문에 늦게 퇴근을 하느냐고 꼬치꼬치 물었다. 때론 어떤 여자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늦게 퇴근을 하려 한다고 다그치기 일 수였다. 그녀의 의부증 증세는 시간이 갈수록 심해져 갔다. 어느 날은 밖에서 낳아온 아이라 더럽다며 그 아이를 데려다 버리라고 했다가 어느 때는 아이를 세상에 없는 보물처럼 대하기도 하고 때론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마다 다른 히스테리 한 성격으로 변해가는 경희와 한바탕 다투고 홧김에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온 것이다. 몸이 별로 좋지 않아 다른 날에 비해 일찍 퇴근을 하여 들어와 쉬고 싶었는데 집에 도착을 하니 아이의 우는 소리가 들리고 경희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엄마,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밥이 먹기 싫다는 아이와 밥을 먹이려고 실랑이를 하다가 음식을 쏟은 모양이었다.

“네가 배가 덜 고팠구나. 쫄쫄이 굶겨야 정신이 들 거야, 지가 어떤 주제인지도 모르고...”

들어오며 그 소릴 듣는 덕수는 얼굴이 화끈 거리며 화가 치밀어 오른다.

“당신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아이에게 할 소리야?”

“내가 뭔 소리를 했다고 그래요. 그리고 내가 못할 말을 했어요. 제 주제도 모르고 란 말이 뭐가 나빠요. 사실이 그런 것 아니에요?”

덕수는 기가 막혔다. 물론 수련에 대한 이야기는 자신이 했지만 수련을 통해서 아이를 낳아 오라고 한 것은 경희였다. 그러던 그녀가 자신이 낳지 않고 다른 곳에서 낳아 데려온 아이란 것을 노골적으로 어린 아이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그 말이 억울하면 애새끼를 데리고 나가던지 당신 마음대로 해요. 잡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하지, 당신 절대 후회하지 않겠지.”

원래 싸움이란 작은 싸움이 확대되어 큰 싸움이 되는 것이다. 서로가 한 발짝씩 물러서면 될 일을 한 치도 양보 없는 그들의 자존심 싸움이 일을 더 크게 만든 것이었다. 덕수는 홧김에 아이를 데리고 나왔지만 딱히 갈 데가 마땅치 않았다. 그는 고아 출신이었기에 이런 일을 상의할만한 일가친척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덕수는 수련과 그렇게 헤어진 후 경희 몰래 사람을 시켜 수련의 근황을 알아보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수련의 행적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수련이 자살을 시도 했다가 살았다는 소리를 듣고 충격을 받았으나 수련을 볼 면목이 없어 한 번도 찾아올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경희와 이혼을 하고 수련과 함께 아이와 셋이서 살려고 다른 사람의 명의로 아파트 한 채를 사놓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뿐이지 실행에 옮기진 못하고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오늘 아이 일도 있고 해서 홧김에 아이를 핑계로 찾아오게 된 것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인정에 약한 수련의 마음에 혼란이 인다. 덕수가 경희에게 어떤 수모를 당하던 아무런 상관이 없다. 모두가 자신이 저지른 일이기 때문이다. 허나 아이가 경희에게 학대를 받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아이는 덕수의 아이도 경희의 아이도 아닌 수련 자신의 아이기 때문이었다.

“난 회장님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아요. 그러나 내 아이가 사모님께 학대를 받고 산다면 참을 수가 없어요. 저 아이 내가 키우게 해주세요. 그리고 저 아이 이름이 뭐예요?”

아! 이름을 가르쳐 주질 않았군. 저 아이 이름은 우빈이에요. 김우빈.“

“김우빈~ 김우빈...”

그녀는 우빈이란 이름을 자꾸 되 뇌이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차차 놀라고 있었다. 정민과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아직 호적엔 올리지 않았지만 효빈이라고 지을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운명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련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덕수는 수련을 설득하기에 여념이 없다.

“수련씨, 우빈이를 수련씨 혼자 키우기는 힘들어요. 내가 이혼을 할 테니 우리 셋이서 함께 살도록 합시다. 그러면 내가 처음에 수련씨에게 한 약속도 지키는 셈이 되잖아요.”

“도대체 회장님은 그 이야길 얼마나 더 우려먹어야 되겠어요. 전 이제 결혼할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도 우빈일 데려 온다고 하면 좋아할 거예요. 우빈이를 나에게 주세요. 내가 잘 키울 테니까요”

결혼할 사람이 있다는 수련의 말에 덕수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실망하는 빛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무슨 일을 하는 사람입니까?”

건설회사에 다니는 사람입니다. 죽으려 바다에 뛰어든 나를 살려준 사람이에요. 지금은 사우디아라비아에 나가 있어요. 이제 일 년만 더 기다리면 귀국을 할 것이고 전 이미 그 사람의 아이도 낳았어요.“

“뭐라구요?”

“할 이야기 다했으면 이만 가요. 우빈이가 기다리겠어요. 우빈이는 여기에 두고 가세요. 내가 잘 키울게요.”

“아니요. 수련씨가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한다면 내 자식을 성도 다른 남에게 맡기고 싶지는 않아요. 내가 그냥 데리고 갈 것이요.”

“우빈이가 그렇게 학대를 받고 사는데 그래도 데리고 가겠단 말이에요?”

“이젠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할 거요. 그동안 언제인가 수련씨와 합치게 될 것이란 생각 때문에 참아 왔어요. 내가 그 회사에서 이루어 놓은 것을 모두 잃는다 해도 수련씨와 우리 우빈이 와 함께 살 수만 있다면 아까울 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으니 내 운명이려니 하고 살아야지요.”

차를 타고 오는 길에도 덕수는 통 말이 없었다. 수련 또한 할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집에 도착을 하니 우빈이는 잠들어 있고 수옥 내외가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던 눈치였다.

“얘, 뭘 하느라 이렇게 늦었어. 애가 즈이 아부질 어떻게나 찾는지 칭얼거리다 잠이 들었어. 측은해서 못 보겠더라.”

“수고 하셨습니다. 전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덕수는 간다며 잠이 든 우빈을 품에 안는다. 우빈이는 피곤했는지 덕수의 품에서 그대로 잠들어 있다. 우빈이를 안은 채 덕수는 수옥 내외에게 인사를 한다.

“오늘 실례가 많았습니다. 수련씨도 잘 있어요.”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덕수의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회사에서는 하늘 높은 줄 모를 정도로 당당한 사람이 가정 문제에는 여느 남자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금옥은 그런 덕수의 모습을 보며 마음 한구석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전과 같이 마음이 약해진다면 자신은 끝장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수련이기에 약해지려는 마음을 모질게 다잡는다. 그러나 어린 우빈이를 보니 마음이 아픈 것은 모성애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우빈이를 안고 나가는 덕수의 뒤를 쫓아가 문을 열어 주고 우빈이를 받아 안아서 차에 누인다. 오랜만에 안아 보는 우빈이의 체온이 수련에게 전달이 되며 따뜻함을 느끼게 한다. 눈물이 마구 흐른다. 지금 헤어지면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 기약 없는 이별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수련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덕수의 마음도 편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빈이를 보며 울고 있는 수련의 모습을 말없이 보고 있던 덕수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만 가볼게요. 수련씨 건강하고 행복하기 바랍니다.”

수련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덕수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잠시 그렇게 침묵 속에 서 있던 덕수는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악셀레이터를 세게 밟는다. 엔진의 소음을 길게 내며 차는 잠시 동안에 수련의 시야에서 멀어져 간다. 수련은 언제 또 만날지도 모르는 우빈이를 보내놓고 마음이 아파 엉엉 소리를 내어 울고 싶지만 그걸 참으려니 가슴이 더 아프다.

한편 덕수의 처 민경희는 홧김에 아이를 데리고 나가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시간이 가고 어둠이 내리니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덕수가 아무리 큰소리를 치고 나갔어도 고아 출신이라 친인척이 아무데도 없는 걸 너무나도 잘 아는 경희다. 그런데 어둠이 내린지도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덕수와 우빈은 들어오질 않고 있는 것이다. 경희는 화가 나면 물불을 못 가리는 불같은 성격이지만 뒤가 무른 편이었다. 원래 아버지의 성격이 그랬다. 아버지는 자상할 때는 한없이 좋은 아버지였지만 잔소리가 많았고 집안일에도 사사건건 참견하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모르나 어머니가 민경희 하나만 낳고 병으로 일찍 죽었다. 지금까지도 아버지가 말을 해주지 않아 어머니가 어떤 병으로 죽었는지 민경희는 알지를 못한다. 아버지는 그 후 재혼을 했으나 새 여자를 잘 믿지 않고 의심이 많았다. 아버지가 새 여자를 잘 믿지 않는 것은 혹 자신이 죽고 나서 하나 뿐이 없는 딸에게 어떤 위해라도 있을까 해서였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은 모두 믿지를 못했고 특히 돈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해서 새 여자에게도 돈에 대하여는 인색했던 것이다. 그러자니 자연히 민경희가 결혼을 하기까지 아버지가 재혼을 했던 여자는 자그마치 8명이나 되었다.

“경희야, 세상에 믿을만한 놈은 아무도 없단다. 애비나 너 외에는 아무도 믿지 말거라. 세상사는 것 별것 아니지.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이 되지, 그러나 혹여 애비가 죽더라도 아무도 믿지 말고 돈만 꽉 움켜쥐고 있으면 걱정 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돈이 모든 걸 해결해 줄 테니까.”

그는 딸과 마주 앉으면 늘 귀에 따갑도록 하는 말이었다. 또한 덕수와 결혼하겠다고 첫 인사를 시키고 난 후에 아버지가 한 말은 덕수를 절대 믿지 말라고 한 말이었다.

“그놈이 착하게는 보인다, 만은 여자 복이 많은 놈 같더구나. 주변에 여자가 끓으면 너에게는 좋을 리가 없지. 만약 결혼을 한다 하여도 저런 녀석은 여자가 주변에 끓기 때문에 돈을 물 쓰듯 할 수 있지. 그러니 내가 없더라도 모든 것은 네가 꽉 움켜쥐고 주인 노릇을 똑바로 해야 할게다.”

아버지 밑에서 그런 교육만 받고 자랐으니 경희가 여자로서의 소양은 쌓을 시간이 없었고 가정교육 또한 배울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의 삶의 방식인 돈이면 무엇이든 해결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몸에 배어 버렸다. 학교에서 공부를 하며 지식은 쌓았는지 모르지만 정작 필요한 가정교육은 제대로 받지를 못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런 점이 자신의 약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고치려고 노력은 했지만 어려서부터 밴 습관들이 쉽게 고쳐질리 없었다. 덕수는 회장이란 직함을 가졌지만 아무런 권한도 행사할 수 없는 허울 좋은 회장에 불과 했다. 덕수는 그런 걸 잘 알면서도 그녀에게 불만을 내색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그런 덕수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아버지의 고언에 충실히 따랐다. 아버지가 죽은 후 회사의 사세가 엄청난 신장을 한 것은 덕수의 회사 경영능력에 힘입은바 컸다. 덕수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주지 않는 경희가 미웠는지도 모른다. 부부이니 노력하면 간격이 좁혀질 것이라 생각으로 살았지만 시간이 흘렀어도 경희의 성격을 조금도 변하질 않았다. 행여 우빈이를 낳아서 데려온 후 변화가 있으려 나 했지만 달라진 것 보다는 히스테리와 의부증만 키우고 만 꼴이 되고 말았다. 덕수와 다투고 난 뒤 덕수가 우빈일 데리고 나가자 그녀는 곧 후회하며 혹시 회사에 다시 나간 것은 아닌 가 해서 전화를 해봤지만 일찍 퇴근을 했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었다.

“내가 잘못했어, 마음은 안 그런데 왜 말은 그렇게 나올까, 도대체 이이가 아이를 데리고 어디로 갔을까? 나 같아도 나 같은 사람은 싫어할 거야, 그래도 이런 나와 살아주는 것만도 고마운 사람이 아닌가.”

그녀는 후회를 한다. 그러나 늦은 시간임에도 덕수에게서는 연락이 없다. 아무리 자신이 못되게 했을지라도 야속한 마음이 든다. 시계는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이 자정을 넘어가니 경희는 조급증이 나기 시작한다.

“아, 이이가 도대체 아이를 데리고 어디로 갔단 말인가?”

어린 우빈이를 데리고 있을 덕수를 생각하니 한편으론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계가 1시를 가리키고 있을 때 깊이 잠든 우빈이를 안고 덕수가 들어 왔다.

“흥, 안 들어 올 줄 알았는데 웬일로 들어왔수?”

그러나 덕수는 한마디의 대꾸도 없이 우빈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아무런 기척이 없다. 경희는 살며시 일어나 방문을 살짝 열고 방안의 동정을 살펴본다. 덕수가 우빈이를 꼭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다. 두 부자(父子)가 자고 있는 모습이 오늘 따라 측은해 보인다. 그녀는 안도의 숨을 쉬면서 덕수에게 따뜻한 말로 대하지 못하고 빈정대는 투의 말로 맞이한 것이 또 후회가 된다. 마음은 그러지 말자 하면서도 덕수를 보면 그렇게 말이 튀어 나오니 그렇다고 입을 막아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덕수에게 하는 행동을 자신이 먼저 고쳐야 되겠다고 생각을 해본다. 덕수 또한 아침에 깨어 깊은 생각에 잠겨 본다. 이렇게 살 것이냐, 아니면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출발을 할 것인가를, 그러나 걸림돌은 우빈이었다. 수련이 오케이만 한다면 간단할 것 같지만 민경희가 그리 만만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은 덕수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 수련도 결혼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으니 덕수가 선택할 길은 단 한 길 뿐이었다. 덕수는 마음에 결심을 한다.

“그래, 경희는 어차피 내가 짊어지고 가야할 십자가다. 그 무거운 짐을 누가 대신 지겠는가? 내가 선택한 길이니 내가 짊어지고 갈 수밖에....”

그렇게 마음을 정하니 한층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든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더니 서서히 지고 사막에도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정민이 사무실에 앉아 업무를 정리하고 있는데 중기기사가 헐레벌떡 숨이 차게 뛰어 들어오며 현장에서의 사고 소식을 알린다.

“사고가 났어요. 사람이 죽었다고 합니다.”

“뭐라고요? 사람이 죽다니 무슨 사고였고 누가 죽었단 말입니까?”

정민도 놀라 책상에서 벌떡 일어나 사고의 경위를 묻는다.

“자세한 것은 잘 모르고 저녁을 먹으러 급히 들어오다가 차가 뒤집히는 사고가 났는데 한 사람이 죽었다 합니다. 모든 차량은 중기부 소속이기 때문에 차량의 고장으로 생긴 사고라면 당연히 중기부의 책임이기에 그냥 편히 사고 경위를 들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급히 현장에 나가 사고 경위를 파악한 뒤 어떤 조치를 해야 하는 것이다. 정민은 급히 차를 몰고 사고 현장으로 나가 보았다. 사고 현장은 숙소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도로를 포장하고 아직 개통이 되지 않아 일반 차량의 통행을 막기 위해 흙더미로 쌓아 놓았는데 사고 차량이 급히 오다가 미쳐 막혀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흙더미를 들이 받는 바람에 난 사고였다. 차량이 일본산 도요다 랜드크로스란 찝차였다. 차가 사막을 자유로이 다닐 수가 있어서 모래사막 현장을 측량하는 기사들이 즐겨 쓰고 있었다. 화물적재함에 천막을 쳐서 쓰고 있는 차였는데 흙더미를 들이 받는 순간 탑승한 사람들이 천막을 뚫고 튕겨 나온 사고였다. 몇 사람은 경미한 부상이었지만 한 사람은 튕겨 나오며 머리가 돌에 받혀 사망을 한 것이었다. 사망한 사람은 정민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직 미혼인 청년이었는데 순박한 외모에 웃는 모습이 정이 가는 청년이었다. 언제가 약혼녀라며 함께 찍은 사진과 편지를 보여 준 적이 있었다. 귀국하면 바로 결혼식을 올리기로 되어 있다는 것이며 하루에 한 번씩 꼬박꼬박 편지를 보내오는데 사연들이 사랑이 배어 있는 애틋한 글이었다. 그리고 그 청년은 4대 독자라 했다. 아침마다 현장으로 측량을 나갈 때마다 중기부에 들려 차를 가지고 나가며 늘 정감어린 웃음과 인사를 하던 청년이었다.

“백대리님 좋은 아침입니다.”

“아, 오늘도 사막으로 측량을 나가는군요. 조심해서 다녀와요.”

늘 아침마다 이런 인사를 주고받던 사람이었다. 그 청년의 사람 좋게 보이는 인상을 생각하니 정민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는 자신보다 어렸지만 고국에 두고 온 정혼녀 만날 날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입장에서는 정민과 다를 바 없었다. 만약 자신이 그 청년처럼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고 상상을 해보니 소름이 돋는다. 지난번 청년이 보여 주었던 약혼녀의 사진 속 얼굴을 떠올리며 오열할 그녀의 모습과 수련의 모습이 오버랩 되어온다. 그날 저녁 회사 체육관에 그 청년의 빈소가 설치되었다. 많은 근로자들이 와 그 청년의 명복을 빌어주고 있었다. 그중 제일 슬퍼하는 사람은 사고를 낸 운전자였다. 한국에서 올 때 함께 온 동기라는 것이다. 유난히 친했던 두 사람은 사고 당일에도 열심히 측량을 하다가 깜빡 저녁 먹을 시간이 지난 것을 몰랐다. 저녁 시간이 늦으면 식당 문을 닫기 때문에 문을 닫기 전에 식당에 도착을 시키기 위해 급하게 차를 몰다 보니 도로에 막아 놓은 흙무더기를 미처 보지 못하고 사고를 내게 된 것이었다. 그는 청년의 영정 사진을 보며 자신이 죽인 거라며 슬피 울고 있었다. 영정 사진 속의 청년은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얼마 전 이곳 그랜드캐넌이란 곳에서 동료들과 휴일 날 놀러가 찍은 사진이었다. 정민은 그 청년의 영정 사진을 한참을 들여다보고는 빈소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주님, 여기 젊은 한 영혼이 주님의 부르심으로 주님의 곁으로 갔습니다. 열심히 살고자 이역만리 열사의 나라에 와서 땀 흘리다 불의의 사고로 주님의 곁으로 간 것입니다. 부끄럽지 않게 살다간 영혼입니다. 그 영혼을 받아 주시고 이 땅에 남아 애통해할 정혼녀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시고 상처가 빨리 아물도록 치유하여 주십시오. 그 영혼이 얼마나 애통해 하겠습니까.”

정민은 기도를 마친 후 일어나 슬피 울고 있는 사고를 낸 운전자의 곁에 앉았다.

“너무 슬퍼 말아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요. 다 운명이라 생각해야지요.”

빈소에는 그 청년과 함께 일을 했던 토목과의 직원들이 여기저기 모여 앉아 김빠진 맥주를 마시며 사고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요즘 들어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