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
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
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
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ㅁ
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일 줄 아는 까닭에 걷
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
고 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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