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쉽게 씌어진 시 / 윤동주

운우(雲雨) 2019. 10. 19. 09:03

쉽게 씌어진 시 / 윤동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후의 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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